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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Sep 01. 2022

온몸으로 듣기

"긴수염고래는 20헤르츠의 소리를 아주 크게 낸다. 20헤르츠는 피아노가 내는 가장 낮은 옥타브의 소리에 해당한다. 바닷속에서 이렇게 낮은 주파수의 소리는 거의 흡수되지 않는다. 미국 생물학자 오저 페인의 계산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가장 먼 두 지점에 떨어져 있더라도 두마리의 고래가 상대방의 소리를 알아듣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고래는 자기들 역사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지구적 규모의 통신망을 구축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광대무변의 심해에서 1만 5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고래들은 사랑의 노래로 서로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고래들은 아무 매개 없이 동시성 속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다. 동일한 소리의 장안에 갇혀 있기에, 그들은 교신 대상을 선택할 수 없으며 침묵 속으로 물러날 수도 없다. 다른말로 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청각적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언제나 상대방을 침범할 수 있고, 또 상대방에 의해 침범될 수 있음을 뜻한다." 김현경 - 사람, 장소, 환대 


연구를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간혹 연구 현장에서 차별적인 표현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섣부른 말 뒤의 의도를 대번에 알았다. 연구현장에서 만난 아버지와 동년배인 남성은 평소 나의 일하는 방식을 두고 '닌자'같다고 칭찬했다. 조용한 성격에 가끔 중요한 자료를 가져와 깜짝 놀라게 한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은데, 아마 내가 동양인이 아니라면 저런 식으로 칭찬하지 않았겠지. 그의 다소 어수룩한 칭찬에 나는 되려 웃었다. 


반면에 가족들이나 오랜 친구들의 혐오표현이나 차별적인 말들에 나를 당황했다. 어떻게 이것을 바로 잡을지 생각하다가 갈피를 못 잡고 집에 오는 내내 자괴감에 빠졌다. 나는 왜 내 주변 사람들에게만 엄격한 청자인지 생각했다. 연구를 할 때 나는 작정하고 들으러 간다. 말을 만들어내고 건넨 몸을 살핀다. 때문에 그들의 단어가 듣기에 설익어도 삼키기에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려웠다. 그의 말과 행동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족끼리 외식을 할 때면 그는 앞에 놓인 밥상을 완수하듯 식사를 했다. 그는 늘 나보다 최소 10분 이상 빨리 식사를 끝냈고, 별말 없이 음식값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럴 거면 밥을 왜 같이 먹어? 엄마에게 하소연하자 엄마가 말했다. '아빠의 식사는 한국사회의 역사야. 저 나이 때 아저씨들 다 저렇게 먹어.' 나는 엄마가 아빠를 대하는 모습을 골똘히 관찰했다. 일요일 아침, 외출복을 고르던 엄마는 아빠에게 어떤 옷이 더 나은지 물었다. 엄마가 최종선택을 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예쁘면 바로 예쁘다 하고 아니면 3초 뒤에 예쁘다고 해." 


누군가가 비건이냐고 물어보면 가끔 예외사항을 둘 때가 있지만 최선을 다한다, 고 대답한다. 그 예외사항을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음식은 단순히 영양성분의 구성물이 아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평소에는 비거니즘을 실천하다가 연구할 때만큼은 느슨하게 먹는다고 했다. 외지의 부족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연구를 할 때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먹는 것이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식인 문화가 있는 부족들은 전쟁에서 싸운 상대편의 시신을 먹는 것을 상대편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는 글을 읽었다. 그들은 오로지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살인을 비상식적인 것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단순한 '소비' 이상의 음식을 엄격하게 대하기는 어려웠다. 1년 만에 만난 친구는 건강을 챙기라며 영양제를 잔뜩 선물했다. 집에 와서 영양제를 살펴보다가 웃음이 났다. 생선 기름으로 만든 오메가 3와 동물성 성분으로 만든 캡슐들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선물을 좀 더 온전한 사랑의 모양새로 되갚을지 생각한다. 


나의 주요 업무는 문서 속의 글자를 다루는 일이다. 하루 종일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쓰고, 단어를 재배열하면서 어떻게 하면 부정확함을 피할지 고민한다. 문서로 된 세계는 글자와 눈동자 사이를 오가며 전달에서 그 역할을 그칠 때가 많다. 반면 아 다르고 어 다른 대화의 세계는 매 순간 어긋나지 않는 게 기적 같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긴수염고래들은] 서로에게 청각적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언제나 상대방을 침범할 수 있고, 또 상대방에 의해 침범될 수 있음을 뜻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말의 정확성부터 따지는 것이 내가 수용할 준비가 된 말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파수를 잘 맞춰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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