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마음의 길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김명민 교수의 책 제목을 혼자 자주 읖조려본다.
내가 나의 오늘에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난 오늘 영화한편을 간신히 희망했었다. 내 옆은 언제나처럼 그이길 바랬고, 그가 표도 끊고 팝콘도 사주고 괜시리 툭툭 거리는 나도 잘 받아주기를 희망했다. 그런 희망으로 어제, 그제를 버틴걸지도 모른다.
말을 꺼내려고 목구멍에 "영..화.."가 들어찬 순간 그가 내 말을 가로막는다. "여수 출장가야할 것 같은데"
공연히 예술의 전당 사이트를 기웃거려본다. 2주간 공연일정이 텅 비어있다. 이런적이 잘 없는데, 예술도 푹푹찌는 한여름엔 휴가를 가야는건가보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뭔가를 찾고 있다. 조용하게 귀를 막고 어딘가를 향해 몇시간이고 멍때리고 싶다. 이왕이면 몰입도가 좋은 '로맨틱코메디 영화' 이거나 '몇 안되는 클래식 아는 곡' 이었으면 좋겠는데, 혼자라도 영화관에 갈까. 네 아이들 케어해야하는 오늘 일정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이 불안감, 찝찝함을 동반한 싫은 감정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부모시대는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분들 눈엔 먹고 살만하니까 하는 '배부른 고민'일테지. 물리적으로는 배부르지만 심적으로는 '배고픈 고민' 이 이려운 것을 해내야만 하는 시대에 나는 사남매를 키우고 있다. 같이 아이키우는 엄마를 찾아 하소연하는 수밖에 없는데, 하소연도 참 능력이다. 나는 그 하소연을 잘 못하는 맹꽁이라 혼자 글로 쓴다.
최고로 게으른 하루를 보내볼까? 이렇게 생각하니 살짝 희망이 생긴다. 글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쓰라고 하는데,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글은 배설물이란다. 어떤 글은 영혼의 양식이지만, 어떤 글은 배설물.
나는 배설물을 다시 주워먹고 있는건 아닌가. 배설물과 영혼의 양식 사이에 내 글은 어디쯤 어정쩡해 있는걸까.
글이 나를 살게 하지만, 글이 나를 가장 침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때는 은유작가님의 책을 그냥 마냥 뒤적거린다. 읽다 보면 가끔 희망이 생기기도 하니까. 그냥 일단 읽는다. 이럴때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노고가 담긴 소중한 책들을 함부로 막 폄훼하고 싶어지니까. 이럴때 일수록 아무책이나 펴지도 말아야 한다. 다행히 나를 무한히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책이 내 책꽂이엔 꽤 많이 있다.
육아는 결국 나의 인생이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키워내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육아가 유독 우리 부모시대보다 더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부모님 세대는 어떤 힘으로 아이들을 셋넷씩 척척 키워내신걸까. 나는 그 힘을 '무관심 할 수 밖에 없는 환경' '혹은 동네가 함께 키웠으니 무심해도 되는 믿을만한 환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밥벌이 현장은 빠듯하게 돌아간다. 힘들기도 굉장히 힘들지만 사실 그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고 나면 나머지는 저절로 차단된다. 아이들은 대부분 그 차단된 나머지에 함께 속해 있는 형제들 혹은 친구에게 의지하던지, 자신만의 단단한 기제를 통해 어떻게든 성장했다.
그런데 우리가 부모인 지금 시대는 '도저히 무관심할 수 없는' 환경이다. '동네가 아이키우는 세상'은 커녕 안그래도 개별화 된 가정마다 바이러스가 칸막이를 치고 있다. 철학을 해야 할 것 같은 부모는 이 먹지도 않았는데 '배부터 부른 고민'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가야하는데 그들의 마음길이 안보인다. 왜? 내가 내 길을 몰라서다. 내가 나를 몰랐던 시대의 부모로부터 길러진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내가 나를 알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 우리 아이를 위해서 그 어디로 터 있는지 모를 마음길을 찾아내야만 한단다.
사실 아이 어렸을때 미리 육아서를 읽고 아이를 위해서라도 삶을 공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를 가끔 생각해보지만 그건 불가능한 것 같다. 마치 하루 삼시세끼를 차리고 치우면서 겨우 하루하루를 사는데 다음주 다음달 언제 먹을 점심 식단을 미리 짜놓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손에 잡히지 않는 일. 바로 육아를 미리 공부하는 일이다.
그래서 내 눈앞에 펼쳐진 일을 수습하는 방향으로 대부분 갈피를 잡아내지만, 막상 아이를 키우는 물리적인 힘이 들어가는 과정속에 '나의 마음길' 공부를 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이를 꼭 해내야 한다. 그래야 아이와 진짜 소통이 가능하다. 진짜 소통은 내 마음길을 열어 아이들에게 다가갈때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늘 열려있다. 부모를 거부하는 아이는 없지만, 내 아이에게 어찌해줘야 할지 헤매이는 부모들은 많다. 그래서 아이가 아닌 부모가 더 빨리 인생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다 손이 모자라면 같이 협력해서 해야 한다.아이는 부모에게 사방의 길이 360도 빼곡히 열려있는 존재라면, 부모는 자아와 무명으로 둘러쌓인 나라는 공간에서 아이에게 나갈 길을 반드시 터줘야 한다. 그 길의 시작점은 내 마음자리 그 중에서도 깊은 마음이어야 하고.
아이를 키우는 11년간 참 많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래동안 '겉도는 육아'를 해 왔다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 아이를 위해 나를 잘 알아내겠다고 세상 에너지를 다 쏟아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지만, 나는 지금 다시 처음 그 자리 엄마자리다.
그나마 전보다 낳은건 더 이상 아이들을 앞에 두고 '나를 찾겠다!!'고 빽빽거리지 않는다. 완전하게 찾아서가 아니라, 그냥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가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웠고 그걸 아프게 뼈에 새겨서다.
평범한 집에서 편안히 먹고살기 위한 돈을 벌어오는 일, 아이와 마음으로 소통하는 일. 그리고 내 자신을 잘 안다는 것. 이 셋다 각자의 이유로 참 힘든 일이다. 우리 부모들은 이 세가지를 다 해내야 비로소 '육아'를 시작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이 똑똑해 지면서,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빈곤한 시대. 나도 받지 못한 정신적인 채움을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세대. 방법은 하나다. 부지런히 배워서 사랑에 힘으로 이를 증폭시켜 전달하는 것. 아니 다행히 하나 더 있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에게 솔직해 지는것.
이제 제법 대화가 통하는 아이 10대 둘, 한자리수 둘인 우리집. 아이들에게 나는 늘 솔직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먼저 솔선수범 할 수 있는 것, 마음 속을 상대에게 전하고 이를 인정받길 바라는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표본을 엄마에게 씌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다. 그리고 내가 살려면 그래야만 하고.
"엄마는 이래서 힘들다. 엄마는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인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라는 말을 단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데 난 너희들과 그것을 주제로 진짜 대화를 자주 나누고 싶다. 그래서 힘들다. 안 배운것을 가르쳐야 하니까."
"왜 안 가르쳐 주셨어요?"
"아마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르셨을꺼야, 배워야 하는지도, 엄마 안 굶기는것만으로도 능력인 시대여서. 혹시 몰라. 그때도 이런 가르침을 배우고 받고 자란 가정들도 있지. 그런 가정들이 리더로, 즉 이끌어주는 사람으로 큰거겠지. 그래서 엄마는 너희가 끌려가는 사람보다는 자신만의 자유로 하고 싶은 대로 이왕이면 타인의 삶에 도움이 되는 리더로 키우고 싶다."
잘 크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는 이 세상에 없다. 성장은 본능의 유전자에 박힌 DNA니까.
부모는 감사와 측은지심으로 해결하고, 아이들은 부모의 정신적, 물리적 노력으로 무장해야 하는 때를 살고 있다. 모든 시대가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할말들이 있겠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 부모들에게 현실은 참 가혹하다. 일을 하면서, 자신을 찾으면서, 삶의 의미도 찾고, 아이도 그걸 알게끔 키워야 한다. 처음 장벽을 뚫어내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할 일이지만, 이것을 지속 유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끼리' 이 시대의 '부모끼리 뭉쳐야만 한다' 고 생각한다. 연대의 힘을 빌리는 거다. 혼자 어려우니까.
이런 의미로 '호락호락'이나 '글쓰는 새벽' '부모글벗' 등의 모임은 참 의미가 큰 공간이다. 그래서 더욱 내가 도움이 될 활동을 이어가고 싶고 활동의 질도 높여가고 싶은 욕심이 든다. 그 연장선에서 출간을 쥐고 놓치를 못하고 있나보다 싶다.
2000년이란 숫자도, 서기 몇년 불기 몇년 이런 숫자는 모두 세상에 흐름에 사람이 인공적으로 지정해 놓은 단위 체계, 말그대로 숫자일 뿐이다. 낮과 밤이라는 명칭도 마찬가지. 그저 그냥 지구는 우주작용으로 인해 자전하면서 태양을 공전하고 있다. 태양계는 은하계속에 은하계는 우주속에 그저 존재할 뿐이다. 아이와 나는 다시 지금 현 상태의 존재 그 자체에서 답을 찾아가야 할 일이다.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이렇게 던져졌는지 그 이유를 찾아 사색하는 일, 이 사색의 힘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일, 아이들과 함께 그 이유와 의미를 찾아가는 일.
이게 힘들게 읽고 쓰고, 치열하게 사색해서 정의한 우리 시대 부모 육아의 지향점이 아닐까?
쓰다보니 다시 내가 매일 왜 이렇게 새벽에 힘들게 글을 쓰고 있는지, 책내는 일이 아무리 시련을 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극복해가야 할 문제라고 못 박았는지, 천천히 풀어가도 될 '어떻게'라는 화두를 안고 이렇게 안달복달하고 있는지 의문이 풀리고 있다. 불안했던 마음도 어느정도 정돈이 되고.
글쓰기는 이렇게 나에게 '부모됨'을 매일 가르쳐주고 있다.
"당신의 영혼은 결코 부질없는 시도나 헛된 노력을 하지 않는다.
확실한 목적없이 시간과 공간을 영원히 헤치며 나아가는 일은 하지 않는다.
영혼은 아주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생의 2%, 닐 도날드 월쉬
"세상이 아닌 내 안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당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영혼은 그 답을 알고 있다."
내가 찾은 내 영혼에게 가장 답을 듣기 쉬운 도구, 바로 글쓰기다.
그리고 함께 쓰는 부모작가연대. 내가 오늘을 간신히 희망할 수 있게 하는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