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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an 23. 2018

이해에 대한 물음 : 장한나의 <뿌리가 되는 꿈>

        

 어린 시절 사전을 종종 사용하곤 했다. 두껍던 사전이 얇은 전자사전으로 바뀌고 곧 스마트폰으로 대체된 시대가 되었어도 여전히 개념의 분류에 익숙하다. 인간은 당연하게도 저마다 타고난 감각과 생각이 다르게 태어나며 그 때문에 사전적 정의나 보편적인 상식에 의존해 대화를 이어가는 걸지도 모른다. 이처럼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개념의 분류는 필연적인 것처럼만 보인다. 쉽게 말해, 우리의 대화란 실로 '상식'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사전을 만들고 개념을 정의하는 것 모두 '대화'를 위한 것 아니겠는가. 때때로 현상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개념만을 반복해 쌓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제대로 된 인지와는 점점 거리를 벌리는 듯하다. 장한나 작가는 우리의 인지를 방해하는 반복되는 개념의 분류를 지적한다. 


 이 개념의 분류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미묘한 폭력을 자행한다. 삶과 죽음, 흑과 백(黑白). 서로 반대편에 서서 팽팽히 대립하는 개념들은 익숙한 만큼 치명적이다. 멀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공기처럼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지만, 분쟁과 갈등을 만드는 씨앗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 풀어내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문다.

 장한나 작가가 윈도우 갤러리에 설치한 작업은 얼핏 보면 마치 거울에 장미가 비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생한 생화와 이미 말라버린 장미 사이의 유리로 인해 두 오브제는 대칭을 이룰 뿐이다. 깨진 유리조각을 '산 것'과 '죽은 것' 사이에 의도적으로 설치하니, 유리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미묘한 눈속임 덕에 관람객들은 자연스레 산 것과 죽은 것을 같은 대상으로 인정해버리고야 만다. 우리의 '보편적인' 인지와 상식은 거울이 같은 것을 비춰낸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거울처럼 작용하던 유리가 다시 제 기능을 하며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여줄 때, 작가는 다시 묻는다. 산 것과 죽은 것, 시든 장미와 생생한 생화는 정말 다른 것인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이 진실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 모든 분류들이 오히려 제대로 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 전시에서 나는 관객들이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과 새롭게 마주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장한나 작가의 작가노트를 발췌한 부분이다. 알고 있는 것과 진실 그 사이의 괴리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깨진 유리로 대변한다. 우리의 상식에 기반을 둔, ‘알고 있는’ 인지에서 살아있는 생화와 말라버린 장미는 당연히 '정 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삶과 죽음의 정의는 서로 반대방향을 향해 내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견고히 쌓아온 지식과 상식의 탑은 사실은 삶과 죽음이 이어져있다는 다소 식상한 명제처럼 다소 쉽게 무너진다. 거울은 대상을 왜곡 없이 담아낸다는 믿음덕분에 삶과 죽음을 같은 것으로 인지하고, 더 나아가 서로 다른 대상으로 여기던 두 오브제 사이의 유리는 깨져버린 모양으로 자리한다.

  장한나 작가의 기지는 또 다른 면에서도 발휘된다. 그는 공통점이 없는 뿌리와 뿌리를 엮거나 꽃과 꽃을 엮는다. 보편적인 뿌리의 위치에는 꽃을 배치하고, 서로 공통점이 없는 줄기와 뿌리들을 엮어 마치 한 생명처럼 연출한다. 이는 고정된 개념과 인지의 틀에서 벗어나 낯선 느낌까지 자아낸다. 혹은, 어딘가에서 그와 같은 식물을 봤던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 착각은 이내 의문이 되고 그 의문은 애매모호한 '정의'가 되어 우리의 생각에 뿌리를 내린다. 이처럼, 장한나 작가는 우리의 상식의 틀이 진정 현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질문을 던진다. 

 더불어 장한나 작가의 이번 설치가 그간의 다른 작품들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생화를 사용한 것에 있다. 그는 그간 바닥에 버려진 식물을 모아 엮거나 버려진 식물들을 엮어 새로운 작품으로 이용했다. 이례적으로 이 전시 시작 당일에 사온 싱싱한 꽃과 시든 꽃을 서로 마주 보며 배치하여 삶이 죽음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연출했다. 짧다면 짧은 14일의 전시 기간 동안에도 꽃은 그 생명력이 사라져 말라간다. 빨갛고 탐스러운 생명력을 지닌 꽃은 시간이 지나며 그 생명력이 소진되어 대칭을 이루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말라버린 꽃과 형태를 닮아간다. 하지만 형태만 변할 뿐, 장미는 장미다. 식물은 식물이며, 꽃은 꽃이다.

 작가의 이런 연출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극적으로 다가오지만,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겠는가. 생각해보건대, 우리의 인생이란 가까운 듯 멀고 친숙한 듯 낯선 것들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다. 상식은 다수가 인정하는 일개 의견일지도 모르며,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도덕이란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 바꿔 검이 되기도 하며 방패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한나 작가의 작업에서 산 것이 점차 죽은 것으로 변하고 산 것과 죽은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인생을 멀리서 관조 한다면 그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 상식에 기대어 어느 것도 확신 할 수 없다. 다만 형태만 변할 뿐, 장미는 장미다. 식물은 식물이며, 꽃은 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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