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기억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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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지나다 어떤 곳은 나의 시선을 한참 멈추게 한다. 장소가 마음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찾은 지 한참 오랜 시간이 지난 어떤 곳을 마음속으로 떠올려 보거나 직접 그곳에 가보았을 때와 같은 때 자신의 마음을 더듬어 보는 일이, 이즈음 나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 되어 간다. 그때 내 마음은 어땠지. 나는 뭐였지. 누구였지.
내가 자고 일어나는 곳과 지척에 있는 이 서점을 마지막으로 들어간 지 이십 년도 더 지난 것 같다. 서점 건물 입구에서 친구 J와 한 명문대를 들어갔다는 J의 친구를 만났다. J는 늘 예쁘고 밝았다. 새로운 친구도 하나의 새로운 세계 같았다. 무심한 채 했지만 나는 너무나 상기되고 설레 가슴이 벌렁일 만큼 떨리기까지 했다. 계절이든 마음이든 어느 하나는 봄이었을 거다. 스무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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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한 순간. 이 지하 서점의 한 구석에 있던 서가에서 삶의 첫 일본어 사전을 샀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자리가 어디쯤이었는지, 그때 자신이 어떻게, 얼만큼, 어떤 느낌으로 심장이 뛰었는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차가웠던 몸에 열이 돈다.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저린다. 그날도, 그 순간도 봄날이었다.
자동 유리문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몸을 돌려 일고여덟 걸음쯤 걸으면 맞닥뜨리게 되는, 왼쪽 벽면에 붙어있던 서가를 무심코 지나다 나는 책등이 참지 못할 만큼 예쁜 일어 사전을 보고 충동적으로 뽑아들었다. 그 작고 앙증맞은 사전을 손에 쥐어 들며, 넓은 세계에 대한 가능성과 지식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부푼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살아있던 무수한 날들 중 자꾸 매만져 보고 싶은 어떤 날이나, 공간, 물건, 영화, 음악이 있다. 하필이라고 부사어를 붙이게 되는, 하필 그런 날 그런 순간, 그런 곳이 있다. 쉬리, 캐롤 키드의 웬 아이 드림, 그때는 그런 의미일 줄 몰랐던, 하필 그 서점에서의 순간들. 그것들이 뭉뚱그려지고 뒤섞여 날카로운 시간의 흔적으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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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소를 보면, 나는 그곳으로 간다. 그 시간으로, 그때의 나로.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갔던, 긴 인생의 찰나와 같던 순간이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순간이 되고, 수십 년 뒤에도 이 생의 한복판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전율이 되어 줄 줄 몰랐다. 계절을 느끼게 하는 것들 중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감각 기관이 될 줄 몰랐다. 영혼에 꼭 붙어 있는 콩팥처럼, 봄처럼, 봄이 오면 피는 벚꽃처럼, 계절과 함께 찾아오는 생의 각성 같은 것이 되어 줄 줄 몰랐다. 너무나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럽게 지나간, 갓 스무살이 되던 날들 언저리의 찰나의 시간들이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이 될 수 있을 줄, 내 영혼에 아로새겨지는 기억이 될 줄은 꿈결에도 눈치 채지 못했다.
시간의 그러한 감각을 느낄 때면, 팔레트 위에 북북 짜여 있던 총천연색의 수성 물감이 일시에 내 얼굴로 던져져 오는 것 같다. 시간의 천연덕스러움과 냉정함, 모든 순간이 시간을 초월해 관통된 하나의 점처럼 느껴지는 듯한 감각. 그것은 신비롭고 두려운 감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시간에 대한 그런 인식과 감각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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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마치 시간 속에 숨어 있는 것만 같다. 아니라면 시간이 마치 신인 것처럼 느껴진다. 작은 내 앞에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하나님이, 시간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시간으로서 내 앞에 우뚝 서는 것이다.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크고 차갑고 신비로운 감각이다.
그런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때면 신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나를 모든 어리석음에서 구원해 달라고. 시간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응시하고, 내 삶을 살게 해달라고. 당신의 분별과 지혜로, 옷칠처럼 새까만 암흑에 눈 먼 내가 내 삶을 살게 해달라고. 살려달라고. 살게 해달라고. 남은 생에서 내 소명을 향해 가만하고 잠잠하게 다다가게 해달라고. 헤아릴 수 없는 지랄맞은 시간들 속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거대한 존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철부지처럼 간절히 매달리게 된다.
스무살, 눈부심. J의 밝음과 생기. 한없이 모범생 같았던 J의친구. 일본어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