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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순심 Sep 30. 2021

'오징어 게임'에 참여의 불평등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드라마를 장애인 시선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첫 게임을 시작으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등 총 6개의 게임이 나온다. 게임을 뒤로 가면 갈수록 여자, 노인들은 게임에 참여할 기회들이 줄어든다. 약자는 함께 할 수 없음을 이 드라마에서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채가 많아서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이다. 456명이라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 한 이 게임에는 탈북자, 노인, 외국인 노동자, 사기꾼 등 다양한 직업, 국적, 연령대가 나온다. 이렇게 많은 인원과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주지만 ‘장애인’ 은 등장하지 않았다. 이병헌이 ‘게임 참여는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임 참여 자체가 불리한 장애인은 처음부터 기회의 평등에서부터 배제되었다. ‘기능이 상실한 장애인이 문제일까?’, ‘장애인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불리하게 만든 게임 자체가 문제일까?’ 내가 보기에는 후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자를 위한 게임을 만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장애인시설에서 근무한다. 우리 또한 연중행사로 운동회를 한다. 보행이 불편한 장애인은 장애인대로  인지가 부족한 장애인은 그 장애인의 특성에 맞게 게임 준비를 한다. 이것이 공평한 게임이다.


 비단 이 드라마에서만 장애인이 제외되었을까? 현실의 곳곳에서 배제당하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드라마에서처럼 노인, 여자 등 약자와 게임을 함께 하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사회는 장애인을 참여하는 것을 꺼려한다. 설령 함께 하더라도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게 아니라면 언제든지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패가 되기도 하다. 


 노인의 정체는 결말에 나오다시피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다. 오징어 게임의 호스트였다.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징어 게임의 주최자인 동시에 일인자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노인의 참가 번호가 1번의 의미가 일인자를 뜻하지 않았을까?. 출발 조건이 다른 불공정한 구조에서 장애인은 경쟁 사회에서 일인자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 해야 할까? 마치 보행이 자유로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똑같은 구조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 장애인은 출발 선상이 불공정한 구조에서도 갑절의 노력으로 임용고시를 보았다. 합격은 했으나 교단에 설 수 없었다. 시합에서 이기더라도 상이 반드시 주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사회 곳곳은 장애인을 배제한 구조들이 곳곳에 있다. 예를 들어 사지가 뒤틀리고 불수 운동으로 인해 몸이 계속 움직이는 아픈 장애인은 돈이 있어도 MIR를 찍을 수 없다. 우리는 전자동 혈압계 혈압 측정기를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흔들리는 몸을 가진 장애인은 이용할 수 없다. 병원 관계자에게 수동으로 혈압 측정을 따로 부탁해야 한다. 그냥 부탁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 특성을 일일이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장애를 가진 것이 잘못한 일도 아닌데, 마치 빚쟁이가 채무자에게 시간을 더 달라는 매달리는 느낌이 다. ‘왜 장애인이 일일이 양해를 구해야 하는 구조일까? 누구나 사용 가능한 혈압 측정기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구조가 아닐까 싶다. 


 얼마 전 나는 자유시간이 생겨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기 위해 무인 스터디 카페를 이용하였다. 나는 일정한 사용료를 내고도 그곳에서 제공하는 음료를 먹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거긴 키오스크로만 이용하여 음료를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나같이 손이 떨리는 뇌병변 장애인은 이용할 수가 없었다. 장애범주가 뇌병변 장애인만 이곳에 해당될까? 인지 능력 부족으로 기계를 다루지 못하는 발달장애인은 점원이 있어야 한다. 점자 표시가 되지 있지 않다면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다. 만약 문턱이나 계단이 있다면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 또한 이용할 수 없는 구조다. 다양한 장애 범주를 가진 장애인들은 무인 카페는 있어도 이용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이다. 사회구조는 불공정하게 돌아가는 것은 책임을 약자에게 떠넘기고 있다. 외국의 사례는 장애인의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기보다는 사회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혹여 비장애인은 중 누군가가 ‘왜 우리가 많은 투자를 해서 고쳐야 하는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런 자에게 질문을 해 보겠다. ‘만약 당신이 시설을 이용함에 있어서 불편함이 있더라도 참을 것인가?’ 왜 늘 약자에게만 참기를 강요하는가? 이것 또한 폭력이다. 우리는 흡연자에게 금연을 권하거나 흡연구역 설치비를 따로 요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치된 사회 구조물을 이용하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금연구역이 설치되는 것처럼 편의시설이 똑같이 제공되어야 한다. 


 결국 사회가, 시스템을 운영하는 리더가 해야 할 일은 소수자, 약자 등 모든 사람이 기회에서 배제당하지 않고, 출발선이 같아야 한다. 그러한 고민들을 하며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사회에서 게임을 평등하게 할 수 있다.


 이정재는 다시 오징어 게임 참가하려는 모습으로 결말이 끝난다. 나는 시즌 2가 나온다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오징어 게임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미지 출처: 오징어 게임 드라마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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