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지속가능성에 대하여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재작년 겨울 새벽, 3살 아이 손을 잡고 아이의 애착 인형만을 챙기고 잠옷에 점퍼만을 걸친 채 그 집을 나온 지 1년, 그러니까 별거를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났다. 그리고 다시는 남편이 사는 그 집에 들어가는 일은 없으리라고 어설프게나마 짐작했다.
집을 나오고 갈 곳이 없어 친정에 일주일을 머물고는 에어비엔비에서 꽤 그럴싸해 보이는 두 달 단기 방을 구했다. 그 집은 내가 가진 통장 잔고 내에서는 부담스러운 방이었지만 내가 너무 작아져 쓰레기를 뒤지는 고양이만 봐도 눈물이 나는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잔고에 맞춰 허름한 원룸이나 투룸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간 아이와 매일 부둥켜안고 울고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3살 아이를 데리고 도무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아이를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시키고 자격증을 준비했다. 그러는 동안 주위의 몇 안 되는 지인들에게 일거리를 부탁했고 들어오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10년 가까운 시간을 대학교에 머물렀지만 재학 중 결혼했기에 이렇다 할 경력도, 오래 일해 본 경험도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아니 쉴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미친 듯이 안절부절해서 똥을 눌 때 조차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리를 들썩들썩거리는 상태가 계속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단기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약속한 두 달의 월세를 내고 나면 또 다른 집을 구해야 했다. 그 두 달 동안 다음에 이사 가야 할 집을 고르는 동시에 앞으로 아이와 먹고 살기 위한 방책도 마련해야 했다. 지금은 2년 전세로 살고 있고, 아마 후에도 몇 번은 2년 단기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들썩이는 동안 아이와 사계절을 지나왔다. 봄에는 아이에게 꽃을 보여주려 등에 엎고 생전 처음 보는 동네를 서성였고, 여름에는 친정집 작은 농막 앞에 대형마트에서 산 풀장을 설치해 물놀이를 했다. 가을에는 낙엽을 모아 스케치북에 붙이기도 하고, 겨울에는 함께 커다란 담요를 둘둘 싸매고 베란다 문을 열고 도깨비는 어디 사는지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했다.
시간이 지나니, 남편과도 많이 누그러졌다.
아들과 셋이 함께 밥을 먹기도 하고, 어린이날이나 특별한 날에는 아이와 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정도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감정이었다. 재결합을 염두에 둔 누그러짐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를 유지하는 것, 즉 이혼을 유예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암묵적인 상호동의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미 우리는 부부로, 혹은 한 지붕 밑의 가족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 집을 나온 지 1년이 지났다. 그때의 다짐 그대로 나는 그집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서야 안절부절하지 않고 제대로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그날 새벽, 그날의 결정이 앞으로 좋을지 나쁠지에 대해. 그리고 이혼을 유예하고 있는 부부로써, 이 가족의 형태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