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과제

by 사브다

제 머릿속에는 극장이 하나 있습니다. 제 머릿속 극장이라 관객은 단 한 명. 저뿐입니다. 그래서 출연배우 섭외 및 결정, 또한 극을 시작하게도 멈출 수도 있게 하는 모든 결정 권한이 저에게 있습니다. 세상에 딱 하나 있는 요즘 말로~ 헐 대박~ 극장입니다.


자자, 요고요고 요물이 언제 제 머릿속에 공사를 했냐면요, 초등학교 때 친절한 선생님의 숙제로 시를 썼을 그때였습니다. 시를 쓰려 수많은 단어들을 머릿속 공간에 둥둥 띄웠더니만, 극장 요정이 있는지, 뭔가 빛이 번쩍 하더니 눈이 시원하면서 극장이 보이더랍니다.


요 극장에 불이 항상 들어오는 것은 아니고요, 이야기가 귀를 타고 머릿속 통로를 따라 들어와, 들어오다 보면 항상 켜져 있습니다. 글의 이야기든 말의 이야기든 상관없이 이야기가 시작되면 켜집니다. 극이 한창일 때에는 실제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듯 착시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쉿! 이 이야기는 비밀입니다. 정신적으로 마치 문제가 있는 듯한 발언이라 약간의 조심을 기하고~~~ 흠흠.


극장에 오른 배우들이 참 많았습니다. 뭐 지금까지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바로 전까지도 배우들이 한참 연기를 했으니… 제가 성장하면서 만나게 된 수많은 배우들. 그들을 한 줄로 배열한다면, 저라는 사람을 어쩌면 배열된 그곳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그중 그래도 단연 소개하고 싶은 배우는 반 고흐입니다. 위인전기에서 만난 고흐는 유년의 제 극장의 휘장을 단번에 찢어버린, 대단한 배우였습니다.


작디작아, 어느 누구도 맞지 않을 것만 같은 투명한 유리구두를 떨어뜨리며 기다란 계단 아래를 뛰던 신데렐라, 장미덩굴이 수북한 방 그 한가운데 유리관에 깊이 잠든 백설공주, 오만했던 개구리 왕자, 이름도 기억이 없지만 그녀가 입에서 뱉어낸 빛나는 금화와 그녀를 괴롭혔던 이복동생 여자 입에서 나왔던 더러운 두꺼비들, 매부리코에 하얗고 기다란 수염에 초록 옷을 입은 난쟁이 요정이 무지개 끝자락에 숨겨두었던 금화, 수많은 방 중 비밀하고 은밀한 방을 가졌던 공포의 푸른 수염,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했던 빨간 구두, 고집스런 코쟁이 피노키오, 동아줄에 매달린 불쌍한 두 남매, 꽃신에 중독되어 본성 잃은 원숭이, 피터팬과 동급 꿈을 찍었던 사진사, 커닝 왕에서 스스로 학습법을 터득한 이름 없는 소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유년기의 배우들이 찬란한 연기를 펼쳤던 그 무대가 어느 한여름밤에 찢어졌습니다.


노란빛 무대 위, 고흐는 낡고 낡아 신을 수 없을 지경이 된 신발을 신고 감자 먹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애처롭게 설교를 하고 또 했습니다. 동생 테오에게 그림을 그리겠다는 노란 편지를 띄웠고, 태양빛 충만한 남불에서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태양빛과 뜨끈한 바람 따라 춤을 추듯 솟구쳐 오르는 사이프러스 나무들. 프로방스 특유의 동글동글 흐느끼는 올리브 나무들, 수많은 꽃들 사람들…


타히티의 뜨거운 바람 따라 들어온 강렬한 붉은빛의 고갱.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빈의자. 그위 편지 한 장과 타오르는 촛불 하나. 깊어진 노란색 땅과 남빛 깊은 파란색 하늘- 그위를 오고 가는 테오에게 향하는 수많은 편지들. 붕대 감은 고흐의 자화상들.


생에 남아 있는 모든 에너지는 불타오르듯 짧고 강렬한 터치가 되고,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자연의 색과 마음의 색이 절대적으로 만나며 캔버스 안으로, 안으로 - 해진 노란색 옷을 입은 고흐가 탕! 탕!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많은 실패와 그리움. 인정받지 못한 갈망. 선한 끝이 있다는 결론도 없는 어느 목사 아들의 죽음.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색이 마음의 색과 교우된 흔적을 남기며, 끝내 해결하지 못한 생의 문제와 자기의 문제가 그 언덕- 까마귀 떼가 쓰윽 날아가버린 그 언덕 위에서… 저와 만나고 있었습니다.


무대를 빛냈던 노란색은 매화꽃잎으로 화하여 온통 머릿속을 떠돌았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또 흐르며, 또 흘렀습니다. 한 번을 만난 적이 없지만, 무대 위에 오른 저의 배우를 저는 알았고, 그래서 그의 죽음을 그 한여름밤에 애도했습니다. 끝이 있는 결론, 권선징악의 교훈, 선과 악, 언제고 어디서도 나타나는 왕자님들이 있던 유년기 무대의 휘장이 찢어졌고, 그 후로 성인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언덕에서 만났던 그 고흐를 마음에서 떠나보내 줬습니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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