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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찬 Apr 17. 2024

<4부> 꿈을 이루고

#1. 전주교육대학교 복학

내가 군 생활을 하는 3년 동안에 집은 다소 형편이 나아졌다. 밥을 굶는 일이 없어졌고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바로 밑의 동생도 이모 집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해 있었다. 그 동생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20살이 훨씬 넘었는데도 변함없는 형제의 정이 흐르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둘째 동생은 자동차 정비를 하고 있었다. 셋째는 초등학교를 여동생과 함께 다니고 있었고 막내 동생은 꼬마였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조리 고개의 조그마한 밭 외에는 남의 선자를 얻어 짓고 있었지만, 가난을 벗어나고 있었다.


소도 한 마리 키우고, 쌀이 몇 가마니라도 집에 있었다.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마르보시(역전의 노동일)도 청산하였다. 나는 오직 공부에만 열중했다. 처음 두 달은 통학을 했다. 그 후 제대군인이었던 정창우와 동서학동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5년 후배들과 함께 다니고 있었으니, 행동거지도 제대군인답게 해야 했다.


남학생들은 형이라고 부르고, 여학생들은 삼촌이라고 불렀다. 가끔 여학생들이 자취 집으로 와서 김치도 담가주곤 했다. 그 고마움을 지금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자취 집 옆에 항렬이 같은 종씨가 살고 있었는데 나는 형님이라고 불렀고 아이들은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따랐다. 조카와 삼촌으로 지금도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다.


1년의 대학 생활은 촌음과도 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11월이 다가오자,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제대군인이나 고등학교 후배, 남원의 후배들이 출마를 권하니 해봄직도 하다고 생각했다. 1년 선배(대학에서만)들도 권했다. 용기를 얻어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세 명이 출마하여 경합을 벌였다. 학생회장 선거도 여느 선거처럼 학연, 지연, 혈연을 따졌다.


선거를 도와주는 운동원들은 열심히 학생들의 거주지를 찾아가 한표 한표를 부탁하였고, 나는 학견 발표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민병찬 교수님과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이셨던 김동학 교수님의 도움도 받았다. 격려도 많이 해주셨다.


학견 발표 원고는 고등학교 동창이며 진안군 부귀면 수항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이재봉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그를 찾아가 원고 교정 및 학견 발표 연습도 지도받았다. 그 결과 멋지게 해냈다. 선거전략으로 학교끼리 연합도 했다. 성심여고와 이리여고를 묶어서 신흥고등학교와 연합하여 선거를 치렀다. 완승으로 끝났다. 여자 부회장은 성심여고가 먼저 하기로 하였고, 다음 해에는 이리여고의 차례로 하기로 약속했다.


학생회장이 되니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열심히 공부도 했다. 거의 학생회장실에서 지내면서 공부했다. 1년 선배님들이 발령이 거의 받지 못해서 정체되어 성적이 뒤처지면 한없이 밀려나서 몇 년을 기다릴지 몰랐다.


처음으로 수학여행도 갔다. 나의 학창 생활에서 처음 있는 수학여행이었다. 가난한 가정형편이었기에 초․중․고등학교에서의 수학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해를 거쳐 해인사까지 다녀오는 여정이었다. 선택반이 서예반이었으므로 여학생이 주류를 이루었다. 지금 서예로 유명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분도 같은 서예반의 여학생이었다.


졸업이 다가오면서 실습도 나갔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도 쌓았지만, 수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40분의 수업계획안을 만들었지만, 그 계획안대로 수업을 이끌어 가기는 힘이 들었다. 수업에 오랜 경험이 있지 않으면 어려웠다. 실습도 끝나고 졸업의 시기가 다가왔다. 내가 보기에 발령은 불가능했다. 성적은 상위였지만, 기대할 수가 없었다.




#2. 교직 생활의 시작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 나도 처음으로 친구를 따라 처녀 보살한테 갔다. 친구가 보고 나서 나도 보라고 돈을 주었다. 간단하지만, 지나온 과거와 미래를 말해 주는 것을 조그마한 종이에 열심히 적었다. 정월에 북쪽으로 직장을 잡아간다고 했다. 음력으로 정월은 양력으로 3월을 뜻하였다. 졸업 후에 무엇을 할까 걱정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희망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3월 1일 자로 몇 명이 발령나는데 나도 끼어 있다고 했다.


학생과장님이시던 김대경 교수님께서 서울로 가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원하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싫다고 말씀드렸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다. 친척이고 아는 사람이고 한 집도 없었다. 그래서 전주를 희망했다. 초임발령을 받았다. 그해 3월 1일 자로 팔복초등학교로 발령받아 부임했다.


‘나의 꿈은 선생님’이 드디어 실현되었다. 발령장을 받고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과 서로서로 쳐다보면서 엉엉 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자식들을 까막눈 만들지 않겠다고 남원으로 이사 와서 어깨에 공이가 박히도록 일하시던 아버지, 허리끈 졸라매면서 밭 품팔이하시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그런 가정에서 선생님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니 가난을 벗어난다는 설움의 눈물이었다.


그 처녀보살의 말이 맞았다. 팔복동은 북쪽이었다. 선배들보다 먼저 발령받았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처녀보살을 찾고는 한다. 좋은 이야기를 해주신다.


초임발령지의 선생님들은 참으로 대단하고 도움을 많이 주었다. 근엄하신 교장 선생님, 인자하신 교감 선생님, 그리고 훌륭하신 선생님들과 교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6학년 담임이 초임발령의 시작이었다. 6학년 2반이었다. 공장지대였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닌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순진하고 선생님을 잘 따라 주었다.


매주 수요일은 선생님들의 친목회의 활동 날이어서 두 편으로 나누어 배구를 했다. 끝나면 용산다리 밑의 족발집으로 갔다. 자취생활로 시작했다. 학교 숙직실에서였다. 숙직은 도맡아 했다. 김치는 작은 이모님이 담가주셨다. 일요일에 작은 이모님 집에 가서 자고 월요일 아침에 김치를 한 단지 주면 가져오곤 했다. 그것으로 1주일을 지냈다.


어느 토요일 아침에 밥을 맛있게 먹는데 희끗희끗한 작은 귀도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먹었다. 추억으로 간직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월급은 고스란히 몇천 원 남기고 그 당시의 학교 옆의 선생님 사모님에게 계를 넣었다.


봉급이라야 4만 5천 원 정도였다. 노란 봉투에 넣어준 첫 월급이었다. 많이 세어보기 위해서 만원이 아닌 천원으로 달라고 했다. 첫 월급을 쥐고서 전주 남부시장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속옷을 사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동안 온갖 정성 기울여 가르쳐 주신 은혜의 보답으로 샀다. 물론 동생 것들도 샀다.


크든 적은 돈으로 하나씩 샀다. 그리고 첫 월급이어서 쓸 수 있는 것만 조금 남기고 부모님께 다 드렸다. 지금까지는 한푼 두푼 벌어서 썼지만, 처음으로 국가에서 받은 돈이니 다 드렸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서 아른거릴 때면 눈물이 난다. 계는 앞번호, 중간 번호, 끝 번호를 들었다.


그러니 다른데 돈을 쓸 수가 없었다. 처음 받은 곗돈을 어머니에게 가져드렸다. 20만 원이었으나 우리 집에는 큰돈이었다. 동네에다가 쌀돈(봄에 돈을 주고 가을에 쌀로 받는 일)을 주었다고 하셨다. 이듬해에 그 쌀 돈으로 처음으로 우리 논을 샀다. 지금은 그 논에 집을 지어 동생한테 물려준 바로 그 집터이다.




#3. 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편입

1975년 전주대학교 야간 영어영문학과에 2학년으로 편입했다. 교대를 졸업한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 주경야독했던 동창들은 그 후 대학교수도 되었고, 대부분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하거나 지금 교장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다. 무섭게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집은 서서히 가난에서도 벗어나고 있었고 셋째 동생부터는 중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2년째 선생을 하고 있으니, 이젠 결혼도 해야 한다고 중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께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 해서 부부 교사를 하겠다고 이해를 구하면서 허락받았다. 더 이상 선을 보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팔복동 아가씨들한테서 전화가 빗발쳤다. 하지만,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교사 업무와 대학 다니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아참, 빼놓고 갈 뻔했다. 우리 학급의 급훈은 ‘하면 된다’였고, 생활지도의 기본은 ‘거짓말하지 않는 학생’으로 정하였다. 초·중·고 교사를 그만두고 장학사로 갈 때까지 그것이 급훈과 생활지도의 기본이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는 시험을 보아서 가던 때이므로 중학교 입학시험에 많은 학생이 떨어지면 무능한 교사로 낙인찍혔다.


학교에서 자취하다가 내가 가르치고 있는 김 아무개의 집으로 밥을 먹고 잠자기로 하고 들어갔다. 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녁에 그 학생을 조금씩 가르쳐주면 되었는데 주로 수학 과목을 중심으로 가르쳤다. 그 집은 그 당시에 잘나가는 전주 주물공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이었다. 학생과 함께 한쪽에서 자면서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중학교 시험을 볼 때까지 있었다. 그러다가 11월쯤에 방을 얻어 유일한 여동생을 팔복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을 시켜서 같이 자취했다. 어린 여동생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했지만, 그래도 전학을 시켰다. 어리지만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니 고마웠다. 내가 밥을 할 때도 있었다. 큰방 집에서 신경을 써주었다. 양 아무개 선생님은 중앙초등학교 교사였다. 좋은 사모님과 좋은 선생님, 그리고 가정교육이 잘 된 아이들이었다. 역시 교육자 집안다웠다.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분들이 더 잘해주었던 것은 그 집의 처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다.


처제는 아무 할 일 없었지만, 가끔 와서 오래도록 머물다 갔다. 처제는 여동생을 도와서 밥도 해주고, 반찬도 해주곤 했다. 그러나, 나는 관심을 주지 않고 대해주었다. 당시에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혼은 생각하지 않고 멀리 뛰기 위해서 가르치고 공부에만 열중했다. 전주대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고 있으니 다른 데는 관심이 없었다.




#4. 교직 생활 2년째

6학년 담임에서 5학년의 담임으로 바뀌었다. 전주대학교의 영어영문학과에 편입도 했다. 더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고, 중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였지만, 저녁 7시부터 남노송동에 있는 전주대학교(영생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불빛은 희미했지만, 대부분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이었다. 모두가 열심히 공부했다. 1학기를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기다려지는 것은 오직 토요일과 일요일이었다. 잠을 한없이 자고 싶은 마음에서다. 항상 11시에 와서 12시에 잠자곤 하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다. 한 가지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중간치기를 잘하는 정 아무개 때문에 신경 쓰는 일이 말이 아니었다. 정 아무개 학생 혼자서 중간치기를 해도 안 되는데 여러 명을 데리고 중간치기를 하니 속상했다. 가정방문은 거의 날마다 하다시피 했다.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작전(?) 개시에 돌입했다. 어떻게든 붙잡아 버릇을 고쳐야 했다. 골목골목에 학생들을 세워놓았다. 잡아서 학교로 데리고 오려는 작전이었다. 드디어 정 아무개를 알지도 못하는 집 뒤에서 붙잡았다. 학교로 데리고 와서 따끔하게 혼냈다. 그 뒤로는 중간치기를 그만두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학생들에게는 배워야 할 시기가 있다. 때를 놓치면 영원히 그 시간만큼 늦어진다. 그 시간은 다시는 오지 않는다. 가르치는 데는 때가 있고 그 시기마다 학생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5. 배우자를 만나다

5월 어느 날이었다. 수업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 교문을 들어서더니 교실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물론 분만 대치 강사가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누가 올지 궁금했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갔다. 지금의 아내인 김영화였다. 그는 학생회장 선거 때 나를 비방한다고 해서 황학당에서 정창우와 기다리면서 딱 한 번 본 그 학생이었다.


인연은 묘한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근처에 식당이 없어서 라면을 끓여 주었다. 그는 먹는 시늉만 하고 먹지 않았다. 그다음부터 약간씩 신경을 더 써 주었다. 1년의 경험이 있어서도 그랬고, 동창생이어서도 그랬다. 그러다가 7월 17일, 제헌절 날 전 직원이 고산 대아리 저수지 밑으로 물놀이를 갔다. 문애선 여선생님과 김영화 선생님이 바위 위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짓궂은 교감 선생님께서 나더러 물장구를 치라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며 하지 않고 있었더니 같이 가자고 하면서 물을 뿌렸다. 나도 따라서 물을 뿌렸다. 그런데 문 선생님은 도망가는데 집사람이 된 김영화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물속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나는 급히 물로 뛰어들었다.


김영화 선생님을 보듬어서 안고 밖으로 나오는데 물에 불은 피가 솟구쳤다. 자세히 살펴보니 발바닥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수건으로 발바닥을 감쌌다. 피가 멈추지를 않았다. 발바닥이 많이도 찢어졌다. 깨진 병에 발을 베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지혈하고서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고산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그래서 가까운 유격훈련장으로 가기로 했다. 가파른 산을 김영화 선생을 업고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기능직 공무원인 김영로선생, 문애선선생, 나 그렇게 셋이 함께 가게 되었다. 가파른 산이어서 땀이 비 오듯 했다. 뜨거운 여름날이라서 더욱더 그랬으며 가파른 오르막이어서도 그랬다. 나는 기사도를 발휘했다. 딱 한 번, 문 선생과 김 선생의 등에 업히고는 쭉 내가 업고 유격훈련장까지 갔다. 위생병은 마취 주사가 없다고 했다. 그대로 꿰맬 수밖에 없었다. 전주까지 가기는 시간도 없었고, 힘들여 유격훈련장으로 왔는데 마취약이 없다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곱 바늘이나 꿰맸다. 얼마나 아팠으면 나를 붙들고 요동을 쳤겠는가. 치료 후 대야 저수지를 건너서 다시 업고 고산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가야 했다. 가끔 한 번씩 문 선생님이 거들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다.


치료 후, 빨간색 몽탁 티셔츠의 선물을 받았다. 그 뒤로 우리는 도움을 주고받았다. 레포트 작성도 부탁했다. 성실하게 해주곤 했다. 이것이 사랑의 씨앗을 띄우고 있었나 보나. 남원의 집에도 데리고 와서 아버지와 어머니께도 소개했다. 그 누추한 집에 와서 보고 얼마나 심란한 마음이었을까? 그때 내 집의 살림을 보고 같이 갔던 김 아무개의 말을 듣고 나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이런저런 고생하지 않았을 사람인데 그놈의 인연 때문에 나와 결혼해서 행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켰으니 나도 나쁘고 나쁜 놈이다.


아버지께서 집사람을 보시고 며느리한테 밥 한 그릇 못 얻어먹겠다고 하셨다. 체구가 작고 약해 보여서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씨가 될 줄이야, 누가 앞일을 알 것인가? 농사를 지어서 벼 수매를 해서 패물 하라고 30만 원을 주시던 그 아버지는 그래도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나 보다. 마지막 눈을 감으시지 못하고 계시다가 집사람이 전주에서 내려와 울면서 ‘아버님!’하고 부르자 눈물을 흘리셨다. 그 후 30여 분이 지나자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하늘나라로 가셨다.




#6. 저세상으로 가신 아버지

교직 생활 2년 차 1975년 가을 토요일에 학교 소풍이 있었다. 팔복동에 있는 황방산으로 깄다. 소풍을 마치고 학교에 도착하니 교감 선생님께서 빨리 남원 집으로 가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남원으로 와서 보니 아버지께서 남원도립병원에 입원하고 계신단다. 병원으로 가서 아버지를 뵈니 말씀을 한마디도 못 하시고 누워만 계시면서 눈물만 흘리셨다. 뇌혈전증이란다. 시간은 가고 하는데 치료 방법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뇌수술하지만, 그때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연치유 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다가 5일이 지나고 병원에서 퇴원하는 게 낫다고 해서 집으로 모셨다. 다음날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 고생만 하시다가 살만하니 하늘나라로 가셔버린 아버지! 친척과 진인들께서 소식을 듣고 문상을 오셨다. 문상객은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오고 있었다. 쌀쌀한 가을 날씨인데도 많은 사람이 문상을 오셨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말도 못 하는 거지가 찾아왔다. 아마 거지가 문상했다고 하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가끔 집에 와서 아버지의 밥을 나누어서 겸상하던 그러한 사람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돈이 모이면 아버지께 맡기셨다가 얼마의 돈이 모이면 가져가서 며칠 만에 오곤 했단다. 가족이 있었던가 보다. 그 말 못 하는 거지, 아니 그 아저씨가 문상한 것은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가 잘해주고 베풀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혼령을 모시는 지방을 붙여놓은 곳에 갑자기 촛불이 넘어져 지방만 남고 타버렸다. 나는 놀라서 두 손으로 지방을 움켜쥐고 불을 껐다. 왜 그랬을까? 바람도 불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또다시 아버지를 보내는 마음이 안타까워 집이라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 큰 나무 반절 사다가 옛날 큰톱으로 나무를 켜서 관을 짰다.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세 치 오 푼의 두께로 켜서 만들었다. 그리고 유황을 끓여서 관속을 그을리려고 부었다. 그런데 관 속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유황불은 끄는 방법이 없다. 물을 부으면 더 난리라고 했다. 경험이 최고였다. 외숙께서 가마니와 명석을 가져다 덮고서 발로 밟아서 껐다.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집이 타는 것을 본 나와 가족들은 그야말로 뛰고 자빠지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불이 났다. 어머니께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옛날의 남성 성냥갑에서 성냥개비를 끄집어내어 불을 켜는 순간 성냥갑 전체가 타버렸다. 어찌 된 일인가? 길조인가? 흉조인가? 당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셨는데 설상가상으로 불이 세 번이나 났으니 나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숙과 외숙은 “이제 너희 집은 불같이 일어날 것이다. 불이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난 것은 너의 아버지의 후광의 암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이제 지켜보아라. 분명히 ”너의 집은 불같이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되었다. 집에서 출상하는 날이다. 장지는 고향에 선산이 있는 삼계면 산수리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새벽녘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슬퍼하셔서 눈물을 흘리시는 거 같았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떻게 빗속에 아버지를 어떻게 모실까 고민했다. 그때는 장의사 차가 없어서 트럭으로 운구하기로 했으니, 상여가 다 젖어 망가질 것이 뻔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집에서 제를 지내고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에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순조롭게 상을 치르게 되었다.


고향에서도 많은 친지와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가시는 아버지를 배웅하러 나오셨다. 고향 마을에서부터 상여를 내려 메었다. 남원에서 간 사람들과 고향의 일가친척들과 함께 상여를 메고 산을 오르내리면서 장지에 도착하였다. 모두가 땀을 뻘뻘 흘렸다. 상여를 메었던 사람들은 특히 고생을 많이 했다. 장지에서 하관식이 있었다. 마지막 아버지를 보내는 의식을 보다가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곧바로 둘째가 운전하는 택시로 남원으로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수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그때까지 참아주었기라도 하듯이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아버지는 “자네만큼 선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선하게 사신 공덕으로 하느님도 감동하셨는지? 어려움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하신 아버지의 장례식을 돌보아 주셨는가 보다.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사셨던 아버지가 존경스럽다.


아버지께서 뇌혈전증으로 쓰러지기 3일 전에 동네 어르신들이 아버지의 혼불을 보았다고 얼마 후에 말해 주었다.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고생도 굶주림도 없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그러리라고 믿는다.




#7. 아내를 만나 살림을 차리다

앞서 말했듯이 팔복초등학교에서 2년째 근무하고 있었던 5월 어느 날, 조그맣고 아담한 아가씨가 교실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바로 동창이 집 사람이된 김영화였었다. 점심때 라면을 끓여 준 일을 지금도 한 번씩은 이야기하곤 한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싫어하는 것도 모르고 대접한답시고 라면을 끓여 주었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러나 공부하느라 신경을 쓰지를 않고 동창이어서, 그리고 먼저 교직에 발을 들였다는 생각에서 도와주었을 뿐이었다. 그해 여름 7월 17일 제헌절 날, 선생님들 모두는 대아리 저수지 밑에서의 발을 베이는 사고가 발생하여 유격부대까지 없고가 치료했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빨간 몽탁 T-셔츠는 더 끈끈한 인연을 맺어주었다. 사랑이란 싹이 트면 가까워지는 것인가? 가난한 집이 있는 남원의 부모님께도 데리고 갔다. 모든 것을 보여주고 본인이 결정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내고 난 후 아버님의 말씀 “며느리한테 밥 한 그릇도 못 얻어먹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씨가 되고 말았다. 며느리를 보기 위해서 남의 논을 선자로 지어서 벼를 수매해서 30만 원을 챙겨주셨던 아버지가 아닌가? 약혼하기로 날짜까지 잡아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사랑하는 어머니와 자식들을 뒤로하고 혼자서 하늘나라로 훌훌 떠나버리신 아버지.


그해 겨울, 아내와 나는 살림을 차렸다. 결혼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약혼식만 하고서였다. 아버지의 일년상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다는 나의 뜻을 따라 주었다. 집사람도 아버지를 여읜 지 오래되어 큰오빠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나 또한 아버님이 돌아가신 탓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혼자서 자취하였으니, 양쪽 어머님께서 살림을 차려주자고 하여 남노송동 굴다리 옆에 20만 원짜리 전세방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큰처남께서 농과 찬장을 사 주시고, 집사람의 언니가 간단한 살림살이를 사 주었다. 상은 향나무 탁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소꿉장난의 살림살이였다. 난방은 연탄불의 온돌이었고 밥도 해 먹어야 했다. 연탄을 아껴야 했다. 연탄 한 장 가지고 하루를 지내야 했다.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동생들의 학비며 집안의 모든 것을 챙겨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봉급을 가지고 우리 둘만 산다면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장남의 역할을 표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집사람은 2년째 발령이 나지 못했다. 중앙시장의 금속상회에서 점원으로 근무하면서 생활비도 보탰다. 이렇게 결혼 아닌 결혼생활은 이어갔다.




#8. 악마는 따라오는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1년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급히 남원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모시고 전주에서 내과로 유명하다는 이종현 내과에 입원시켰다. 옛날부터 가슴앓이가 있었기에 그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계속 더 아파져만 갔다. 15일 동안이나 입원하고 있었지만, 쾌차가 되지 않았다.


외숙과 상의해서 예수병원에서 X-Ray를 찍어보기로 했다. X-Ray의 소견서를 읽어 보았다. 암일 가능성이 높단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제 어머니마저 저세상으로 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눈앞이 깜깜할 뿐 택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전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를 이렇게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외숙, 이모, 동생과 나는 협의를 하였다. 외숙께서 바로 퇴원해서 광주 조선대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택시로 조선대 병원의 응급실로 갔다. 저녁 늦게 도착했다.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응급실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종합검진을 받았다. 결과는 암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바로 다음 날 수술하자고 했다.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리라고 했다. 수술하겠다고 했다. 그 대신 암이라고 여겨지면 절대로 수술하지 말고 봉합하고 그렇지 않으면 수술하기로 하고 서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어머니를 수술실로 모셔갔다. 수술은 시작되었고 외숙과 나는 기다렸다. 조선대학교 병원 둘레를 몇 바퀴 돌았는지 모른다. 왜 그리도 시간이 안 가는지 애가 타고 속이 탔다. 그때처럼 한 시간이 길다는 것을 느껴보지 못했다. 촌음이라는 것은 느끼기에 달라지는 것 같다. 두어 시간쯤 지나서 입원실을 거쳐 응급실로 달려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가 겁이 났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는 눈을 뜨고 계셨고, 마취에서 깨어나 있으셨다. 눈물을 흘리셨다. 어떠한 눈물이었을까? 다시 한세상을 산다는 기쁨의 눈물이었을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간에 염증이 있어 곧 터질 찰나였다고 했다. 하루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고 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어머니를 돌려주어서 한없이 고맙다고 진심 어린 기도를 했다. 부모님 모두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나면 내 어찌 살꼬.


고생만 하시던 부모님께 효도 한번 못하게 이승을 떠나게 한다면 내 어찌 하늘 아래 머리를 두르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렸다. 의사 선생님께서 퇴원하는 날 술과 담배는 절대 금물이라고 했다. 집에 와계신 어머니의 병세를 호전시키기 위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던 정준조 아버님께 화제를 부탁해서 화제를 받아 전주 보화당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 드렸다.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호전되어 갔다.


1975년 12월 21일은 살림을 시작한 날이다. 그날을 결혼기념일로 삼고 살아오고 있다. 작은 체구이지만 야무진 집사람이었다. 우리도 살림하면서 정착된 생활을 하였다. 집사람은 생활력이 대단했다. 꿈 많은 결혼생활이 꿈처럼 될 리가 없었다. 꿈과 현실은 맞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돈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간 수술이 있었기에 그랬다.


빚이 쌓여만 갔다. 이자는 월 3부이자다. 봉급을 받으면 이자도 주어야 하고 동생들 학비도 주어야 했다. 어디 그뿐이랴. 어머니의 기력을 회복시키는데 약 값도 들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1975년은 악마의 해였는가? 나에게는 그렇게 인식이 되었다.


나는 교사로 열심히 근무하면서도 발령받을 때부터 도청 기획실장 집에서 방학 때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도청 기획실장 신 아무개님의 관사에서였다. 초등학생 둘이 있었고, 큰아이는 4학년이고, 작은아이는 2학년이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과외비는 나의 한 달 치의 봉급보다 더 많이 받았다. 공부보다도 운동에 신경을 썼다. 공부보다는 여름엔 수영과 야구를 더 가르치기로 했다. 영리한 아이들이었기에 공부는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엔 스케이트 타기와 축구, 그리고 달리기도 가르쳤다.


그 기획실장이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2년 동안 방학 때면 그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생활에 보탬이 많이 되었다. 그때 귤을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보았다. 과일은 방학 때 이것저것 다 먹어 보았다.




#9. 전주팔복초등학교에서 전주남초등학교로

전주팔복초등학교에서 전주남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발령 받은지 2년 후 급지에 대한 순한 전보였다. 5학년의 담임을 맡았다. 업무는 평가 담당이었다. 그때는 매월 월말고사를 보았다. 시험을 보고 나면 90점 이상의 학생들에게는 시상했다. 통계 처리도 해서 학년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학급도 시상했다. 학생 수가 5,000명에 육박했다. 전주에서는 큰 학교에 속했다. 그리고, 수상 대장도 작성해야 했고 상장도 써야 했다. 정신이 없지만 야간대학에 다니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간은 금싸라기보다도 나에게는 소중했다.


그때 전주대학교가 노송동 굴다리에 있는 전셋집의 뒤였기에 다행이었다. 그 당시엔 왜 그리도 직원 아침 조회와 오후 종례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이 아무개 교장 선생님은 말을 시작하면 보통 40~50분은 아니 한 시간도 두 시간도 거뜬히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주제는 하나였다. 그런데 가지를 치기 시작한다. 그 가지에서 또 가지를 친다. 미쳐버린다. 대학의 강의는 7시에 시작한다. 오후 5시에 직원 종례가 시작되면 6시 30분 또는 7시 가까이 되어서야 매번 끝이 났다. 7시에 강의가 시작되었다. 정신없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도 늦었다. 한두 번이라면 이해하고 참는다. 성질이 급한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신참내기의 교사가 감히 그 시절에 교무실 문을 박차고 큰소리치면서 교실에서 가방을 들고나오면서 소리치기란 상상도 못 할 때였다.


거기까지면 좋았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도 육두문자와 왕년에 교장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법석이었다. 화장실 안에 교장 선생님이 앉아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교장 선생님의 자식보다 어린 교사한테 들을 소리 못 들을 소리 다 들었으니, 저녁에 잠을 제대로 자기나 하셨을까? 이튿날 출근하면서 명패를 뒤집는데 누가 그랬을까? 수근대는 소리가 들린다. 아! 이를 어쩌나. 어제는 너무 화가 나서 그랬지만 일이 터지고 말았구나.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교감 선생님께서 사실을 고백했다. 솔직하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교장실로 함께 들어갔다.


무조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변명이 필요 없다. 변명은 또 다른 화를 불러온다. 인자하신 교장 선생님은 용서하여 주셨다. 교장 선생님도 야간대학교의 강의 시간이 7시라는 것도, 많은 선생님이 다니고 있는 것도 모르고 계셨다. 자기가 너무 말을 많이 했다는 것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음부터는 여섯 시를 넘기지 않겠다고 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날부터 곧바로 정식 퇴근 시간인 6시면 끝났다. 얼마나 학교 가는데 부드러웠는지 몰랐다. 70여 분 되는 선생님들은 나를 영웅시 해주었다. 야간대학 다니시던 선생님들이 더 고마워했다. 정각 6시면 모든 선생님이 퇴근하게 되었으니 그랬다. 특히 여선생님들한테는 더 많은 대접을 받았다.


그렇지만 아이들 가르치고 업무 처리하는 데는 예전보다 더 열심히 했다. 악마는 항상 꼬리를 물고 다닌다더니 어머니는 병이 재발해서 전남 조선대학병원에 계속 다녔다. 요즘처럼 의료보험이 있었으면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터인데 돈 때문에 무척 힘이 들었다.


그 후 우리는 전 가족이 하나가 되어 빚 청산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갔다. 10만 원, 20만 원이 모이면 무조건 빚을 갚아나갔다. 10만 원이면 이자가 3천 원이다. 빚은 밥을 안 주어도 계속 커나갔다. 그러니 빚을 갚기 위해서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다.


임신한 집사람에게 변변한 임신복 한 벌 사 주지도 못하였는데 금속상회의 점원으로 계속 근무하게 한 나는 그에 대한 죄를 항상 업고 살아가고 있다. 이해하기 힘든 일도 이야기해 볼까? 일주일 내내 쌀 한 톨 없이도 살았다. 아침은 처형이 일부러 누룽지를 만들어 준 것으로 끓여서 먹고 점심은 학교에서 때우고, 저녁은 처남 집으로 가서 얻어먹고 또는 라면으로 저녁을 먹을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눈물이 펑펑 쏟아질 생활이었다.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몇 년이 흐른 후 사는 과정을 집사람이 작은 처남과 장모님 앞에서 말했을 때 함께 울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 작은 처남은 농사를 많이 짓고 있었다. 말만 하면 쌀 한 가마니는 넉넉히 줄 수도 있었지만, 자존심이 강한 집사람이나 나나 허락지 않았다.




#10. 아내의 발령

그러면서 1976년 11월 1일 자로 집사람이 남원 보절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졸업한 지 2년 6개월이 흐른 뒤였다. 큰처남이 나 대신 함께 갔다. 내가 갈 수도 있지만, 결근하기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처남이 데리고 가서 하숙집까지 정하고 왔었다.


배는 부르고 집은 전주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배불뚝이 아가씨가 첫 발령을 받아 갔으니 교장 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이 심란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임신복이라야 달랑 한 벌로 생활했다. 절약하느라 한 벌로 지냈으니 참으로 고맙고 고마운 여인이다. 불평 한마디 없이 참으면서 정식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생활하면서도 살아주는 여인이 아닌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집사람을 평생 업고 다녀도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다.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산기가 있어 전주 이모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초산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골반이 작아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 또 수술이 걱정이었다. 걱정도 했지만 우선 산모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기로 했다.


아침 7시에 수술하여 아들을 얻었다. 배에 칼을 대었으니 얼마나 아팠으랴. 잘 먹지도 잘 입지도 못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이는 잘 자라 세상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아들을 낳았다. 1976년 12월 21일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날이다.


살림을 시작한 날도 12월 21일, 큰아이가 태어난 날도 12월 21일이었으니, 우리에게는 특별한 날이었다. 동짓날이라 더욱더 기억에 새롭다. 나의 분신이자 우리 부부의 사랑의 열매가 아닌가. 수술로 태어난 아이는 젖이 거의 나오지 않는 어머니의 젖을 물고 배고파 울어 댔다. 젖을 찾으면서 울어대는 아이가 안타까웠다.


작은 체구와 수술의 후유증으로 젖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우유를 사서 젖을 대신해서 먹일 수밖에 없었다. 겨울방학 동안에 어머니의 품에서 자란 아이는 그때 몇 개월이 가장 행복한 부모와의 만남이었으리라. 개학하면 헤어져야 한다. 어머니 집으로 보내야 한다. 아이를 보아줄 식모를 둘 형편이 아니었다. 전세방에서 살면서 그렇게 넉넉한 삶을 꾸려갈 형편이 아니었다. 집사람은 하숙하면서 그해를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숙하고 있었지만 넉넉하지 못한 형편인지라 자취방을 구해서 자취를 시작했다. 시골에서 불도 때지 않고 천정에서는 쥐들이 전쟁놀이하듯 하는 시끄러운 시골집, 개구리 소리가 들리는 시골집에서 생활했던 그녀는 정녕 강인한 여성이었던가?




#11. 겹쳐오는 고난

아버지를 여윈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어머니의 간 수술을 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재입원을 반복했다. 밤낮없이 빛은 늘어가고, 설상가상으로 집사람도 수술로 아이를 낳고 했으니 5남 1녀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귀여운 아이까지 생겼으니, 나로서는 힘이 벅찼다. 그러나, 동생들이 형인 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 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더욱더 그랬다.


아니 악마의 화신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또다시 셋째 동생의 맹장염 수술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계속되는 어려움이 닥쳐오니 너무나 힘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부터 꼬박 1년 4개월 동안에 불운이 계속 닥쳐왔다.


주저앉아 한없이 울고 싶었다. 봉급이라야 4만 5천~5만 원인데, 나와 집사람, 그리고 동생들 학비며 아들놈 우윳값이며 힘이 들었음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집사람이 봉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힘에 부치는 삶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 단돈 얼마라도 모여지면 빚을 먼저 조금씩 청산했다. 둘째 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남원 택시 정비공으로 들어갔다. 중학교는 우리 형편에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동생이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동생은 중학교에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형편이 못되니 그 당시에 젊은 아이들이 가는 곳은 자동차 정비를 하는 일이었다. 한 달, 두 달, 그리고 1년이 가고 2년이 되어가니 빚도 어느 정도 청산이 되어갔다. 빚은 밥을 먹이지 않아도 불어나고 커나간다. 나의 야간대학의 학비도 내야 하지만 동생들의 학비도 주어야 했다.


집에서 쓰는 경비 등은 동생과 어머니가 한두 푼씩 벌어서 내기도 했다. 건축 현장의 미장공 일을 따라다니면서 기술을 배웠다. 우리 가족은 모두 정신을 다른 데 쓸 겨를이 없었다. 다시 조금 큰 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집사람은 남원 보절에서 자취를 했다. 그러다가 큰아이가 남원에 있으니, 남원의 오두막집에 가서 자기도 했다.


아이를 혼자 둘 때도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은 농사 일을 해야 하고 소도 키워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광경을 보는 집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선생이면서도 자식을 품에 안고 생활할 수 없는 그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한번은 기어다니는 아이가 혼자서 잠자다가 깨어나 울다가 기어서 방에서 마루로, 그리고 그 높은 마루에서 흙마루로 떨어져 날카로운 이빨 때문에 혀가 양쪽만 남고 가운데가 잘려 버린 사고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수술하련만 스스로 붙을 때까지 기다리니 어쩌겠는가? 참으로 우둔한 일이었다. 아이는 배고파 울기도 하겠지만 혀가 아프니 울다가 지쳐서 잠이든 모습을 날마다 보아야 하는 집사람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전주에서 남초등학교 근무하랴, 야간대학에 다니랴 하니, 그 모습을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그 고통을 알 수 없고 머릿속에 그리면서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래도 무심한 시간 속에 혀는 점점 붙어 갔다. 집안도 점점 눈에 보이지 않게 나아져 갔다.


그 지긋지긋한 액운도 물러가고 있었다. 집사람도 남원 보절초등학교에서 임실 둔기 초등학교로 옮겼다. 남원 보절 초등학교보다는 조금 가까워졌다. 나는 전주남초등학교에서 집사람은 임실 오수 둔기 초등학교에서, 아이는 남원 어머님 집에서 서로서로 다 헤어져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1978년 8월 중순 처음으로 전주에 있는 주택은행에서 50만 원의 적금을 찾았다. 집사람과 나에게는 최고로 큰돈이었다. 한참을 주택은행 앞에 서서 팔달로에 오고 가는 차와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이것이 씨앗 돈이 되게 하자고 둘이 함께 손잡고 맹세했다. 이 세상의 어느 돈보다도 가치 있는 돈이었다. 빚 청산하면서 처음으로 만지는 큰돈이었다.




#12. 서학동에서 단란했던 가정생활

집안 식구는 모두 하나가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아이를 업고 와서 월요일 아침 일찍 또는 일요일 저녁에 다시 업고 남원으로 갔다. 그때 동생들에게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해서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미안한 생각이 언제나 마음 한구석을 자리 잡고 있다. 셋째 동생에게도 그랬고 여동생에게도 그랬다. 그놈의 돈이 풍부했었더라면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돈이 원수였다. 저축도 해서 집을 사야 했으니 더욱더 그랬었다. 우리 형제들은 정에 약하다. 있으면 다 주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네 형제이다. 덧없는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다.


초임 발령받아서 모은 돈으로 사놓은 땅에 집도 지었고, 바로 밑의 동생도 결혼을 시켜주었다. 아버지께서 선자로 농사지어서 마련해준 돈으로 패물을 해주었던 금붙이로 제수씨의 패물을 해주었다.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 집사람인가?


물론 어머니와 동생들이 함께 살도록 했고, 제수씨도 결혼해서 잘 살아주고 있다. 남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니 거리도 멀 뿐만 아니라, 특히 집사람도 차 타기가 불편하여 남노송동에서 서학동으로 이사하기로 하고, 집을 서학동으로 옮겼다. 오수로 출퇴근하기에 그랬다. 집은 좁지만 깔끔한 방이었다. 요샛말로 이간장 머리방이었다. 그 당시 셋방으로는 큰방이었다. 그리고 부모도 없는 남초등학교 졸업생이 우리와 같이 살았다.


아이를 돌보아 주기로 하고 아이를 데려와 함께 살았다. 그러는 동안에 전주대학교 영문학과도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해에 전라북도 중등 영어 교사 임용시험에 응시했다. 야간대학에 다닌 목적은 공부도 공부이려니와 중등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내 인생에서 시험에 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내 아이와 같이, 집사람도 같이 살면서 사는 재미는 처음이었다. 1년 정도 가족이 함께 사는 시기였고, 집에 오면 아이 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키우고 있었다.


둘째가 1979에 태어났다. 둘째는 집사람의 건강 부족으로 죽어서 태어나 산소호흡으로 소생시켰다. 세 번째의 시도 끝에 이 세상의 아이가 될 수 있었으니, 명이 길었던지 소생 되었다. 머리와 가슴만 있고, 팔과 다리는 너무나 가늘어 있는 아이였다.


보기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울보였다. 울어대다가 지쳐 자곤 하였다. 낮에는 실컷 자고 밤에는 울어대니 우리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갔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 후로 나는 보는 사람마다 태내 건강을 강조했다. 태내 건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유를 먹으면서도 살은 찌지 않았지만 잘 커갔다. 지금도 잘 먹지만 빼빼로니다. 지금은 현대자동차의 생산직 근로자로 잘 다니고 있다. 물론 결혼하여 남매쌍둥이를 낳고 잘 살아가고 있다.


공부는 계속했다. 기어이 중등 영어 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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