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7살 딸 앵두만 데리고 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아내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가사까지 하니 하루 정도는 육아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평일에 나 역시 육아에 동참하지만 업무분장 상 아내 쪽이 훨씬 부담이 크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어지간히 먼 곳에 가지 않는 이상 앵두와 단둘이 나들이를 간다.
5월이었다. 햇살은 따뜻했고 눈부셨다. 하늘은 어느 때 보다도 푸르렀다. 행사장에는 수십 여개의 부스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다. 옆쪽으로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는 물론 임시로 설치된 트램펄린과 각종 놀이기구가 있었다. 저 멀리에는 수십 미터는 돼 보이는 용 모양의 미끄럼틀이 있었다.
앵두는 물 만난 고기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뛰어놀았다. 40대 중반의 나는 눈으로 아이를 좇을 수밖에 없었다. 암까지 걸린 내 체력으로는 7살 아이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무리 빨라봤자 내 시야를 벗어나진 못 할 거라 생각했다. 아이가 잠깐 사라져도 주변을 다시 둘러보면 앵두는 나타났다.
하지만 용 미끄럼틀은 내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앵두가 용미끄럼틀 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것을 봤다. 난 적당한 시간을 계산해 미끄럼틀의 중간 지점에서 앵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앵두가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시간이 한참 지났다. 이 정도면 앵두는 미끄럼틀에 없는 것이다. 미끄럼틀 위쪽을 봤다. 열린 공간이다. 불안이 몰려들었다. 앵두가 그리로 갔다면 난 앵두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앵두를 불러봤다. 적당한 목소리로. 서너 번 불러도 앵두는 나타나지 않는다.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 담겨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혹시 아래쪽으로 갔다면? 내가 서있는 곳에서 아래쪽으로 향하는 용 미끄럼틀이 하나 더 있다. 한동안 그곳을 주시했다. 앵두는 나오지 않는다. 미끄럼틀이 외부에서는 볼 수 없는 불투명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져 있어 안에 어떤 아이들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방법이 없었다. 목청껏 앵두를 불렀다. 그 넓은 공간에 모인 모든 사람들, 족히 천 명은 되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앵두가 보이지 않는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다. 손이 벌벌 떨렸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부모들. 그 순간을 기록한 CCTV 영상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휴대폰에 몰두하는 사이 아이는 지하철에서 내려 버린다. 그리고 몇 초 뒤. 아이 엄마는 아이가 없어짐을 알고 절규한다. 다행히 열차 밖에서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남성이 아이를 지켜주고 있었고 아이는 엄마 품에 돌아갔다.
“앵두야~ 앵두야~”
내가 들어도 이건 짐승의 포효였다. 아이를 잃어버린 아빠. 그것도 자신의 부주의로.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누릴 자격이 없다. 절망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활기찬 주말이 지옥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앵두가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아빠가 왜 저리 나를 찾을까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이다. 얼른 뛰어가 앵두를 안았다.
“앵두야, 어디 갔어?”
“아까 처음에 놀았던 그 놀이터 갔지!”
앵두의 스피드를 평가절하한 나의 착오였다. 내가 위쪽 용 미끄럼틀만 쳐다보고 있던 사이 앵두는 이미 아래 용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처음 갔던 놀이터로 이동했던 것이다.
원래 겁이 많은 나는 앵두와 밖에 나갈 때마다 이런 불안을 달고 다닌다. 나의 불안을 확대하는 여러 사건들이 있다. 최근 인터넷에서는 부모로서 화가 날만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행사 도중 아이를 잃어버려 경찰에 신고했지만 행사 중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찾는 안내 방송조차 못한다는 입장을 경찰이 취했다는 것이다. 행사 진행자에게 양해를 구해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아이 찾는 방송 하는 것보다 행사의 끊김 없는 진행이 더 중요한가? 안내방송 한 번 한다고 그 행사가 망하나? 정상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 부모는 아이를 찾았지만 결국 한국 사회는 개인이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도움이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출산율이 0.7이라고 한다. 이런 환경에서 누가 아이를 낳으려 할까?
앵두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 낮에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설명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날 당황하게 했다.
“쫄보!”
아이가 놀다 보면 잠깐 안 보일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리 예민하게 반응하냐는 것이다. 맙소사. 아내가 행사장에 가 보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뭐 어쩌겠는가? 앞으로 내가 더 조심해야지. 이제 초등학교에 가는 앵두. 핸드폰도 사주고 지문 등록도 해야겠다. 유비무환이다. 더 이상 그 어떤 미아 발생도 하지 않기를 바라고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어서 아이를 찾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