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다음 숫자는 뭐였을까?
♤ 후회 2
나는 부산에 산다.
잊지 못할 1991년 8월 4일.
나는 대전행 기차에
친구들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몸을 실었다.
속이 너무너무 안 좋았다.
3시간 전.
집 떠나는 아들을
조용히 안아주시는 엄마.
타지에서도 늘 건강하라는
안부인사와 함께 조용히 눈물짓는
누나들의 배웅을 받고 집을 나서
부산역을 향했다.
역 광장에서 친구들을 만나
열차시간도 좀 남았고
허기도 채울 겸
근처 중국집으로 향했고,
당분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곁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과
낯선 곳에서 더 낯선 생활을 해야 한다는 슬픔을 글라스로 달래기 시작했다.
마치 소주가 물 같은 날이었다.
그러나 금방 알 수 있었다.
소주가 준 건 위로를 가장한
비웃음이었다는 걸.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했던가.
낮술은 사람도 멍멍이로 만들었다.
짧은 시간에 주량의 몇 배가 넘는 소주를 글라스로 들이부은 나는,
부산역 광장 분수대가 전용 풀장인 마냥
화려한 개헤엄을 시연했고,
친구들은 말릴 생각 없다는 듯 웃으며
그 웃픈 광경을 지켜만 보았다.
(친구들아~ 구경하니 재밌더냐??)
참고로 난 지금도,
술매너 좋기로 유명한데 그날의
만취 퍼포먼스가 내 음주 이력에
유일한 오점으로 남아 있다.
우여곡절 끝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친구들과 기차를 탔고, 나는
화장실을 독채로 쓰다시피 하며
대전역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하룻밤 묵을 방을
대충 구하고 숙취로 힘들었지만
멀리까지 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와준 친구들이 고마워서 이런저런
얘기들로 긴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다음 날
친구들의 악수, 포옹과 함께
어제의 요란함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로 낯선 첫발을 내디뎠다.
그곳은 바로 육군 논산훈련소였다.
훈련소 이야기는
나만 재밌는 얘기니까 생략하고,
모든 훈련이 끝나면 주특기를 받고
자대에 배치되거나
주특기에 대한 교육을 받으러
후방기 교육을 가게 된다.
주특기는 세 자리 숫자로 알고 있다.
100 = 일명 땅개라 불리는 일반병사
311 = 통신교환병
이렇게.
근데, 내가 받은 주특기는 07이었다.
그땐 그게 뭔지도 몰랐다.
퇴소식 후 가족들과의 짧은 만남이
끝나면 배치가 시작된다.
난 기차에 넣어졌고 한참이 지나
서울 용산역에 던져졌다.
잠시의 대기후,
다시 춘천행 열차에 실려졌고
강원도 102보충대라는
임시 보관소로 보내졌다.
논산에서 강원도로 보내진다는 건
한 마디로 꼬인 군번이란 얘기다.
그곳에서 며칠 대기하다 드디어
꿈에도 가기 싫던 자대로 배치되기 위해
집차를 타게 된다.
1시간쯤 달려 강원도 홍천
자대에 도착했고,
부관하사의 면담 후,
실제 생활할 부대로 배치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나의 서류를 보던 부관하사가
고개를 가웃거리며
" 근데 넌 왜 주특기가 두 자리야?
07이 도대체 뭐야?"
'배치 담당 부관하사인 니도 모르는 걸
내가 우찌 아노???'
눈만 멀뚱멀뚱 거리는 나.
"이상하네. 이걸 어떻게 하지.
통신대대에 한 명 필요하다 했으니
일단 한 번 물어봐야겠군."
부관하사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진격! 통신대대장님~ 부관하삽니다.
주특기가 이상한 놈이 하나 왔는데
보내드릴까요?"
" 네? 출신지요? 부산입니다
그런데 출신지는 왜.."
"아~ 교환병이 필요하시군요.
사투리 많이 쓰냐고요? 잠깐만요"
"야~ 너 사투리 많이 써?"
순간 나는,
일반보병 보다 교환병이 편할 거란 걸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군기 바짝 든 목소리로
"아닙니다. 밸로(별로) 안 씁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속으로 외치고 말았다.
'앗. 망했다. 밸로가 뭐꼬'
부관하사는 빵 터지며
" 대대장님~ 사투리 '밸로' 안 쓴다는데요 ㅋㅋ"
이젠 글렀다 생각하는 순간
"그래도 일단 보내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진격!"
그렇게 나만 공감하는, 아무도 관심 없는 파란만장한 자대 군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금부터가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내가 군생활한 곳. 강원도 홍천.
지금은 다양한 교통수단으로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그 당시는
부산에서 홍천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면회 오시겠다는 부모님을 매번,
그 먼 길을 어떻게 오시냐고
한사코 말렸고, 그 방어는
제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가족이 면회 와서
외박 나가는 동기들을 부러워하며
'오지 마라 한다고 진짜 안 오시냐?
주워온 자식인가??'
뒤끝 작열하면서
'그냥 오시라고 할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한번 오시라 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에 피식 웃어본다.
물론 섭섭한 마음은 1도 없다.
아들이 군대를 갔다.
36사단 신병교육대의 방탄 제이홉 조교가 있던 소대에서 훈련을 받고
지금은 파주 25사단에서 복무 중이다.
아들도 부산에서 파주가 어디냐며
우리에게 면회 오지마라고 한다.
그래도 나는 한 번은 간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근데 말이다.
맞벌이하는 엄마 아빠가 주말을 이용해
면회 갈려고 어렵게 날을 잡으면
그 전후로 꼭 휴가를 온다.
요즘 군대는 무슨 휴가가 그렇게 많은지...
그들에게는 모자라겠지만.
몇 번의 무산에도
불굴의 의지를 꺽지 않은 아빠는
제대 50여 일 남겨두고,
역시나, 날 잡은 주말을 앞두고
휴가 왔다 간, 아들 면회 미션을 완수한다.
지금 생각해도
면회 안 와도 된다는 아들의 말이
그때 내가 그랬듯이 진심일 거라 믿는다.
휴가, 외박, 외출이 더 많은 아들은 더더욱.
왕복 1,000Km가 훌쩍 넘는
접경지를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왔고
참 잘했다고 느낀다.
아들보다는 나를 위해서 말이다.
말씀은 안 하셔도 면회 못 간 것이
마음에 후회로 남겨졌을지 모를
나의 부모님들도,
이젠 마음이 편해지셨을 것이다.
90년 넘는 세월이
그 기억마저 가져갔으니...
기억이 지워진 덕분에,
어쩌면 그 시절의 아쉬움도
잊으셨는지 모르겠다.
본가에 자주 들러야겠다.
가신 후, 후회하지 않게.
후회는 해서 보다 못 해서, 안 해서
남는 게 아닐까?
최소한 나의 삶에선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