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눌루 하나라도 먹어
선풍기를 틀아놓고 빙빙 돌며 sns만 뒤져보고 있었다. 그러다 화장실을 가고, 다시 옥탑방에 돌아와 방바닥에 앉아서 sns 글들을 스크롤 다운하며 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누워서 보려고 할 때, 자정이 넘어 갔던 편의점에서 사온 까눌레 젤리가 생각났다. 그때 엄마가 말했다. 까눌루 하나라도 먹어.
나와 늘 함께 있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엄마의 목소리였는지, 나의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마음은 틀림없이 엄마의 것이었다. 나는 여느때처럼 먹고 싶지 않았고, 먹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늘 먹는 것을 귀찮아 했고 엄마는 늘 멕이고 싶어 했다. 지금은 더욱 무기력하고 귀찮아져서 또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고 누우려고 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까눌루. 까눌레가 아니고. 캐리카. 캐리어가 아니고. 엄마였다. 늘 먹이고 싶어하는 엄마. 먹는 것도 귀찮으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느냐고 하던 엄마.
까눌루 하나를 입에 넣고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는 이 순간을 동결시키려 글을 쓰는데 눈물이 관자놀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언제 멈출지도 모르는 눈물이. 도무지 멈출줄 모르는 뜨거움이. 이런 사랑이라면, 됐다. 다 됐다. 다 됐다는 생각을 했다. 영원한 안도감이었다.
나는 이게 신학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신학은 멕이고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래야만 했고, 그 창살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 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중학교 삼학년 때 선생님이 칠판에 분필로 그리던 해브 빈 피피+아이앤지로, 안에 빗금이 쳐진 단단한 벽돌의 네모 모양 시제처럼. 이렇게 뜨거운 가슴을 맞대어 사랑받은 사람이 그 문드러지는 사랑의 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건 운명적이었다.
완전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사랑은 그런 식으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부둥켜 안아 언 맘을 녹이고 새 힘을 주는 것이었다. 어떤 어둠과 죄도, 두려움도 다 이길 수 있는 것. 구원이었다. 감히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사랑이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몸소 알 수 있었다.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는 ’야다‘(히브리어로 알다)적 체험으로 체화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사랑은 신학 공부로써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만 정말 알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소와 몸소의 전승으로. 그렇게만 전파될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선포하고 구원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복음은 하나님이 선포하시고, 나머지는 내가 사랑으로 채우며 책임지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최강야구의 김성근 감독을 넋을 놓고 보곤 했다. 그에게서는 엄격함과 고지식함, 그리고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정감이 동시에 느껴졌는데. 그것은 엄마와, 엄마가 이따끔 말한 외할아버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난 그 사랑에 중독되었고, 취해 헤어나올 수 없었고, 그것이 나 자신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미 나는 그것이었다.
그렇게 용기있게 살아야 할 것만 같은데. 아득한 신앙과 신학의 선후배와 동료로부터, 아직도 희마하게나마 끊기지 않는 응원과 기대를 받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나는 여전히 주목 받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사랑을 먹고 꽬꼬닥 죽어버려도 좋겠다는 생각만으로, 또 아무래도 좋겠다는 막장의 생각만으로, 또 사무치는 그리움만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무언가의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하면서. 그대로 멈춰서서 정지해 있다. 매일 조금씩 녹는 얼음 동상이 되어 그 자리에 멈춰서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생아처럼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있다.
은하수처럼 눈부신 수많은 까눌루들 때문에. 이렇게눈이 매운 날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