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폴리 아 되 후기
시작하기에 앞서, 어쩔 수 없이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기 원치 않으신다면 여기서 뒤로 가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아래의 내용을 소비하기로 결심하셨다면, 그저 한 사람의 주관적인 의견이니 부디 가볍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영화에 대한 다양한 소통은 환영입니다:)
최근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봐야겠다는 의무감도 없다가 문득 <조커: 폴리 아 되>에 대한 평이 심하게 갈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전작에 비해 형편없다는 의견도 있어서, 돈이 아깝다고 말하는 것도 봤다. 진짜 그 정도인가? 싶은 생각에 (이런 쪽에는 또 관심이 마구 생긴다) 즉흥적으로 당일 예약을 하고 부지런히 영화관을 찾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커'라는 영화는 여전히 인상 깊게 다가온다. 대중의 혹평을 예상했으려나 모르겠지만 이러한 영화, 넓게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낸 토드 필립스라는 감독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이번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찾으려 노력했던 (내 스스로의) 모습도 꽤 마음에 들었다(?). 또 의문으로 남은 점들도 있었다. 아무튼, 영화를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이하 아서)은 전작에서부터 수많은 표현을 해왔다. 아니, 오히려 표현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남들과는 다른 이유로 어떠한 맥락 없이 뜬금없는 웃음이 터지는가 하면, 내면의 '조커'를 끄집어 내야했던 다양한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편에서 주목했던 것은 아서 주변 사람들의 표현들이었다.
그중 아서의 변호사가 표현했던 방식이 먼저 눈에 띄었다. 영화에서 아서에 의해 해임되기까지 변호사는 아서를 위해 다양한 조언을 해준다. '아서, 당신은 조커가 아니에요', '당신은 있는 그대로 아서임을 증명하면 됩니다' 등의 말을 건넨다. 어떻게 보면 그를 진정시키며 정신병동에서 벗어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시도였을 수 있다. 하지만 이때 변호사의 어조나 분위기는 그리 친절하고 따뜻하지만은 않다. 단지 변호사라는 그녀의 직업을 성실히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걸까? 아니면 아서에게 언제든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일까? 과연 아서가 그녀의 표현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궁금해진다.
한편, 영화 관람객에게는 의문이었던 점도 있다. '왜 하필 뮤지컬 방식을 차용한 것일까?' 이 물음을 영화가 끝나기까지 지울 수 없었다. 리 퀸젤(레이디 가가, 이하 리)이 처음 등장했던 순간은 병동 사람들이 합창을 하던 장면이었다. 이후에도 아서와 리는 시도때도 없이 노래를 부른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아서가 리에게 '노래는 그만, 말을 해줘'라고까지 한다. 이 부분은 아래 두 번째 관점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다만, '영화적 표현'의 관점에서 더 살펴보자.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뮤지컬'은 노래과 춤, 연기 등이 종합된 예술이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과장되게 '표현'하며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그런 점에서 아서의 일대기를 바라본다. 전작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금융가 사람들을 향해 처음 총구를 겨눈 뒤, 그러니까 내면의 '조커'가 깨어났을 때 그는 거울 앞에서 마치 뮤지컬 무대인 것처럼 춤을 춘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기괴하기까지 한 그의 표현 방법이다. 또한 아서의 상상과 현실 어느 곳에서든 '무대 연출'이 돋보인다. 슬로우 모션으로 춤을 추며 내려오는 유명한 바로 그 '계단 씬'도 그중 하나다.
전작에서는 '춤'을 주된 표현 방법으로 선택했다면, 이번 편에서는 아서의 삶 그 자체를 '노래'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서가 본인의 내면에 대한 복잡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리가 아서 옆에서 '조커'를 꺼내려는 수단이 바로 '노래'였던 것이다. 여기서 관객들의 물음표가 시작되었을 수 있겠다. 전작의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면 이어서 '라라랜드'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마저도 흥미로웠던 게, 대부분의 트랙이 익숙한 멜로디지만 반주는 장엄함과 우울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강력한 관악기로 구성했다는 점이었다)
영화 처음부터 간수의 휘파람을 통해, 그리고 끝까지 아서의 주변 인물들이 외치던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아서를, 정확하게는 조커를 극중의 어두운 사회에 나타난 '성자'로 인식하며 추앙한다. 그러면서 본인들도 그(아서)와 함께 걸어가겠노라고 말한다.
O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 오 성인들이 행진할 때
O Lord I want to be in that number / 주여, 나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나이다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 성인들이 행진해 들어갈 때
<조커: 폴리 아 되>는 전체적으로 쓸쓸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위해 색감이 바래진 듯한 영상미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중간마다 다채로운 색을 사용하기도 했다. 가령, 아서가 변호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간수 4명이 우산을 펼치는데, 이때 우산의 색이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주황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서는 희미하게 초록색을 띄는 듯하다. 이 장면에서 전편의 조커 복장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아서에게는 가끔 '조커'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 안팎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면, 전작과의 차이도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고 이번 편 자체로도 흥미롭게 소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에서 다룬 '표현'에 대한 관점과 함께, 이번 편 역시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함과 관계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아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조커'인지, 보잘 것 없다고 느끼는 아서 그 자체인지. 그 고민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먼저 주변 인물들에 의해 존재에 대한 의심과 확신을 넘나드는 아서가 있다. 아서는 모두가 알다시피 스스로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것은 비단 불우한 어린 시절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이번 영화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아서'인지 '조커'인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리는 조커를 추종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아서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가 '조커'가 되길 유혹한다. 리는 영화의 초반부터 끝까지 '조커'를 좋아했던 사람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나는 조커를 좋아해요."라는 말과 함께 임신 사실까지 알린 리는 면회장 유리에 빨간 립스틱으로 조커의 입을 그려 넣는다. 아서는 본인의 존재 자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확신을 주는 리 앞에 홀린듯 자세를 고쳐잡는다. 그러면서 웃는 모습에 빨간 립스틱이 겹쳐지며 조커의 모습을 그려낸다. 조커로서의 존재가 확립되는 순간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웃이었던 소피 듀몬드의 증언은 아서를 사람들의 놀림거리로 만들었다. 전편의 조커 사건에 대해, 아서의 어머니가 사실은 아서를 이상하게 여겼다는 것 등을 말하며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커와 아서를 원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서의 입장은 어땠을까. 어쩌면 아서가 아닌 '조커'로 살아가는 것이 맞다고 확신하지는 않았을까.
그와 동시에 아서는 '조커'가 진짜 자신의 존재를 대변하는지 수차례 의심한다. 다시 말해, 아서는 조커라는 건 그저 사회가 만든 가면일뿐, 아서 플렉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한다. 법정에서 그의 사적인 이야기들이 담긴 노트가 공개되거나, 기억하기도 싫은 어릴적 학대를 다른 사람들에 의해 꺼내어지면서 아서의 '존재'에 대한 감정은 흔들린다. 이어서 전 직장 동료였던 개리 퍼들스가 법정 증인으로 나타나며 진심 어린 호소를 했던 것이 아서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너(아서)만 나를 비웃지 않고 제대로 대해줬는데, 지금은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지 않아. 조커가 내 앞에 있는 것 같아. 무서워"
결국 아서는 조커이길 포기한다. "조커는 없다(There is no Joker)"고 말하면서 배심원단 앞에 앉아 6명을 살해한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때, 리를 포함한 조커를 추종하던 법정 안 사람들은 차가운 눈으로 아서를 바라보며 떠난다. 그들에게 광적인 '존재'였던 조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법정공방이 마무리되며 아서의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만을 앞둔 가운데, 갑작스러운 폭발에 사람들이 쓰러진다. 아서 역시 정신을 못차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때 맞은 편에 조커 분장을 한 사람이 '진짜 조커다'라며 차에 태운다. "불바다로 만들어야지"라는 추종자의 말에 기겁하며 차에서 내려 도망치는 아서였다. 조커 추종자로부터 쫓기는 아서. 어쩌면 조커를 떨쳐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을지 모른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는 그 유명한 계단 중턱에 리가 앉아있다. 아서는 리에게 말한다. 이제 자유롭게 되었고 나와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리는 마지막까지 노래로 대답하며 아서의 말에 들은 체하지도 않는다. 아서는 아서로 남게 되었지만 리는 아서를 끝까지 조커로 바라보았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연출이다. 이 장면에서도 아서 플렉이란 사람에게 '존재 의식'은 여전히 쓸쓸하고 차가운 칼날임이 드러난다.
결국 경찰에게 잡혀 다시 병동으로 돌아온 뒤 누군가 면회를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서는 복도를 지나는데, 한 수감자가 와서 자신의 농담을 들어달라 부탁한다. 짧은 것이라면 해도 좋다는 아서 앞에서 수감자는 '조커'와 '아서'를 암시하는 듯한 농담을 하며 "죽어도 싼 놈이 되는 거야"라는 말과 함께 흉기로 아서의 배를 무차별적으로 찌른다.
마지막 연출까지 압권이었다. 포커스는 쓰러지는 아서에게 맞춰져 있지만 관객들의 시선은 희미하게 보이는 사이코패스의 웃음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면서 수감자는 흉기로 본인의 입 양쪽을 찢는데, 또 다른 조커의 탄생을 의미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조커라는 존재를 부정했지만 결국 사회의 광기와 혼돈이 되어버린 조커가 아서 플렉의 존재를 삼켜버린 것. 그런 점에서 '폴리 아 되(공유정신병적 장애)'라는 부제는 조커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특히 리)의 존재 혹은 관계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 안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표현 방식'과 '영화를 표현하는 방식' 모두 인상 깊었던 <조커: 폴리 아 되>였다. 또한 개인의 존재 의식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반대로 한 개인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존재로 각인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SNS의 발달로 '개인의 표현', '개인과 관계'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사건과 사고가 발생하고 있는 요즘과도 연결지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영화 한편을 보고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마침 최근 조승연 작가의 롱블랙 인터뷰에서도 이와 관련한 내용이 나왔다. 지식의 위계는 없고, 깊이만 있을 뿐이라고. 웹툰을 보든, 다큐멘터리를 보든 본인이 거기서 발견하고자 하는 내용을 지치지 않고 계속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런 점에서도 이번 <조커: 폴리 아 되>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영화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