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라는 병의 무서움
사람들은 암이라는 병에 대해 잘 모른다. 아마 막연하게 “고치기 어려운 병”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크다. 나 역시 그 한 글자 앞에서 덜컥 겁만 집어먹을 뿐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유방암이라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며칠 동안 잠을 줄여가며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던 것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가장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은 유방암 환자와 가족들이 가입해있는 인터넷 카페였다. 그곳에는 우리 엄마보다 상황이 나은 사람, 비슷하지만 결국엔 이겨내고 있는 사람,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있었다. 나는 그들의 상황과 엄마를 비교해가며 가끔씩 건져 올릴 수 있는 안도를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사실 내가 늦은 밤까지 노트북을 붙들고 찾아 헤맸던 것은 정보라기보다 그 한 가닥의 안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의 나약함이 너무나도 명백해지는 것 같아 괴롭기도 했다.
활자로 습득하는 정보와는 별개로 투병 과정을 직접 지켜보고 나서야 알게 되는 사실, 느끼는 감정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암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무섭고 절망스러운 병이었다.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처음 느꼈던 모순은 치료 과정에서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항암 치료는 쉽게 말해 나쁜 세포를 죽이기 위해 좋은 세포까지 한꺼번에 죽이게 된다. 요즘은 좋은 세포를 덜 괴롭히고 나쁜 세포를 골라 죽이는 표적치료라는 것이 개발되었지만,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 암의 종류는 아직까지 많지 않다. 엄마는 불행 중 다행으로 표적치료가 가능한 허투(Her2) 양성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항암 치료는 어찌 되었든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엄마는 항암치료와 표적치료를 견뎌내는 동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게 되었다.
딸로서 가장 두려웠던 항암치료 부작용은 오심과 구토였다. 암환자는 면역력이 가장 중요하다. 면역력 수치가 정상범위에 유지되어야 계속적인 치료가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면역력이 약해진다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합병증의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 면역력을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든 잘 챙겨 먹는 것이고, 오심과 구토는 살기 위해 먹는 것 마저 힘들게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엄마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면서도 최선을 다해 먹었다. 먹을 수는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더니 엄마의 부작용은 오심이나 구토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들 대신 찾아온 것은 근육통이었다. 엄마는 항암 4~5일 차에 찾아오는 엄청난 근육통에 대답도 잘하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 옆에서 살가운 말 한마디 못 붙이고 속으로만 허둥대던 나는 그래도 차라리 근육통이 낫다고 생각했다. 병을 이겨내는 데 근본적으로 더 안 좋은 것이 잘 먹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잘 먹던 엄마가 먹을 것을 삼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했을 이 병이 무서운 더 큰 이유는, 4기쯤이 되면 완전한 치유가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든 환자들과 가족들이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우리는 아닐 것이다.”라는 희망을 품게끔 가끔의 기적이 찾아온다는 데 있다. 엄마는 비록 아홉 차례의 항암과 표적 치료를 버티며 살이 많이 빠졌지만 그래도 큰 고비 없이 잘 견뎌내었다. 아니, 어쩌면 잘 견뎌내었다고 표현하면 안 될지도 모른다. 이제 항암치료를 그만두고, 수술을 해보자는 의사의 말에 엄마가 얼마나 기뻤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수술 뒤에도 표적치료는 평생 계속되어야 하지만, 표적치료는 항암치료에 비하면 부작용이 현저히 적은 편이다. 엄마는 3주 단위로 이어지는 그 끔찍한 항암의 과정을 어쩌면 그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고 기뻤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가끔의 기적”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처음 4기 진단을 받았던 당시 수술이 불가하다는 말을 들었던 엄마의 상태에 비하면, 수술이 가능할 만큼 암덩어리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기적을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신이 그렇게나 무심하지는 않다는, 흔히 뱉곤 했던 말에 모든 것을 걸고 싶어 졌다.
유방암 수술에 생각보다 적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은 감사하면서도 허무한 일이었다. 그동안 3주에 한 번씩 항암치료를 하며 버텨왔던 시간에 비하면 1시간 남짓한 수술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 연가를 쓰고 서울에 올라갔으나 결국 미뤄진 일정에 수술이 마칠 때까지 곁에 있지 못했던 나는,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수술이 시작되었다는 소식과 끝났다는 소식을 모두 들었다. 엄마는 잘 버텨주었다고 했다. 종교가 없었지만 하늘에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아무런 잘못 없이, 과욕 없이, 심지어 누리는 것도 없이 살아온 엄마에게 이 정도 시련이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대로 다 잘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말로만 듣던 기적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매일 같이 드나들던 유방암 카페도 잘 살펴보지 않게 되고, 엄마가 암환자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실감이 조금씩 무뎌졌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수술을 하고 보니 사실은 암이 두 종류였더라는 소식을 듣고도 크게 개의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허투 양성인 줄로만 알았는데 떼어낸 가슴에서 호르몬 양성의 암 조직이 발견된 것이다. 물론 두려운 소식이었지만 이미 기적에 대한 믿음으로 부풀어 오른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제 엄마가 거칠 과정은 25차례의 방사선 치료와 평생 이어가야 할 표적치료였지만, 이 기세로 간다면 언젠가는 모든 치료를 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틈을 타 엄마가 가고 싶어 하는 경주라던가 제주도에 가족 여행을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언니와 단 둘이 갔다가 엄마 생각이 참 많이도 났던 외국의 어느 나라에 데리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같은 것들. 그런 마음들은 사그라들기가 참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진정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부풀어올랐던 마음은 일이 잘못되었을 땐 가장 먼저 의심받기 쉽다. 섣불렀던 그 기대가 화를 불러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탓할 것을 찾지 못해 겨우 끄집어낸 것이 나의 그 때이른 상상들이었다. 엄마의 전이 소식을 들었을 때, 모든 일은 서두르면 그르친다는데, 내가 그렇게나 서둘러 행복한 상상을 해서 이렇게 된 것 같다, 는 생각을 했다. 방사선 치료 중 추이를 보기 위해 찍은 CT에서 발견된 폐 위의 반짝이는 점들을 의사는 ‘폐 전이’라고 단정 지었다. 나는 그 소식을 오랜만에 만난 연인과의 데이트 중에 듣곤 주위의 시끌벅적함이 일순간 조용해지는 경험을 했다. 믿기가 어려웠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수술을 끝마친 지 겨우 3개월 만에 폐 전이라니. 표정을 살피며 무슨 일이냐 묻는 연인에게 지금은 묻지 말아 달라는 말을 했다. 생각과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가혹한 것 같았다. 우리 엄마가, 그 바보같이 힘들게만 살아온 사람이 뭘 어쨌길래. 하늘에 감사했던 게 불과 3개월 전이지만, 나는 금세 마음을 바꿔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시끌벅적한 번화가의 풍경들은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수없이 묻고 또 물었던 질문들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암세포는 흔한 표현으로 먼지와 같아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고 했다. 한번 암환자인 사람은 평생 (잠재적) 암환자다. 늘 조심해야 하며, 정기적인 추적 관찰을 게을리 해선 안된다. 특히나 4기인 암환자에게 전이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잔인하지만 일반적인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아닐 줄 알았던 것이다. 나는 소식을 전한 언니에게 “엄마는 어떻게 하고 있노?”라고 물었다. 이제 방사선 치료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에서, 표적치료만을 하며 전보다는 괴롭지 않게 지낼 날들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버텨왔을 엄마가 얼마나 절망스러울지 걱정이 앞섰다. 어쩌면 나의 때 이른 기대들 보다 더 큰 기대를 품고 있었을 엄마의 슬픔을 어찌해야 할까. 엄마는 다시 항암을 시작해야 한다는 담당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그거를 다시 버틸 수 있을지.....”
내가 엄마라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나를 살리고도 죽이는 치료들에 기력이 없어 바닥에 가만 누워있다. 좋아하는 트로트 프로그램을 본다거나 아무 생각 없이 즐기기 좋은 색깔 칠하기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내 몸속에 나를 죽이는 무언가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밥을 먹을 때도, 걸을 때도, 심지어 치료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숨을 쉬고 있는 와중에도, 암이라는 것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내 안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며 결국 다른 곳에 터를 잡았다. 매 분 매 초가 무서울 것 같다. 그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실제의 내가 무서워졌다. 엄마가 무서워하고 있는 중이라면 어떡하지. 엄마가 포기하고 싶어 하면 어떡하지. 그런 순간이 엄마에게 와버리면 어떡하지. 엄마가 아무런 공포도,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진짜 어린애였을 때로 돌아가고, 그때의 엄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