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중부에서는 열흘 후면 장마가 시작된다. 여름이 영글대로 영글어 무더워지기 전에 여러 날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는 비. 온갖 것들을 가라앉히는 비. 최근 오 년간 평균 14일의 강수일을 가졌던 장마는 기상청을 통해 가장 많은 해와 적은 해를 구분해볼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많았을 때는 28.5일을 기록한 2020년, 적었던 건 9.9일인 2021년이다. 기상청은 한반도를 중부, 남부, 제주도로 삼 분할하여 지역별 장마 시작일을 정리해두기도 했다. 중부에서는 2013년도가 가장 빨랐고, 2021년도가 가장 늦었다.
내가 굳이 장마를 파헤치는 태도로 서두를 적은 이유는 어딘가로부터 몰려온 그리움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서다. 별안간 연달아 이어지는 비 소식을 접했고, 곧 착잡해졌기 때문에. 비를 여러모로 곱씹다 보면 그 원인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발원지’라 함은 1. 흐르는 물줄기가 처음 시작한 곳이거나 2. 어떤 사회 현상이나 사상 따위가 맨 처음 생기거나 일어난 곳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걸 찾기 위해 ‘처음’과 연관된 것들을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처음 한 말, 처음 먹어본 음식, 아무튼 처음과 처음 사이에 있는 것들을. 게다가 그 때문에 들뜬 마음이 한순간 무너진 걸 고려하면 일차원적인 것들은 소거해두는 게 좋을 거였다.
나는 문득 이름 하나를 기억해냈다. 내가 처음 접하는 걸 같이 해보길 원했던 사람. 잊기 어려운 순간에 놓여있고 싶어 했지. 그럼 다수의 계절을 난 뒤에도 함께 있던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그 사람은 강조했었다. 몇몇 계절을 남으로 살았어도 기어코 떠올랐으니까 분명 성공한 셈이다. 이런 식으로 회상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 사람은 제주도에 적을 두고 살았다. 덕분에 나는 외곽이 전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을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녹동항에 가본 것도, 배에 차를 실은 채 바다를 건너본 것도,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열 시간 넘도록 움직여본 것도, 그 사람 몫이었다. 제주 돌담길을 걷다가 아카시아 향이 났을 때, 죽으면 아카시아 나무로 관을 짰으면 했던 적이 있었다고 말한 것도 그 사람이었지. 그 이유는 단지 향이 좋아서였다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올해의 나는 그 일을 회상할 적마다 왜 ‘죽게 되면’이 아니라 ‘죽으면’이었는지를 곱씹어보곤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초창기의 마음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잠시간만 돌이켜보아도 그 사람이 좋아했던 행동들을 어느샌가 그만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염치없는 짓을 꽤 많이 저질렀지. 주는 거에 비해 받는 게 빈약해서 그 사람은 자주 허전했을 거였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내가 상처 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원했던 거, 듣고 싶어 했던 거, 하고 싶어 했던 것들을 나는 줄곧 외면하고 살았다.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 많다.
제주도의 장마 시작일이 가장 늦은 해는 우리가 한창 만나고 있었던 2021년도였다. 강수일이 가장 적은 해이기도 했고, 그 사람은 비를 좋아했으니 그 해에는 기분 좋은 일이 영 없었을지도 몰랐다. 파고들면 들수록 착잡하다.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며 ‘올해는’ 하고 기원했고, 그것이 내가 그나마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