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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인 Sep 04. 2021

N잡, 그 무엇도 되지 않을 자유.

대체로 나는 '무엇'이되려할때 나를 잃곤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퇴사 이후에도 많이 들었던 질문이지만 출간을 준비하는 요즘 특히 자주 듣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맥락상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와 ‘앞으로 무엇이 되겠냐'는 것. 이야기의 흐름으로 볼 때 질문이 전자를 향하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하는 것'으로 답할 수 있겠지만, 후자라면 대답은 "글쎄요"다.  


'글쎄요'라고 답할 때는 일종의 현기증을 느낀다. 모호한 내 대답이 질문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대답은 ‘글쎄요'라는 바운더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대체로 나는 '무엇'이 되려 할 때 나를 잃곤 했다.  


- 화가가 되어야겠다.

- 아니야, 작곡을 해야겠어. 

- 아니야, 방송국 PD가 되어야겠어.

- 아니야,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즐겼다. A가 된 나를 상상해보기도 하고, B가 된 나를 상상해보기도 하면서 그 역할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도 했다. 스스로 무엇이 '되어야지'라고 정하고 나면 뭔가가 정해진 데에서 오는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영감이 넘쳐나는 아이였고, 영감을 주체할 수 없어 급했고, 생각한 것을 행동에 옮겨야만 직성이 풀렸으므로. 어떤 방향이 정해지면 그저 목표를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을 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나중에는 왜 그것이 되려 했는지 잊게 될 정도로 원하는 것과는 멀어져 있었고, 결국에는 잃어버린 나를 되찾기 위해 그 길을 접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런 연유로, 어느 시점부터 '되기'에 대한 질문이 즐겁지 않게 되었다. 지금 나에게 뭔가가 '된다'는 것은 많은 시행착오와 도전정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뭔가가 '되고 싶다'는 욕구 역시도 단순히 발화된 동기인지 검증이 필요했다. 

만약,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일종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1.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이 꼭 '되기'로 이어져야 하는가.

2. '무엇'이 되고 나면 거기에 따라오는 삶에도 기꺼이 동의하는가.


나이가 많을수록, 현재 딸린 책임이나 역할이 많을수록 여기에 대한 답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다행히 현재의 나는 가볍다. 하지만 이 대답을 생각하다간 여정을 떠나기도 전에 지쳐버릴지도 몰라서 무엇이 '되겠다'는 열망은 잠시 넣어둔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와서. 누군가 앞으로 무엇이  예정이냐고 묻는다면 '내 머릿속 심사위원이 던진 답을 생각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작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유투버, 블로거 = 'N 잡러'가 될 예정이에요."라고 말하는 편의를 택할 수도 있겠다. 내 이야기를 사뭇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요.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해볼까 싶기도 합니다."

"그림도 그리고요. 그림책도 내보고 싶습니다.” 

“저는 인문/이공계/예술 교집합의 어느 지점에 있는 사람이에요. 이걸 가지고 뭐라도 해볼 생각인데 정해진 것 없고 결국은 원래 하던(UX) 것에서 찾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한 마디로 정확히 뭘 하겠다는 건지 설명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이런 나의 말에  이렇게 말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꼭 뭔가를 정할 필요는 없죠. 갈수록 경계가 없어지는 세상인데.”  

“뭐든 시도를 한다는 게 중요하죠.” 


그들에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느슨해 보이는 그 말들이 '내 머릿속 심사위원'이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가지가 확실해졌다. 


1. 목표는 가지되, 무엇인가가 '되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강박일지도 모른다.)

2. 뭐가 되기로 결심하든,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치열하게 달리진 않겠다는 것.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3. 나다운 방식으로 여러 가지 '되기'를 시도해보고, 그 시도 자체를 즐기자는 것. 


한번뿐인 인생, 즐거워야 하지 않겠는가.

 

(*일러스트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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