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에 대한 고찰
나는 ‘감각이 좋다’라는 말을 분야를 막론하여 사용되는 가장 큰 칭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중 내가 속해있는 디자이너라는 직군에서는 특히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디자인에 대한 부분에서 '감각'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고민했다.
'감각'이라는 단어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생각하는 의미가 다를 수 있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인 만큼 추상적인 부분들을 체계화하고 실체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모든사람이 정확하게 내가 정리한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나는 감각을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분류했다.
WHAT-'무엇'이 좋은지 아는 단계
WHY-'왜' 좋은지 아는 단계
HOW-'어떻게 해야' 좋은지 아는 단계
WHAT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아는 능력은 어떤 분야든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가장 힘든 이유는 무엇이 좋고 나쁜지 모르기 때문(감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첫 번째 단계에서 '타고난 감각'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조형미에 대해 타고난 감각이 있는 사람은 어떤 형태가 조형적으로 뛰어난지 '그냥'알 수 있다(정말 '그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반면 조형미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사람은 비율, 색감, 형태 등 조형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 없이 그냥 아는 것' 이것이 '타고난 감각'이다.
이 단계의 디자이너들은 (주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무엇'이 좋은 래퍼런스인지 고를 수 있다. 좋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 감각의 시작이다. 이 단계는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도 감각이 타고나다면 할 수 있다. 당신이 경력 있는 디자이너지만 무엇이 좋은 래퍼런스인지 고를 수 없다면 디자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WHY
왜 좋은지 안다는 것은 무엇의 어떤 부분이 좋은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단계는 보통 타고난 감각으로는 하기 힘들며 훈련을 통해 할 수 있다. 타고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WHAT단계를 쉽게 해냈다면 노력으로 WHAT단계를 통과한 사람들은 이 단계를 비교적 쉽게 해낼 수 있다.
타고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은 좋은 것을 정말 '그냥' 알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지만 노력으로 좋은 것을 골라낼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이미 훈련을 통해 어떤 것이 왜 좋은지 알아내야 했기 때문에 조금 더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이 단계의 디자이너들은 WHAT 단계에서 고른 좋은 래퍼런스들이 ‘왜’ 좋은 래퍼런스인지 설명할 수 있다.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어떤 부분들이 좋은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WHAT단계보다 감각이 조금 더 깊어진다.
HOW
어떻게 해야 좋은지 안다는 것은 '디벨롭'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디벨롭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전 단계들과는 차원이 다른 단계이다. 이 단계의 가장 큰 과제이자 묘미는 끝없이 성장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나는 감각을 수식하는 말들 중 '날카로운'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날카로운 감각은 정확히 목표를 찌를 수 있다. 이전 단계들이 칼을 '만드는' 단계였다면 이 단계는 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날카롭게 '갈아내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WHAT단계에서 유리했던 타고난 감각은 무의미하다. 누가 더 민감하고 집요하게 발전시키는지가 핵심이다. 더 민감한 감각을 가진 사람일수록 디테일한 디벨롭이 가능하고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이 단계의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KNOW HOW)’ 사람들이다. 주니어부터 시니어까지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한 감각은 모두 다르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감각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아는 단계이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는 것과 그것으로 정확한 목표를 찌르는 감각은 또 다른 감각이다. 감각은 날카로워질수록 더 세분화되고 더 다양해진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기계는 부품도 단순해서 쉽게 만들 수 있지만 복잡해질수록 부품들이 세밀해지고 대체가 힘들어지듯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세밀한 부품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대체가 어려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감각을 다듬을수록 추상적인 것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되고 흐릿한 목표들을 선명하게 만들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조형적으로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감각이었다면 발전된 감각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게 되고 결국에는 '사람들이 가치를 지불하고 사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선호하는, 좋아하는 이런 단어들은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어서 감각이 부족한 사람에겐 흐릿하게 보이지만 감각이 날카로운 사람은 보다 선명하게 목표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가 감각이 좋아지기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WHAT-WHY-HOW 이 세 단계를 반복하면 된다. 많은 래퍼런스를 보고 무엇(WHAT)이 좋은 것인지 골라내고 고른 래퍼런스들이 왜(WHY) 좋은지 고민하고 그것들을 어떻게(HOW) 만드는지 생각하여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이다. 어떤 래퍼런스를 똑같이 다시 만들어보면 그것에 대해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래퍼런스에 대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더 디테일하게 다루겠다).
감각은 목표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각이 좋은 사람은 목표로 가는 길을 잘 아는 것이고 감각이 없는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목표에 가려고 하는 것이다.
감각은 각자에게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이 글을 읽고 '아 감각이 이런 거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이 사람의 감각은 이런 형태구나 내 감각은 어떤 형태일까?'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감각의 형태를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