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항 표류기

상상도 못했던,

by 이충멍

서울 청담동의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과천, 잠원, 평촌, 월계, 구의, 중림.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며 컸지만 모두 서울 안, 끽해봐야 서울에서 한 시간 이내의 수도권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취업을 했다. 내 사주에 역마살이 있어 멀리 떠나야 잘산다고 했다. 간혹 외국의 대도시로 긴여행이나 인턴활동을 떠날때마다 재미로 본 사주 생각이 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깐이었고... 내 고향, 내가 살곳은 서울이라 생각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남자와 결혼을 했다. 오래 사귄, 그래서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저렇게 대답할지 가늠이 되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가늠이 되는 사람. 회사에서 가까운 조그만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나이는 먹었어도 철없던 시절이라 자녀계획은 뒷전이고 놀기 바빴으나, 나중에 아이를 낳아서 키우려면 엄마인 내 회사가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을 안한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말은. 내 인생에서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갈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단 말이다. 대기업에서 꽤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있었고, 오래 일하려고 대학원도 졸업했고, 맨날 들어도 알수가 없는 미지의 뭔가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인 남편이 어딘가로 취업을 하기야 하겠지만 그건 그의 인생이지 내 인생이라고 생각은 안해봤으니까.


내가 결혼이란걸 너무 몰랐던 거지.


여느 때 처럼 퇴근 후 티비를 켜놓고 신혼집 쇼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쭈뼛쭈뼛 물엇는지, 당당하게 물엇는지, 넌지시 물엇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나에게 물었다.


"연구원 포항센터 공고났던데. 지원해볼까?"


그 연구원... 남편이 염두에 두던 곳이다. 사실 별 생각 없었다. 결혼이라는게 아이 낳기전까지만해도 별거 없지 않은가. 니 인생은 니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 두인생이 각자 살다가 한집으로 돌아오는 것. 왜 물어보나 싶었다. 물론 남편이 포항에 내려간다면, 늘 저녁에 맥주마시면서 하루 고된일과도 나눌수 없고, 같이 드라마보면서 낄낄거릴수도 없겠지만. 들어가고싶던 곳에 자리가 났는데 그런 소소한게 중요하랴. 네가 가고싶으면 써야지. 서른해가 넘도록 네가 노력하고 꿈꿔온 너의 인생에 이제 막 몇년 배우자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 의견을 낼수가 있겠나.


나는 몰랐다. 그가 묻는 말에 그의 포항으로의 이주 뿐 아니라 나의 이주 가능성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가 그 연구소에 입사가 확정되고 주말부부를 2년이상 하면서도 몰랐다. 내가 투덜투덜하면서도 신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포항에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아니. 그럴 확률이 아주 높다는 것을.


주말부부를 하던 중 쌍둥이를 갖고 배부른채로 주 5일을 홀로 살면서도 나는 힘든줄도 몰랐다. 쌍둥이라 37주를 만삭으로 보고 유도분만일을 잡아놓고 31주까지 회사를 다녔다. 부서가 통합되고 브랜드 하나가 없어지고, 다시 새 브랜드를 런칭하고 하는 그 즈음이라 온통 회사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출산휴가 가기전에 부서 발령을 받아놓고 갈수 있을지. 내가 계속하던업무를 하게 될수 있을지. 사람들이 무더기로 퇴사하던때라 누가 어디를 갔나 이런 일들에 관심 갖느라 외로울 틈이 없었다. 조금의 틈이 생기면 사람들이 메꿔주었다. 회사 사람들과 사이도 썩 좋았고 함께자란 오래된 친구들도 많아서 배부른 몸으로 홀로 주 5일을 집, 회사, 집, 회사 하면서도 힘들고 외롭지 않았다. 워낙에 긍정적인 성격이라 임신 초기에는 언제 안정기오나, 안정기되면 성별은 뭘까, 성별이 확정되면 제발 딸은 나닮고 아들은 아빠닮아라... 뭐 그렇게 매순간의 생각할 거리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런 거리들이 다 떨어지고 나자 쌍둥이들이 태어났다.


모든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육아휴직이 끝나는 날까지 절대 생각해본적 없고, 하고싶지도 않았던 퇴사를 하고. 포항으로 내려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를 낳자(그것도 한번에 둘이나!)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던 것들이 갑자기 바뀌었다. 직장은 잘 다니고있는지, 일은 할만한지, 회사는 잘되고있는지를 궁금해 하던 가족들은 그래서 언제까지 직장을 다닐건지, 애는 어쩔건지, 정말 일을 할 생각인지를 물었다. 결혼 할때만 해도 여자도 사회생활을 해야한다며 '회사에서 너를 필요로하지 않는 날까지 붙어있어라'던 아버지부터가 말이 바뀌었다.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쌍팔년도 고릿적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나더러 '너는 뭐든 될수있다며 하고싶은거 다하라'던 가족들이 갑자기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걸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묘해졌다. 원하는 바는 알겠으나 씩씩하게 내 갈길 가고싶어지는 반항심이 태어나 처음으로 들었다.


남편은 내가 그 길을 못 갈걸 아는 눈치였다. 그런 기백이 없는걸 오랜 교제기간을 통해 알고 있었던 거지. 그러면서도 여우처럼 팔짱끼고 서서 '난 니가 하고싶은데로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네가 일을 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줄로 믿었다. 결국 실패하고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쌍으로 욕먹고 끝났지만.


포항으로 내려오는 고속도로에서 그런 생각을했다. 내 커리어를 아작낸 배우자님한테 평생 큰소리 탕탕치면서 살아야지. 그리고 꼭 성공해서 보란듯이 서울로 돌아가리라.


예상대로 포항엔 내가 좋아하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상업적인 문구와 예쁜 물건들이 가득한 몰, 세상에서 가족다음으로 중요한 친구, 내 인생 전부인줄 알았던 직장. 공업도시인 포항에서 브랜드 매니지먼트를 하던 내가 할수있는 일은 없었다. 근처 대구의 공공기관 공채에 몇번 면접을 봤지만. 포항에서 대구출퇴근은 쉽지 않은일이었고. 결국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라곤 내 아들, 내 딸, 남편밖에 없는 이곳에서,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되었다.


시작은 그랬다. 100% 타의.


내려와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 이유 중에 나를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남편, 아이들, 가족. 그리고 또 가족. 꽤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왔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거지. 나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기에는 이미 생활의 안정을 찾아버린 삼십대였다. 그러나 어떠하리. 이미 뒤돌아보니 물살들은 나를 거칠게 떠밀고 있었고, 내가 평안하게 쉬던 섬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걸. 나는 얼른 눈앞의 나무조각을 얼른 잡아 채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또다른 안정의 섬을 찾아야만 하는 것을.


이 기록은 나무조각에서 또다른 미지의 섬에 도달하기 위한 나의 고군분투기다. 어쩌면 이미 도착한 미지의 섬을 내 섬으로 꾸미고 있는 기록 일지도. 아니면, 이 글 자체가 미지의 섬을 평안의 섬으로 만드는 그 행위일수도. 그리하여 결국엔 긍정적인 내가 어떻게든 재미있게 살아나가고야 마는 그런 이야기 일지도. 마음이 힘들 때마다, 혹은 기쁠 때마다, 털어놀 사람 없는 이곳에 풀어놓는 이 기록들이 뒤돌아 봤을 때 내가 재미있게 새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이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