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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Apr 07. 2024

안녕, 영혼의 디아스포라








오늘로써 완전히 이사를 완료했다. 자취집에 남겨두었던 뫼비우스의 띠 큐빅 조명까지 가져옴으로써 남김없이 모든 물건을 가져왔다. 더 이상 부동산 아줌마나 집주인 아저씨나 지하실 반장 형님이나 차기 세입자 분으로부터도 연락이 올 일이 없고, 설령 연락이 온다고 해도 내가 답할 의무 같은 것은 이제 완전히 전소되었다.


나는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집에서 신발의 먼지를 떨고 나오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렸다. 어른의 세계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돈과 계산과 이익의 세계가 날 쫓아오지 못하게 전속력으로 달려 나오고 싶었다.


그것은 팍팍함의 세계였다. 자꾸만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세계였고, 안전함을 보장해 주지 않는 세계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남남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이웃이나 포용을 기대했는데, 어른들은 ​어느 정도의 위선과 이중성을 갖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남남이구나, 남남이구나 혼잣말을 되뇌여야 했다.


남남의 세계에서는 나도 신발의 먼지를 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직 전입 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하는 수 없이 오늘, 여전히 이전에 살던 구의 주민인 것처럼 사전 투표를 하긴 했지만. 나는 정말이지 사전 투표조차 이전에 머물던 구의 주민으로서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칼콤하게 떨어져 버리고 싶었다.




혹자는 현관 밖의 차가운 공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와 수용에 관한 한 눈이 하늘 끝에 가 있는 사람이고, 따라서 타락한 남남의 세계의 현실을 디폴트로 상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보일러를 세게 틀어도 어딘지 으스스했다. 한 여름에도, 벚꽃이 피는 봄에도 뼈마디까지 시리고 추웠다.

  

나는 소년이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 가슴속에만 살아 있을 뿐 나는 남에게 남일뿐인 김남일일뿐이었다. 김남일의 세계는 삭막했다. 남인 남(타인인 어른 남자, 강해져야만 하고 타인은 의심부터 하고 봐야만 하는 정글의 성인 남자)으로써 살아가는 삶은 서럽고 고됐다.


아직 남아있는 문제들이 너무 많지만, 이주민처럼 모든 짐을 싸고 이고 마침내 나의 작은 방에 들어왔을 때. 시야에서 비늘 한 꺼풀이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던 어떤 한 시름이 사라지는 듯 했다. 그것이 비늘인지도 모른 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백내장 환자처럼 지낸 것이다.


몇 달간의 해외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던 때나 이 년 여의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던 때도 이런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의 안도감은 그때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깜깜하고 절망적인 이년 여의 시간을 보냈고, 그 생의 첫 자취집은 모든 것을 홀로 견뎠던 공간이었다.


원래의 '집'은 완전히 상반된 곳이었다.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가 다 녹아 있는 곳이었다. 남의 감각이 녹아 사라졌다. 봄처럼. 어느 정도는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으며, 어느 정도는 지구에 착륙한 것 같기도 했다. 중력이 없는 우주를 떠돌다 중력이 나를 꽉 붙들고 있는 땅에 발을 디딘 것 같았다.


언제나, 영원히 내 집인 곳에 다시 돌아와, 물리적으로 이주를 완료했다는 것은 서러움과 불안이 더 이상 밀고 들어오지 못할 곳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을 뜻했다. 생에 필수적이고 근원적인 최소한의 조건은 붙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굳이 이스라엘을 예로 들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이스라엘을 이해하게 됐다. 이스라엘이 정착 원주민을 내쫓고 나라를 다시 건국한 역사에 대한 정치적, 신학적 가치 판단이나, 시오니즘에 대한 비판이나 현재도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공격적이고 반인륜적인 핍박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써 자기 고향, 집,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려는 어떤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구구절절 구석구석 다 이해했다. 누구에게나 집이, 교회가, 자기를 완전히 사랑해 주는 한 사람이, 아무도 그걸 못 해줄 때 해줄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무튼 나는 착륙했다. 비로소 내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졌다. 나는 다시 깨끗해질 것이다. 빨래를 자주 해도 된다. 마음은 어딘지 자신있어졌고 옷은 빳빳해질 것이다. 이제 머리와 수염을 편하게 기를 수 있는, 기르고 싶은, 그래도 적어도 스스로 노숙자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법한 어떤 공간과 시간의 질감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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