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지내며 생긴 버릇 중 하나는 길가의 작은 동물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까치가 얼마나 호기심이 많고 얄미운 지, 까마귀와의 치열한 영역 다툼 끝에 누가 이 구역을 차지했는지.
그중에서도 은둔의 신이라고 불리는 길고양이는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20대에 고양이를 키웠던 남편은 큰 몸짓이나 쩌렁쩌렁한 말보다 미세한 소리와 움직임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자신부터가 큰 기복이 없는, 일정한 리듬의 사람이라 그런 것 같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자신보다 100배는 더 기뻐하고 100배는 더 슬퍼한단다.)
그래서 가끔 내가 자진하여 감정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면,
그는 크고 까만 눈으로 내 몸짓과 표정을 살피며 옆 자리를 지킨다.
사시사철 뜨거운 손으로 내 손을 부여잡고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땀에 쪼글 해질 때까지 절대 먼저 놔주지 않는다. 이 답답하리만큼 우직하고 수동적인 방식이 그 시절의 날 지탱해 주었다.
졸업 후 훨훨 날아오르리라는 패기가 무색하게, 반디가 죽고 나서도 내 취준기간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공교롭게 겹쳤던 코로나 시기까지, 현재에 안주할 핑계는 차고 넘쳤다.
자유의 상징이었던 자취방에서 몸과 마음이 묶인 채 그저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포트폴리오와 구직 사이트를 끄적거리고,
남자친구의 퇴근시간 즈음 어설프게 씻고,
그가 배달시켜 주는 밥을 먹고,
그가 잠에 들면 나도 눈을 감았다.
남자친구는 거의 매일 내 자취방에서 출퇴근을 하며 이런 내 모습을 지켜봤다.
마치 야생동물을 관찰하는 BBC 다큐멘터리 카메라맨처럼.
당시 나는 껍질이 벗겨진 살 마냥, 가벼운 말에도 금방 베여 피가 났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원망하게 될까 두려워, 움츠러든 마음이 스스로 담을 쌓았다.
어느 날, 그가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같이 읽어보고 싶어.”
『반려동물과 이별한 사람을 위한 책』
피할 이유를 댈 수 없을 정도로 참 직관적인 제목이었다.
책은 담담한 문체로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존재와의 이별,
그리고 펫로스에 대해 설명했다.
아직도 슬프고 보고 싶은 게 자연스러운 거였다.
내가 심신이 나약하고 성숙하지 못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무쓸모 인간이라,
부모님의 지원을 무기력하게 흘려보내는 불효자식이라,
걱정해 주는 남자친구에게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갈수록 날 것의 상태를 들키는 여자라서,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금방 멀쩡해지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으레, 마땅히, 반려견이 죽으면 누구나 힘들 자격이 있는 거였다.
요동치는 감정을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절절한 위로의 말보다도 펫로스를 단계별로 설명하는 건조한 글이 위안이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에 집중하는 기분을 느끼며, 읽고 또 읽었다.
가파른 산을 오르듯이 중간중간 숨을 고르고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계속했다.
이렇게 슬픔을 위로할 때는 상대의 슬픔을 충분히 존중해 주고,
그 괴로움에 공감하면서 언제든 마음을 기댈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어야 합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어떤 희망적인 말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반려동물과 이별한 사람을 위한 책 中』
바로 옆에서 묵묵히 함께해 주는 그의 온기에 기대어, 마침내 끝까지 읽어냈다.
이게 당시 내 상태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 첫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