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는 이 정도면 됐다.〉19화
오늘은 생각을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말들이 남아 있었고,
정리하면 그럴듯해질 이야기들도
몇 개쯤 떠올릴 수 있었다.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이유도, 결론도
나름의 모양을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예전의 나는
그 과정을 의무처럼 여겼다.
생각은 정리되어야 안전하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은
언젠가 문제를 만들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하루가 끝날 때마다
머릿속을 훑었다.
왜 그랬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다음엔 어떻게 할 건지.
그 질문들을 꺼내는 순간,
하루는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이미 지나온 일들인데도
다시 붙잡아 세워
설명을 요구하는 시간.
그게 성실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다음 날의 내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질문들을 꺼내지 않았다.
정리하려는 순간마다
생각은 더 복잡해졌고,
마음은 오히려
제자리를 잃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를 붙잡으면
다른 것이 따라 올라왔고,
끝을 보려 할수록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반복됐다.
지금의 나에게는
정리보다
여백이 필요하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오늘은
생각을 그대로 두었다.
엉킨 채로,
완성되지 않은 채로,
딱히 이름 붙이지 않은 상태로.
어디까지가 감정이고
어디부터가 생각인지
굳이 나누지 않았다.
정리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책임해진 건 아니었다.
외면한 것도 아니었고,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그 생각들을
끝까지 따라갈 힘이 없다는 걸
인정했을 뿐이다.
예전 같으면
그 상태를 두고
나태하다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했다.
모든 생각이
오늘 안에 자리를 찾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모든 감정이
지금 당장 설명될 필요는 없다는 걸,
조금은 허락해 주기로 했다.
내일의 나에게
조금 맡겨두는 선택도
필요하다는 걸.
지금의 내가
다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듯이.
정리하지 않은 마음 덕분에
오늘은 조금 덜 지쳤다.
하루를 끝내면서
나를 다시 불러 세우지 않아도 됐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평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 하나로
하루를 접을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지 않은 날도
하루로는 충분했다.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하루는 아니었고,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서
흐트러진 하루도 아니었다.
그대로 둔 것들 덕분에
오히려
조금은 덜 흔들리는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오늘은 이 정도면 됐다.
오늘의 나는
이 정도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