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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찬 Apr 17. 2024

<5부> 전남에서 중등교사로

#1. 완도에서 중등교사를 시작하다

1978년 늦가을 무렵 전라남도에 영어 교사의 임용고시가 있었다. 당연히 응시했다. 이번엔 합격했다.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1979년 3월 12일 자로 전남 완도교육청으로 발령이 났다고 통지가 왔다.


그런데, 남초등학교에서 풍남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긴지 12일 밖에 되지 않았었다. 풍남초등학교에서는 5학년 담임이었다. 가야 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있었다. 자리를 옮기자마자 섬지방인 전남 완도로 발령이 났으니 당연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집사람과 여러 가능성을 두고 의논하였다. 완도로 가겠다고 했고 그렇게 결정이 났다.


완도교육청에 가서 섬으로 가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학교는 완도 여자중학교라고 했다. 3월 12일 완도교육청을 거쳐 완도 여자중학교에 부임하러 갔다. 완도는 광주에서 무려 4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정신이 아찔했다. 나는 유독 차만 타면 차멀미를 많이 하였다. 조금 멀리 가려면 멀미약을 미리 사 먹어야 했다. 멀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야 하는데 광주에서 강진까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였기 때문에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강진에서 완도 연륙교까지는 비포장도로였다. 완도교육청을 거쳐 완도 여자중학교를 물어서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 아무개 교장 선생님이셨다. 인자하신 교장 선생님이셨다.


아직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으니, 연가를 1주일 주시면 정리하고, 다음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겠다고 했다.

흔쾌히 승낙하셨다. 만약 안 된다고 했으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학교로 발령이 났지만, 토요일까지는 풍남초등학교에서 3월 17일까지 성실하게 근무했다. 내가 바로 사표를 내고 학교에 가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1주일간 누가 가르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랬다. 새로운 교사가 발령 날 때까지는 아이들에게 죄를 짓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사표는 3월 19일 자로 수리되었지만 완도 여자중학교엔 3월 12일 자 발령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1주일간은 내가 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담당 학년은 3학년이었다. 앞에 온 영어과 선생님 중에서 1학년은 여선생님, 2학년은 남선생님이었고, 나에게는 힘든 3학년이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고등학교 입시가 있는 때인데 더욱더 걱정되었다. 저학년으로 가겠다고 해도 초등에서 근무한 선생님은 인정한다고 하면서 한사코 3학년을 맡으라고 했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의 고집(?)과 권유였다. 담임도 3학년 2반을 맡았다. 월요일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운동장에서 인사 소개를 하니 여학생들 모두 환호성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남선생님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첫 시간에 영어 1과를 가르치기 전에 아이들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단어시험을 보았다. 영어 실력이 영 엉망이었다. 영어책 읽기를 시켰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50여 명의 반 학생 중에서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영어책을 읽지 못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3학년 4개 반 모두가 그랬다. 여학생이라도 매를 들기로 작심했다. 우리의 귀여운 자녀들을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지금 같으면 어린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지만 결심했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단어와 숙어의 암기가 필수적이다.


1과를 배우는 데는 2주가 걸린다. 연간 수업계획이 그렇게 짜여있었다. 나는 이제껏 수업을 소홀히 해온 적이 없었다. 젊다는 것이 무기가 아닌가. 교사는 사명감이 있어야 하고 열정적이어야 한다. 정열적으로 지난 5년간 초등학교에서 가르쳐 왔다. 비록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주경야독이었지만 죄를 짓는 교사는 되지 않기로 맹세했었다.


교육은 실패해서도 안 된다. 연습해서도 안 된다. 교육은 시기가 있다. 그 시간, 그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그만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여기 이 학생들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만 했다.


1과가 끝나는 날 단어와 숙어 시험을 20개 보기로 했다. 뜻에 맞는 단어를 쓰고, 단어에 맞는 뜻을 쓰고, 뜻에 맞는 숙어를 쓰고, 숙어에 맞는 뜻을 쓰고, 발음 기호를 보고 단어를 쓰는 시험을 하기로 했다. 한 개 틀리면 한 대씩 종아리를 맞기로 했다.


무식한 영어 수업을 하기로 하고 실천했다. 설마 하는 학생들에게 계속 강조했다. 단어시험을 보았다. 결과는 뻔했다. 모든 학생이 한 대에서 스무 대까지 맞았다. 치마를 입고 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여학생들이 집에 가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를 상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무모한 행동이었다. 가르쳐야 한다는 열정 때문에 그랬다.


그런데 어느 학부모님 한 분도 전화나 찾아오지 않고 믿고 따라 주었다. 요즈음은 생각하기도 힘이 들지만, 경찰서나 교육청에 불려 다님은 물론 사표뿐만 아니다. 치료비이며 보상비까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다음 날부터 학교가 온통 난리였다. 학생들 모두 손바닥에 영어단어와 숙어를 적거나 적은 쪽지로 온통 영어단어·숙어 공부에 열중이었다. 운동장조회, 체육 시간, 청소 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까지도 영어단어와 숙어를 외우는데 정신이 없었다. 좋지 않은 교육이었지만 효과 만점이었다.


같은 동료 교사들한테도 너무 영어만 강조하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였다. 여름이 되어 해변에 나가 수영도 같이했다. 물놀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해변으로 가서 학생들과 수영을 즐기기도 했다.


집에는 2주일에 한 번씩 왔다. 집에 오지 않을 때는 선생님들과 편을 이루어 삼봉 화투를 쳤었다. 그래야 시간이 갔었고, 선생님들과도 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남원으로 이사

그런 와중에서도 이사를 남원으로 했다. 집사람이 애들을 데리고 전주에 그대로 있겠다고 했다. 그런데 전주에 두는 것보다 여러 면에서 남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듯해서 남원 우리 집 부엌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이사 문제로 집사람과 다투다 집사람의 엄지손가락이 접히는 일이 있었고, 지금도 엄지손가락이 불편하다.


데리고 있던 아이가 헤어지면서 하는 말이 지금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선생님 나는 어떻게 해요?” 갈 데가 없는 아이를 떼어놓고 버스를 타고 남원으로 내려왔으니,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번 꼭 만나보고 싶다.


그 뒤 전주로 다시 이사 왔을 때 집사람이 그 아이를 찾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집사람이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껏 만나지도 못하고 있다. 건강하게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으면 한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 하면서 만남이 있었지만 왜 그 아이는 못 만나는가?


완도는 청정 바다였다. 토요일에 집에 올 때면 생선을 사서 가져오기도 했다. 이른 새벽에 시장에 가서 생선을 사다가 하숙집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가져오고는 했다. 아이들이 김도 가져다주었다. 그때는 김이 귀하던 때였다. 그래서 김을 어렵지 않게 먹게 되었다.


학생들과 친하게 되니 의사소통이 되었고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고, 나는 열심히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열심히 따라 주면서 공부했다. 연합고사가 다가오면서 학생들의 실력은 점차 향상되었다. 영어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도 잘하고 있었다.


3학년 4개 반이 버스를 세 대나 전세 내어 광주에 와서 연합고사를 보았다. 성적도 뛰어났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합격했다. 학교에서는 경사가 난 것처럼 축제 분위기였다. 그렇게 완도 여자중학교에서 1년의 시간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이 배려해 주어 불편 없이 근무했다. 월요일은 5교시부터, 토요일은 첫 시간만 하도록 시간표를 짜 주었다. 토요일 11시쯤 버스를 타고 남원으로 오곤 했다. 그곳은 집사람과 아이들, 그리고 어머님과 동생들이 있는 곳. 그곳은 가족 간에 작은 꿈과 사랑이 있는 곳이었다. 월요일은 아침 7시에 남원에서 광주를 거쳐 완도로 갔다.


하숙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부터 수업하였다. 그 당시 선생님들의 배려에 대해서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보고자 한다. 그러면서 도간 교류에 대한 엽서도 보내 보았다. 한 사람도 연락이 없었다.

또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또 3학년 담임이었고 영어도 3학년을 가르쳤다. 3, 4월의 완도는 바람이 유난히도 세었다. 겨울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 추운 겨울에 완도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미역을 채취하여 온다.


미역은 원래 갈색이다. 그 미역을 끓는 물이 있는 커다란 가마 속에 넣고 데쳐 낸다. 그것을 잎과 줄기로 선별한다. 아주머니들의 손놀림이 대단하다. 잎은 소금에 섞어서 상자에 넣어 일본에 수출한다. 그리고 줄기는 버렸다. 그 당시엔 이곳저곳에 미역 줄기가 쌓여 있었다. 미역 줄기를 요즈음은 좋은 반찬으로 요리하여 먹지만, 그 당시엔 그랬다. 김도 양식을 하는데 김 포장을 넣어 엮어진 발을 바다에 띄워 놓는다. 물이 빠지고, 햇볕을 쪼이고, 또 물이 들어오면 물속에 잠기고, 하면서 김은 자라는가 보다.


김이 완도에는 미역과 더불어서 풍부한 해산물이었다. 자연히 돈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많다 보니 그 당시에 완도에 있는 똥개도 천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듯이 돈이 많았다. 대부분의 완도 사람은 광주에 아파트든 집이든 한 채씩 갖고 있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광주로 학교를 보내고 있었다.


생활지도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나 잠깐 하여본다. 한번은 우리 반에서 수험료를 잃어버린 일이 발생하였다. 심각한 일이었다. 돈을 찾아야 하는데 잘못하다가는 한 학생의 일생이 달린 문제로 씻지 못할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머리를 써야 하는 문제였다.


종례 시간에 우리 반 학생들에게 눈을 감기고서 30여 분 동안 훈계를 하였다. 내가 실제로 돈을 훔쳤던 것처럼 실감이 나게 하였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구에게도 말도 못 하고 후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서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일찍 와서 내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놓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또 나에게도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하였다.


효과가 바로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책상 서랍 속에 돈이 있었다. 도벽은 여학생에게 치명적이다. 아무 말 없이 돌려주었고 더 이상 한마디도 거론한 적이 없었다. 그 후 그 여학생은 마산 한일실업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리고 고맙다는 편지도 했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일체 거론한 적은 없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행복을 빌어준다.


학생들의 생활지도는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다. 바르게 살아가는 올바른 인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 우리 선생님들이 해야 할 일이다. 생활지도는 어려운 것이다. 사랑으로 감싸주지 않으면 학생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생활지도는 어렵다고들 한다.


또다시 2년 차 3학년을 맡았다. 전년도 나의 가르치는 방법을 선배들에게서 들었던지라 나와 호흡이 잘 맞았고 잘 따라 주었다. 영어단어와 숙어는 거의 모든 학생이 외우고 있었다. 특별히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영어책도 잘 읽었다. 여학생들에게 인기보다는 혹독하리만큼 매를 들고 가르쳤다.


아이들이 더 잘 안다. 선생님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 감정에서 매를 드는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의 매 인지를 더 잘 알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담임 역할과 수업을 잘할 수 있었다.


추억거리도 많았다. 완도에서의 추억거리를 더듬어 본다. 바닷가에 사는 아이들이라 수영은 모두가 잘하였다. 나도 수영을 잘하였다. 한번은 완도에서 유명한 신지도 명사십리로 수영하러 가자고 난리였다. 남원집에 오지 않는 일요일을 택해서 갔다.


명사십리의 아름다운 백사장에 자리를 잡고, 튜브를 아이들이 나를 위해서 빌렸다. 육지에서 갔으니 당연히 수영 못할 것이라고 학생들이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수영을 못 한 채 하였다. 나에게 튜브를 움켜쥐게 하고는 깊은 물 속으로 자꾸만 들어갔다. 엄살도 피웠음은 물론이다. 깊은 곳에서 튜브를 뒤집고는 난리들이었다. 내가 헤엄칠 줄 모르는 줄 알고 그랬다. 나는 유유히 헤엄쳐 나오면서 물장난도 쳤다.


어디 그 뿐의 추억이랴. 완도 하면 정도리의 깻 돌밭이다. 신의 솜씨인가? 자연의 조화인가? 모든 돌이 크고 작고 간에 공처럼 둥글고 매끈매끈하고 단단했다. 오랜 세월 동안 바닷물의 파도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으리라. 얼마나 단단하면 돌을 집어 들어서 던지면, 공처럼 튀어 올랐을까? 통통통 소리를 내면서 튀었다.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냥 튀는 게 아니다. 높이 튀어 오르고 소리도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하루를 보내고는 했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수송선이며, 고깃배며, 낚싯배들이 보였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밀려오는 파도에 돌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인간이 그토록 아름답게 낼 수가 있을까 싶었다. 아이들은 바위에 붙어있는 굴을 돌로 깨뜨려 하얗고 조그마한 굴을 따다 내 입에 넣어주었다. 짭짤하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맛을 느끼면서 먹곤 하였다. 여학생들이라 정이 더 많았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해 질 녘에야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좋은 정도리의 깻 돌을 일본 사람이 사서 가져가려고 했단다. 만약 그때 그것을 팔아버렸다면 오늘날 아름다운 관광명소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에 오지 않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하숙집에서 나와 동료 선생님들이 밑동만 남은 동백나무를 캐서 분재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어린 반 푼어치도 없겠지만, 그때에는 베어가고 남아있는 밑동을 캐어 분재로 만들어 심어놓고 집에 올 때 가져오곤 하였다. 자연보호를 해야 하는데 그때엔 선생님들의 취미 활동이었다.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모든 식물은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재하면서 깨달았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어느 정도 성장하다가 사람이 싫어요. 자연이 좋아요. 하듯이 사람의 손길을 떠나버린다.


식물은 역시 자연 속에서의 이슬, 햇빛, 비바람 그리고 구름이 좋은가 보다. 식물이나 동물도 아니 인간도 자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몇몇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모두가 신규 발령받은 선생님들이었으니 젊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선생님들이 하숙을 하였다. 집에 가지 않을 때는 학교 숙직실로 모이자고 어느 한 선생님에게 연락하면 남선생님, 여선생님 할 것 없이 열 명 가까이 모인다.


팀을 구성한다. 남선생님과 여선생님 한 분씩이 짝을 이루어서 팀을 구성한다. 전라남도 특유의 삼봉 화투의 게임이 시작된다. 최대 여섯 팀이 시작할 수 있지만 게임은 최후에 두 팀만이 시작한다. 물론 점수를 정하고 1등과 2등을 제외한 팀은 등수별로 돈을 낸다. 공평한 게임이고 등수에 따라서 남·여 선생님 할 것 없이 공평하게 돈을 낸다.


가자! 시장으로! 모두 함께 간다. 낙지, 도미, 아나고 등의 회를 시킨다. 3만 원이면 그 당시엔 회를 맛있게 먹었다. 소갈비와 낙지를 넣어 끓여서도 먹었다. 갈낙탕(소갈비와 낙지를 넣어 끓이는 탕)은 지금도 그 맛이 침을 돋게 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도 잘 가고, 즐겁고도 인간성 관계도 돈독히 형성되었다. 재미있는 시간은 또 있었다. 윤선도의 유배지인 보길도의 탐방이었다. 토요일에 뜻이 맞는 남·여 선생님들이 함께했다. 젊은 선생님들과 보길도에 가기로 했다. 오전 11시쯤 1박 할 준비를 하고 보길도를 향해서 떠났다. 배는 하루에 한 번이다. 오전에 가고 오후에 오는 배였다. 목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배였다. 소안도에서 1박 하기로 하고 여장을 풀었다.


모두가 시장으로 나갔다. 생선이 싱싱하게 살아있었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세발낙지였다. 함박으로 그득하게 샀다. 여관으로 가져와서 소주에 곁들여서 초장에 찍어서 한 마리씩 모두 다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나는 살아있는 낙지를 먹어 본 경험이 없었다. 쳐다보고만 있으려니 침은 넘어가지요. 소주는 한잔해야 하지요. 망설이고 있는데 선생님 한 분이 머리를 잡고 쭉쭉 훑어내려서 초장에 찍어주었다. 거의 죽은 배나 다름없는 낙지와 소주 한잔은 그야말로 최고의 맛인 것을! 나는 그때부터는 쭉쭉 훑어 막 먹어댔다. 그 많았던 낙지도 다 먹어 버렸다.


저녁엔 또다시 회로 맛있게 회식하면서 섬에서 하루의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보길도로 건너갔다. 작은 배로 건넜다. 소안도에서 보길도는 그리 멀지 않았다. 작은 배로 20여 분 거리도 안 되었다. 윤선도 유적지는 과연 옛날 사람들이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부사시사’를 썼다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윤선도 유적지를 뒤로 한 채 산을 넘어 예송리의 해수욕장을 가기로 했다. 산을 넘으면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쪽빛 바다의 풍경과 크고 작은 섬들, 그 사이로 오고 가는 배들과 푸른 바다의 어우러짐을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예송리의 해수욕장에 다다랐다. 모래보다 큰 바둑알만 한 까맣게 생긴 돌들로 이루어진 해수욕장이었다. 해수욕복으로 갈아입고 남선생님이든 여선생님이든 물속에 뛰어들었다. 맑은 물에 몸을 담그는 즐거움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남해의 에메랄드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으니, 근심 걱정은 멀리 사라져 갔다. 또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은 곳이다.


오후 배를 타기 위해서 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도로 돌아오는 뱃전에 저녁노을이 바다에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뒤로 가는 섬과 앞에서 다가오는 섬들을 보면서 보길도 여행을 마쳤다. 한편의 추억 드라마로 가슴 깊숙이 남겨 두었다.




#3. 구례농업고등학교로

2년간의 완도 생활을 청산하고 남원에서 가까운 구례농업고등학교로 옮겼다. 2주마다 또는 1주마다 집에 오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집사람은 둔기초등학교에서 삼계초등학교로 옮겼다.


개구쟁이 큰 녀석과 삐쩍 마른 둘째 아이를 키우면서 추운 겨울에 냇가에 가서 기저귀를 빨아 놓기가 바쁘게 버스를 타러 가는 그녀는 과연 나에게는 큰 복이고 천사였다. 나에게 처복은 있었는가 보다. 따로 살아도 되는 것을 아이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 푼이라도 절약해서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했단다. 빨래하랴, 기저귀 채우랴, 우유 먹이랴, 옷을 갈아입히랴, 했으니 어디 아침밥인들 제대로 먹었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나는 그저 밥만 먹고 가면 되었는데. 그리고 조그마한 일에도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비록 내가 땅 사고 집을 지었다고 해도 동생이 중학교도 못 가고 고생만 했으니, 아버지의 유산이라야 얼마나 되었을까마는 모두 동생한테 주고 시내 죽항동으로 전세방을 얻어서 이사했다. 그러면서, 또 삼계초등학교에서 오수초등학교로 옮겼다. 그때 이 아무개 교장 선생님은 유별났다. 교장 선생님은 전 교직원이 편안하게 근무하게 해야 하고 학교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처리해야 하거늘 그 교장 선생님은……. 지금도 가끔 그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학교에 큰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지금처럼 어린이집도 없었으니 그랬다. 그러니 얼마나 교장 선생님의 눈치를 보면서 가슴을 졸였을까? 그 어려움을 여자라서 견뎌냈는가? 아니면 강인한 삶의 욕구 때문이었을까? 강한 모성애 때문이었을까? 하여튼 작은 체구이지만 강단이 있는 여자인 것은 분명하다.


오수에서 집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를 데려다 놓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지내게 했다. 조금은 편해지는가 싶어 안심이 들었다. 큰방 주인집 아이들과 다투는 일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나는 통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갔다. 오수보다는 구례가 더 멀었다. 1시간이나 걸리니 그랬다. 내가 더 챙기고 도와주어야 하는데 참으로 그런 면에서는 너무나도 소홀히 했다. 작은 체구이지만 강인한 여자여서 지금까지도 잘 버텨 주고 있으니 큰 복이다. 큰 병 앓지 않고, 병원에 한번 가지 않은 그녀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우리는 집을 하나 샀다. 동충동의 옛 KBS방송국이 있던 자리의 한옥이었다. 집사람도 터미널이 가까우니 다행이었다. 큰 아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옮기는 학교마다 고학년의 담임을 맡았으니, 학교생활에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농업고등학교라서 아이들이 영어나 수학은 아예 공부하지 않았다.


유난히도 땅이 많아서 농업과는 실습은 기본이다, 축산과는 소, 닭, 돼지를 키우는 축산실습이다, 실습해야 하니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아무개 교장 선생님은 또 지독하게 실과 선생님들만 선생님으로 취급하고 보통교과 선생님들은 유난히도 미워하던 교장 선생님이었다. 무엇으로 유명(?)하던 교장 선생님이었다.


닭 키우면 닭에서, 소 키워서 팔면 소에서, 돼지 키우면 돼지에서(?) 그러하니 농과 선생님들만 챙길 수밖에. 하지만 학생들은 아무리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이지만 그들 중에도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니, 영어 과목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에 네 줄만이라도 가르치고 배우겠다고 약속하였다.


단어와 숙어, 그리고, 문장을 외우게 했다. 이전까지 하지 않던 공부를 막상 3학년 때 하려니 힘이 들어 한 것은 물론이었다. 네 줄만이라도 외우지 못하면 매를 들었다. 어떻게든지 영어 공부를 시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죄짓는 교사가 된다. 죄짓는 교사는 영원히 그 학생들에게서 죄를 씻을 수가 없다. 할 때까지 해보자고 얼레고 달래서 이끌고 나아갔다. 나는 말을 물가에까지 끌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가르쳤다. 먹고 안 먹고는 학생들의 마음이지만 그랬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가면서 책을 읽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점차 생겨났다.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출퇴근하면서 가족과 함께 지내니 다행스러웠다. 그러는 동안에 셋째 동생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학에 가고 여동생도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고등학교에 갔다. 대학에도 진학했다. 여동생은 순천대학교 영어교육과였다. 지금은 서울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현재는 천안에서 살고 있다.


막내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도 졸업했다. 다들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바로 밑의 동생이 학비를 주기도 했지만, 큰돈은 내 차지였다. 가르쳐야 한다. 배워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동생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첫째 동생과 둘째 동생은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늘 가슴 아픈 일이다. 집에서 다니니 마음도 편안하고 집사람이 밥을 하여주니 좋았다. 도시락도 싸주었다. 나에게는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주면서 자기 도시락은 대강대강 싸서 가지고 갔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밥을 거의 조금밖에 먹지 않는다. 사치할 줄도 모른다. 좋은 화장품 하나도 쓰지 않는다. 참으로 알뜰살뜰한 사람이다.


빨리 자립 기반을 잡기 위해서 농협에 적금을 넣었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재미로 열심히 저축했다. 그렇지만 집은 동생들이 있으니 챙겨야 했다. 학비는 다 내 차지였다. 집에서 쓰는 돈은 동생이 노동일로 충당해 갔다. 건설공사장의 미장공이었다. 기술을 터득하며 가정을 꾸려가면서 힘을 보탰다. 바로 밑의 동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농업고등학교이기 때문에 보리 베기다, 모심기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작업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학교의 실습지에 있는 보리를 베기만 하면 좋으련만 농촌 일손 돕기라고 하여 구례읍 지역, 아니 면 지역까지 도시락을 싸서 들고 가서 보리 베기를 하였다.


보리 베기 한 품삯은 반절은 학급비로, 반절은 학교로 납부하였다. 뙤약볕 아래서 일하는 학생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였다. 보리 베기가 끝나면 모내기로 이어졌다. 모내기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논이 200마지기가 훨씬 넘었다. 그러니 모내기 철에는 거의 모심기다.


그때는 학교에서 국수로 점심을 준다. 시골 학생들이라 일을 잘하였다. 한번은 큰 사건이 터졌다. 보리 베기 할 때였다. 한 필지를 베기 시작하면 모두가 달려들어 보리 베기를 시작한다. 점점 베어가다 보면 나머지 면적이 좁아지고 점점 못하는 아이들부터 뒤로 빼어낸다.


그런데, 그런 학생 중에서 두 명이 그 날카로운 왜낫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사고가 발생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서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잘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손가락이 완전히 잘리지 않았고 살이 조금 붙어있었다. 구례의료원에서 접합수술을 했다. 부드러운 나무를 내리친 것처럼 된 손가락이어서 붙이고 꿰맸다.


교장 선생님은 그렇지 않아도 나를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차에 사고가 발생했으니 엄청나게 나에게 호통을 쳤고 그때 혼이 난 것은 말하여야 무엇하리! 교장 선생님이 보리 베기를 시키지 않았으면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일 것은 생각지 않고 혼내기만 했다.


도리어 걱정을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녁에 아이를 데리고 학생 집으로 갔다. 또 학부형으로부터 된통 당했다. 그것도 이해했다. 자식의 손가락이 잘렸으니 이해했다. 붙여진 손가락이 과연 구부려지고 신경이 살아날까 하면서 날마다 좌불안석이었다. 1주일이 지나도 새끼손가락에는 감각이 없다. 바늘로 찔러도 움직이질 않았다. 2주가 지나가고 3주째 되는 날 아픔을 느끼는 그 학생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4. 할머니 산소를 사초하다

우리 할머니는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할아버지한테 시집와서 사는 것 같지 않게 살다가 돌아가셨는가 보았다. 친정이 있는 구례군 광의면 구만리였다. 그래서 진 외갓집에서 조금 떨어진 온동(온수굴) 마을에 집을 지어주고, 논을 주었단다. 딸이 사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랬는가 보다.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에서 구례군 광의면 온동으로 이사를 하였으니, 할아버지는 열심히 농사지으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양반이라고 일도 안 하셨단다. 뭐 그리 양반이 대단하다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그랬는가 보다. 몇 년을 살면서 고모님을 낳았고, 할머니는 그 산후 후유증으로 아프시다가 돌아가셨단다.


돌아가시자 할머니의 친정집 선산에 모셔졌고, 오늘날까지도 할머니의 유택은 그곳에 있다. 구례농업고등학교 근무하면서 매년 두어 번씩 가서 성묘도 하였지만, 산소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작아져 땅과 거의 흡사할 정도로 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유택이라고 보기엔 너무 초라하였다.


구례농업고등학교에 근무한 덕으로 할머니 산소를 사초 하기로 하고 진 외갓집(할머니 친정집)에도 연락했다. 1983년 4월 한식날을 사초를 하는 날로 잡았다. 집안 간에도 연락하고 한식날 사초를 시작하였다. 잡초와 잡목도 제거하고 봉분도 그럴듯하게 만들어 산소다운 산소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매년 설과 추석 때는 꼭 찾아본다. 아버님께서는 살아생전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할머니 산소는 옮기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유택은 명당자리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고 있다. 커다란 독사처럼 생긴 바위 뒤에 자리하고 있다. 영락없이 독사 머리다.


지금은 할머니 유택 바로 옆에 집이 한 채 들어서 있다. 갈 때마다 조그마한 선물은 사서 가지고 간다. 할머니께서 심심치 않게 옆에다 집을 지어서 살고 있으니 고맙다고 꼭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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