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주변 사람을 흉보는 사람을 보았어. 꼴불견이었지. 가족, 직장 상사, 동료, 후배, 처음 보는 사람까지 모조리 그의 입을 오르내렸거든. 그런데 말이야. 가만 보니까 거기서 내 일부가 보이는 거야. 지난 것들, 특히 믿는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 않았을 네 모습을 낱낱이 벗겨내던 내가 거기 있었다. 비참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게 견딜 수 없던 거야. 이기적인 거지. 아프기 싫어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거, 그렇게 혼자 합리화하는 거. 돌연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좋은 면면을 밝혀내자고. 왜 너를 좋아하게 된 이유들 있잖아. 눈동자가 빛나는 거, 손이 작고 예쁜 거, 목소리가 딱 내가 좋아하는 높낮이인 거, 아플 때 시시콜콜 챙겨주는 거, 뭐 그런 것들. 그러니까 좀 살만해지더라고. 내가 그토록 좋은 사람을 만난 거였구나, 싶어서.
빌 기(祈)에 원할 원(願), 기원은 원하는 걸 간절히 빌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발아되었다. 불교에서는 부처에게, 프로테스탄티즘(오늘날 우리나라의 개신교)과 로마 가톨릭교(천주교)는 하나님(하느님)과 예수에게 기원을 드린다.* 도와달라고, 때로는 살려달라고. 근래 들어 찾아뵙는 승려는 원력(소원의 힘)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기 때문에 간절히 빌면 종종 안 될 일도 이뤄진다고 했다. 물론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덧붙었지만. 그럼 내가 지금부터 네가 잘 살기를 기원한다면, 동시에 네 좋은 낱낱을 기억하고 행복을 바라면 네가 조금은 살만해질까. 내가 벌려놓은 상처가 기워질 수 있을까.
불완전하기 때문에 무언가에 의지하거나 기대는 존재. 그런 인간의 기원을 곱씹어보자면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 떠오른다. 19세기까지 지배적이었던 건축 10서를 지은 장본인이 비트루비우스인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의 저서를 참고하여 인체 비례론을 소묘했던 작품이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다.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다리를 뻗은 다음 컴퍼스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원에 붙는다. 정사각형으로도 된다. 사람 키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잰 길이는 두 팔을 가로 벌린 너비와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보았다. 자연적으로 빚어지는 인체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했을 때 완벽하다는 것을 근거로.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선하게 보이는 사람이 악할 수 있고, 악하다고 여겨진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만든 일이 합당한 일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돌이켜보고 성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오늘 무심코 마주친 인물에게서 나를 보았고, 기원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