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수업

by 금교준

돈 좀 못 벌어도 돼요. 나는 당신이 좋은 거야. 당신이 자주 했던 말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아무런 인과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 순간이면 대개 당신을 못살게 굴었던 일들이 연달아 떠올라 팔이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립니다. 인과응보나 권선징악 같은 말이 생긴 게 영 이유가 없진 않은가 봅니다. 나는 당신의 속을 모조리 긁어낸 죄로 이따금 불안감에 압박당하는 형을 살게 된 것이 분명하니까요.


얼마 전에 우연히 당신의 SNS를 들어갔습니다. 낯설지만 확고하게 다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과 웃고 있더군요. 당신이 찾던 적당한 사람이겠죠. 다른 일에 휘둘리지 않고, 아니 휘둘리더라도 당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줄 수 있는 안정적인 사람.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더라도 쉬는 날마다 꽃핀 언덕을 같이 다녀줄 수 있는 사람. 더 나은 직장에서 연락이 와도 당신과 멀어진다면 가지 않을 사람. 그런 걸 곱씹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당신이 원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듭니다.


*


당신의 눈은 여느 사람보다 두 배 이상은 크고 그만큼 밝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보고 우리 돈가스 먹으러 갈래요? 물었을 때, 그러자고 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 커다란 눈이 계속 보고 싶었으니까. 자꾸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두 번씩 연달아 뛰는 느낌이 좋았으니까. 그래선지 당신과 얘기할 때면, 당신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면 마라톤을 뛰고 있는 것처럼 숨이 가쁘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머리칼에선 체리향이 났는데, 길을 걷다가 그 향이 나면 고개를 돌리며 기대 어린 미소를 지은 적도 있습니다.

둘 뿐인 강의실에서 보여줬던, 나를 위해 만들었다던 그림 수업 자료가 선연합니다. 원과 구, 사각형과 삼각형, 소실점 하나로부터 이어지는 도시, 두 개 이상의 소실점. 일주일에 하나씩 그려봐요. 그럼 엄청 늘 걸. 하던 자신감 어린 목소리. 하얀 조명과 각양각색의 물감으로 점철된 책상. 께름칙한 소리로 강의실을 메우던 철제 의자. 당신과 관련된 기억을 하나 떠올리면 지금처럼 그날의 장면이 몽땅 상기되다가 마음이 헤집어집니다. 그날의 대기 온도, 당신이 풍기던 분위기, 내가 보였던 행동이 뒤를 잇고는 마침내 힘이 빠진 당신의 뒷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른 무엇보다 당신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나는 당신이 원했던 사람이 됐을까요. 당신이 내준 과제를 성실히 그렸다면. 우리 그만해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면. 혼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둘이 같이 살아갈 미래를 언급했다면. 당신을 몇 날 며칠 울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온몸을 떨게 만드는 자책과 후회를 하지 않았을까요.


여느 사람보다 두 배 이상 컸던 눈.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썩이면 주변의 공기를 체리향으로 가득 채웠던 머리칼, 그림이 배우고 싶다는 나를 위해 손수 만들었다던 파일, 주말마다 가고 싶다던 꽃핀 언덕 사진.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 <희랍어 시간> - 한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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