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밖 세르비아인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더라.
2018년 봄 어느 크로아티아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각자 할 줄 하는 언어를
돌아가면서 말해보라고 했다.
모국어를 비롯하여
다들 자기가 할 줄 아는 언어를 말하던 중
일본 친구 유타로가
자기는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몬테네그로어를 한다고 말했고,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 네 언어는 차이가 거의 없어서,
크로아티아어를 하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몬테네그로어를 이해하는 게 너무 당연해,
다들 그건 얘기 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도 웃으며
"크로아티아어 하면 1+3 이냐?"고 되물었는데,
네 나라 국민을 다 합쳐봐야
한국의 수도권 총인구도 채 안 되고,
네 나라 모두 경제 규모도 크지 않고,
외국인 투자도 적극적으로 유치하지 않아서,
1+3인 언어를 해도,
나처럼 학술적 목적이 있지 않다면,
생각만큼 쓸모가 크지는 않지만 말이다.
1991년 이전 이 유사한 4언어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불렸었다.
내가 크로아티아어를 배우기 전
읽은 어떤 논문에서,
크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는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보다 비슷하다고 했는데,
내가 크로아티아어를 배우고 난 후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에 가서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20여년전까지 한 언어로 불리던 이 4언어는
이제 억양뿐 아니라 어휘적 차이도 엄청 커진
남한의 한국어와 북한의 조선말보다도
훨씬 더 비슷한 거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언어들 간에 전혀 차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난 4개월간 단지 크로아티아어만 배웠는데도,
세르비아에 가서 내가 배운 크로아티아어를 하면
"어, 세르비아어 할 줄 아네(Govorite srpski)."라고 말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가서 크로아티아어 하면
"보스니아어 어디서 배웠냐(Gdje ste učile bosanski?)"며 놀라워했다.
지금은 넷이 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가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와 더불어
"유고슬라비아", 즉
"남쪽의 슬라브 국가"라는 의미의 나라가 된 것도
그들의 사용하는 언어가 매우 유사한 데서 비롯된
동질감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언어 말고는 사실 비슷한 게 없는 나라들이었다.
지금 이 네 언어가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건
(비록 몬테네그로어는
독립어로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해서
공식적으로는 3개의 언어지만)
언어 자체의 특징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매우 유사한 언어가
정치적 이유로 각각의 이름을 가지게 된 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보스니아어, 몬테네그로어뿐만은 아니다.
인도에서 사용하는 힌디(Hindi)어,
스리랑카에서 사용하는 타밀(Tamil)어와
파키스탄에서 사용하는 우르두(Urdu)어는
매우 유사하고,
특히 힌디어와 우르두어는 더더욱 유사하지만,
다른 언어로 취급되고,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화자는
통역 없이 자기 나라말을 하면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지만,
서로 다른 나라의 국어이므로,
각각 다른 언어로 간주된다.
슬라브어 비교를 하고 있는 나는
크로아티아어를 배우고 나서
그게 세르비아어, 보스니아어, 몬테네그로어랑
얼마나 다른지,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 아닌
직접 경험을 통해 느끼고 싶어서,
한국에서 크로아티아로 떠나기 전부터
막연하게나마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여행 계획을 세웠었다.
크로아티아어를 좀 더 잘해야
그게 다른 언어들과 어떻게 다른지도
단번에 간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학코스 끝날 때까지 계속 기다리다가,
한국 돌아오기 얼마 전인 7월초에
11박 12일 동안
세르비아, 코소보,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도는
유고슬라비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 중
자그레브에서 가장 가까운
북쪽의 슬로베니아는 4월 부활절 연휴에 다녀왔고,
슬라브어 연구자에게 매우 중요한 나라인
남쪽의 마케도니아는
넣을까 말까 좀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좀 더 길게
두세 도시를 돌아야할 것 같아,
그리고 불가리아에 있다 가야
서로 매우 유사한
불가리아어와 마케도니아어의 언어적 차이를
더 잘 간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번엔 그냥 안 가기로 했다.
근데 나중에 여행하다 보니,
코소보에서 몬테네그로 가는 길 중간에
마케도니아를 넣었으면 좀 더 나을 뻔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땐 있는 걸로 나왔던,
코소보 프리스티나에서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가는 밤버스가
직접 가보니 없었는데,
프리스티나에서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피에
가는 버스는 많았고,
코소보 사람들 말이
스코피에에서 포드고리차 가는 버스도 많단다.
그리고 그런 실제적 교통편 문제뿐 아니라
유럽에 있을 때는 막연히
나중에 또 불가리아를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한국에 오니 좀 더 현실적이 되고,
언제 또 불가리아를 갈 수 있으려나 싶다.
세르비아, 코소보,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몬테네그로, 네 나라 모두 한국인에게 비자는 필요 없고,
휴가철이자 방학이라 여행 성수기인 7월인데도,
세르비아, 코소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크로아티아에 비해 별로 인기있는 관광지가 아니라,
6월말 다 되서 숙박이랑 교통편 예약했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몬테네그로 아드리아해 연안은 유명 관광지지만,
나는 유명 관광지 아닌
수도 포드고리차에서만 1박하고,
관광지 코토르는 당일치기로 다녀와서,
그리고 몬테네그로 유명관광지인 코토르 갈 때
유럽인들은 버스타고 오래 이동하기 보다는
비행기로 단번에 가기 때문에,
버스 예약도 경쟁이 심하지 않아서,
숙박과 교통 문제 모두 매우 쉽게 해결했다.
그리고 네 나라 모두
유명 관광지인 크로아티아에 비해,
한국에 비해,
그리고 다른 보통의 유럽 국가에 비해,
물가가 매우 저렴하다.
그리고 사람들도 매우 친절하고,
인구 밀도가 낮은데다가
유명 관광지가 아니니,
어디 가든 북적거리지 않아 그것도 좋았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와, 또는 다른 유럽과 다른
특별한 풍경도 사실 맘에 들었다.
내 생각에 사진 찍기 예쁜 곳을 선호하는
보통의 한국인들에게는
첫눈에 감탄사가 나오도록 "예쁜" 크로아티아보다
덜 매력적일 것 같은데,
(얼마전에 세르비아 다녀온
지인의 감상을 전해 들었는데,
역시 내 예상대로 별루였단다.)
이제 맑고 예쁜 바다와
태양에 빛나 눈부시게 반짝이는 하얀 건물들,
옹기종기 붉은 지붕의 집들이 만들어내는
크로아티아 도시들의 아름다움에 익숙해져,
그리고 뜨거운 해변의 태양에 지쳐,
그 예쁘고 좋은 걸 봐도
처음보다 덜 감응하고 있던 7월의 나는
사실 이 다른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의
화려하지 않고 투박하고, 색다른 모습이
나름대로 아름답게 느껴져,
매우 마음에 들었고,
그 여행도 여러모로 매우 만족스러워서,
나중에 좀 더 긴 일정으로
꼭 한번 더 가보고 싶다.
그리고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별로 볼 것 없어",
관광객은 별로 많이 찾지 않는 이 동네가
크로아티아만큼 좋은 차원을 넘어
크로아티아보다 더 매력적인 곳으로
느껴질 수도 있나보다.
내가 크로아티아에 있을 때
나보다 먼저 이 나라들 다녀왔던
10대 후반 미국인 크리스티앙,
20대 중반 프랑스인 발렌틴,
20대 후반 일본인 유타로 모두
"특별하고 근사했다.
크로아티아보다 훨씬 재밌었다.
크로아티아보다 더 좋았다"
고 말하기도 했었다.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 중에
내가 가장 먼저 간 곳은 세르비아(Serbia)다.
세르비아는 아래 지도에서 보듯,
서쪽에서부터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코소보 등 자그마치 8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내륙 국가로
바다가 없다.
그리고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과는
항상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세르비아는 북쪽의 파노니야 평야와
남쪽의 카르파티아 산맥과 발칸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나는 이 중에서 수도 베오그라드(Beograd)와
북부의 노비 사드(Novi sad)를 방문했다.
혹시나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고향 니쉬(Niš)와
세르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수보티차(Subotica),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있다는
노비 파자르(Novi Pazar)도 가보고 싶다.
내륙 국가인 세르비아는 대륙성 기후라
겨울엔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날이 잦고,
여름에는 30-40도를 육박하는 날이 많다는데,
내가 갔던 7월에도 좀 많이 더웠다.
"세르비아"는
세르비아어로 Srbija[스르비야]라고 하는데
"스르브(Srb) 민족의 나라"라는 의미지만,
Srb는 따로 쓰이는 단어도 아니고,
그 어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산도 있고 물도 있고,
기후도 자연도 온화한
지금 세르비아 땅에는
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고,
트라키아, 일리리야, 고대 그리스 등
고대 문명의 도시들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세르비아의 여러 도시들은
기원전후 로마시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데,
이탈리아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로마 황제를 배출한 국가가
바로 세르비아일 정도로,
고대 로마제국의 중요한 일부였다.
6C경 발칸반도에 슬라브인이 유입되기 시작하고,
8-9세기엔 세르비아인의 나라가 세워졌고,
12-14세기 네마니치 왕조(Nemanjići) 때는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의 이웃으로
아주 잠시나마
제국(empire, carstvo)을 자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14세기 말 터키 오스만제국의 침략을 받아
코소보 전투에서 분패한 후,
1459년 세르비아 중부와 남부는
오스만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당시 사회적 불이익을 받았던
많은 그리스도교, 즉 정교도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의 지배를 피해 북부와 서부로 이동했다.
헝가리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세르비아 북부 보이보디나(Vojvodina) 지역은
한세기 늦은 16C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해,
얼마 후 다시 합스부르그의 일부가 되었다.
그 기세를 몰아 합스부르그 제국이
18세기 초 세르비아 중부까지 내려왔지만,
곧 다시 세르비아는 오스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오스만제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한
세르비아인들은 1878년 공식적으로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이후 20세기 초 제1,2차 발칸전쟁 이후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포함한 서남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914년 남슬라브인의 통합된 나라를 꿈꾸던
세르비아계 청년 프린치프(Princip)가
아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해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당기면서,
결국 1918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무너지고,
이에 세르비아 왕국의 왕은
프린치프가 꿈꿨던,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남쪽 슬라브인들의 나라" 즉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왕이 된다.
이후 마케도니아가 합류하면서
2차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만들어져,
1991년까지 계속된다.
1991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선언을 하며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1995년까지 전쟁을 벌이고,
1998-1999년 알바니아계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한 코소보와의 전쟁에서는
"인종청소"가 자행되어,
이를 막기위해 개입한 NATO군과 전쟁을 하게된다.
1992년 이후 "세르비아-몬테네그로"라는 이름의
나라를 유지하다가
2006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면서
독립적인 국가 "세르비아"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8년엔 코소보가 독립선언을 했는데,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는
아직까지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세르비아인에게
세르비아는 여전히 코소보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런 칙칙한 뉴스를 통해
그 이름을 처음 접했던 나에게,
세르비아는 무자비한 "인종청소"를 자행하는
발칸반도의 "악당" 같은 나라였는데,
직접 가서 보니
그 나라 사람들은 매우 선량하고 따뜻하다.
흔히 대도시에선 다른 사람들이 뭐하든
신경 안쓰기 마련인데,
수도 베오그라드와 노비 사드에서도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다.
관광지에서 흔히 만나는
그런 입만 웃는 친절 말고,
나를 만나서 정말 반갑다는 듯이
얼굴 전체로 웃는 그런 웃음을 웃는다.
독일 사람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했었는데,
세르비아도 그 나라가 저지른 일은 끔찍한데,
그 나라 국민들 하나하나는 참 좋은 사람들 같다.
그렇게 선량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이라
이상한 지도자에 쉽게 휘둘렸나 보다.
지금도 국경을 접하고 있고,
수십년간 같은 나라였지만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전쟁을 한 탓에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왕래가 잦지 않고,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크로아티아인들 중엔
세르비아인들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두 나라 간 교통편은 별로 좋지 않다.
구글에서 검색하면 두 나라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베오그라드까지
393.1 km이고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라는데,
버스로는 5시간 30분이 걸리고,
하루에 4대가 다니고,
비용은 편도 220쿠나(약 40,000원)다.
기차는 하루 2대가 있고,
약 6시간 30분 정도 걸리고,
편도 약 180쿠나(약 33,000원)정도 비용이 든다.
비행기도 하루 2대가 있고,
1시간 정도 소요되고,
편도 217달러 정도다.
바로 옆나라인 걸 생각하면,
비행기건, 버스건, 기차건
교통편이 너무 적은 편이다.
보통 나는 기차보다는 버스를 선호하는 편이고,
자그레브에서 베오그라드까지는
버스가 기차보다 더 선택지도 많고,
시간도 더 짧게 걸린다.
그래서 평소의 나라면
망설임 없이 버스를 예매했을텐데,
어디선가
자그레브에서 베오그라드까지 가는 기차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오리엔트 특급(Orient Express)이 다니던
바로 그 노선이란 얘길 들었다.
그 부분이 나의 속물근성을 자극해서,
결국 난 기차를,
사실 이제 "특급"도 아닌
오리엔트 특급이 다니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대책없는 속물근성은
댓가를 치뤄야 했다.
첫째는 두 개의 불편한 시간,
즉 가장 움직이기 좋은 여행 황금시간 동안
기차 안에 있어야 하는,
오전 11:06출발 17:31도착 기차와,
불편한 기차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오후 23:44 출발 다음 날 새벽 05:59 기차 중
차악을 선택해야 했고,
두번째는 (아마도 예전 Orient Express가 정차했을)
기차역이 폐쇄되어,
도심의 "베오그라드 주 기차역
(Železnička stanica Beograd Glavna)"이 아닌,
도심에서 좀 떨어진
"베오그라드 중앙역
(Železnička stanica Beograd - centar)"
에서 내려야한다는 거였다.
나는 시간이 불편한 두 개의 기차 중
그래도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적은,
밤에 자그레브를 출발해서
새벽에 베오그라드에 도착하는
밤기차를 선택했고,
어차피 새벽이라 호텔 체크인하기도 애매하길래,
그냥 "베오그라드 중앙역"에서 천천히 걸어서
"베오그라드 주 기차역"이 있는
베오그라드 중심부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걸어보니 40분-1시간 정도 걸렸다.
드디어 자그레브에서 베오그라드로 출발하는 날,
11박 12일 동안 계속될 여행의 짐을 싸고,
자그레브 기차역 앞에서 하는
여름밤의 거리 연극공연을 좀 보다가
기차 출발 20분 전쯤 기차를 타러 갔다.
내가 탈 기차는
1번 플랫폼에서 출발한다고 쓰여있었는데,
기차 출발 10분, 5분전이 되어도
기차가 안 보인다.
혹시나 1번 플랫폼이 거기 말고,
어디 따로 또 있나 싶어,
직원처럼 보이는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다급히 물어보니,
거기 맞다고,
그런데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오는 기차라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설명해주었다.
자그레브에서 출발하는 기차인 줄만 알았는데,
그 기차가 적어도 류블랴나에서부터,
어쩌면 그보다 서쪽에 있는 다른 도시로부터
출발한 기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뭔가 진짜 Orient Express 같아서,
괜히 더 기분이 업되었다.
아래 사진이 얼마 후에 도착한
그 1번 플랫폼의 오리엔트 특급(?) 열차다.
기차는 한쪽에 복도가 있고,
그 옆에 유리로 된 문이 달린 객실방에
6-8명씩 마주 앉아 가는,
그냥 흔한, 하지만 좀 낡은 유럽식 쿠페였는데,
좌석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라,
그냥 아무데나 내키는 데 앉으면 되는 거였다.
다른 도시에서 출발한 기차라
완전하게 빈 쿠페는 없어 보이길래,
방학이 되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은,
어떤 짐 많은 젊은 승객 혼자 앉아 있던 쿠페에
양해를 구하고 앉았다.
그 노선은 인기가 별로 없는지,
아님 밤시간이라서 그런지,
그 이후 다른 승객은
우리 쿠페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엔 마음이 약간 들떠,
창밖을 바라보며 가면서,
이러다 잠을 못자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나 아무데서나 등만 대면 잘자는 나답게
금세 잠이 들었고,
쿠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국경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크로아티아 국경에 도착한 건
새벽 3시 35분 쯤이었고,
여권 검사후 다시 또 잠에 들어
새벽 4시경 이번에는
세르비아 국경수비대에게
다시 또 여권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또 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가
새벽 6시 30분경 베오그라드 다 와서
잠에서 깼다.
원래 도착 예정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지만,
어차피 더 일찍 도착해도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덕분에 30분 정도 더 잘 수 있었으니
늦은 도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근데 2018년 7월부터
베오그라드의 대표 기차역이 된
베오그라드 중앙역(Železnička stanica Beograd -centar)은
아직 부대시설이 다 갖춰지지 않아서 그런지,
새벽이라 아직 문을 안 열어 그런지,
역 안의 시설도 이렇다 싶은 게 없고,
역 밖을 나와도 뭐가 없다.
멀리 성 사바 대성당(Храм Светог Саве)의
둥근 쿠폴이
이제 겨우 떠오른 해의 붉은 기운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일 뿐이다.
새벽이라도 시내버스는 다니는데,
환전소가 없으니,
세르비아 돈 없이 버스를 탈 수도 없고,
난 짐도 별로 무겁지 않고,
그리고 어차피 돌아다니며 구경하려고 온 거니,
그냥 슬슬 걸으며 구경하자 싶어,
베오그라드 시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베오그라드 중앙역에서 시내까지 가는 길은
복잡하지 않아서,
그냥 버스 다니는 대로를 따라 쭉 걸어가면 된다.
그 대로는
밀로슈 왕 길(Ulica kneza Miloša, Улица кнеза Милоша)인데,
19세기 초 세르비아 밀로슈 왕의 이름을 딴 이 길은
그의 통치 시절에 만들어진,
베오그라드의 대표적 산책로였단다.
현재는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차가 많이 다니는
가장 번화한 현대적 거리다.
밀로슈 왕 길은 1999년 코소보 전쟁 중
NATO군의 공습으로 많이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1999년 4월 30일 나토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인물을 기리는 추모 명패도 벽에 붙어 있다.
밀로슈 왕 길에서 계속 북쪽으로 걸으면
베오그라드 구시가가 나오고,
서쪽으로 가면
이제는 폐쇄된
주 기차역(Glavna železnička stanica)이 나온다.
그 고풍스러운 낡은 기차역 건물은
이제 기차역으로 사용되지 않는데,
그래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래서 입구에 앉아있던
인상 좋아보이는 아저씨에게
한번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어제 왔으면 좋았을텐데,
벌써 행사가 다 끝났단다.
아마도 그 전날 어떤 행사가 있었나 보다.
난 그냥 구경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더니,
구경할 게 뭐가 있냐면서,
그래도 들어가 보라고 했다.
낡은 기차역 건물엔
이 역의 역사가 간략하게 써진 석판도 있다.
그 대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엔나 건축가 Fon Flatih가 설계했고,
1884년에 건설되어,
베오그라드에서 니쉬까지 200명의 승객이 처음 기차에 시승했고,
당시에는 플랫폼이 2개밖에 없었는데,
그 이후에 계속해서 승객, 노선, 플랫폼이 늘어났으며,
2차대전 중에 손상되었지만 다시 복원하여,
1966년엔 역사적 기념비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폐쇄된, 텅 빈 기차역이다.
기차역 입구엔 옛날 기차 모형이 있다.
오리엔트 특급 열차려나 싶어 가서 보니,
1945라는 숫자가 써 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때 기차인거다.
기차역 남쪽엔 커다란 우체국이 있는데,
우체국 앞 벽돌색의 고상한 설치물이 서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당일 배송(bice otpremljene istog dana)"
이라고 키릴문자로 써 있다.
우체통을 형상화한 구조물이 아니라,
현재 사용되는 우체통이었던거다.
소도시에서 흔히 그렇듯이,
베오그라드 옛 기차역 바로 옆엔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물론 지금 기차역인 중앙역에서부터는
걸어서 1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버스터미널엔 БАС[바스]라고 쓰여 있는데,
마치 "버스"를 세르비아어식으로 읽은 듯
들리는 이 단어는
베오그라드 버스역(Београдска аутобуска станица)의 약자다.
베오그라드 버스터미널은 꽤 크고 깨끗하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의
버스터미널보다 크고,
매표소도 훨씬 더 많다.
빵이나 커피를 파는 가판대도 있고,
환전소도 있다.
보통 유럽의 터미널이나 기차역의 환전소는
환율이 안 좋은 편인데,
여기는 밖에 써 있는 환율이 꽤 괜찮았다.
터미널 안에 들어가면,
왼쪽에 매표소가 여러 개 있는데,
거기서 표를 구매하고,
오른쪽에 있는 버스승강장에 들어가
버스를 타면 된다.
여기서는 버스 티켓을 사면,
종이 티켓과 함께
토큰 같은 걸 하나 주는데,
그걸 잃어버리지 않게 잘 간직해야 한다.
버스승강장은 폐쇄적 공간이라,
그냥 아무나 막 들어가지 못하고,
그 동전만한 크기의 토큰을
예전 한국 지하철 입구 같은 곳에 넣어야
바를 돌려 들어갈 수 있다.
첫날 숙소에 체크인하고 나오면서,
잠이 부족해서 정신이 없었던지,
베오그라드 지도를 침대 위에 놓고 왔다.
걸어다니다보면
여행안내센터 나오겠지 싶어
그냥 구시가로 갔는데,
세르비아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은 도시긴 하지만,
특별한 관광지가 아닌 베오그라드에선
여행안내센터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크로아티아에선 인기 관광지 아닌 도시에서도
쉽게 지도를 구할 수 있는데,
여기는 관광객을 위한 배려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근데 희한하게도 구석구석 환전소가 많다.
여행안내센터를 찾기 쉽지 않은 걸 보면,
아마도 그런 환전소가
관광객을 위한 건 아닌 것 같고,
세르비아인들이 외국에서 벌어온 돈을 환전하거나,
혹은 환율에 따라 외국돈을 사고팔며
재테크를 하나보다 싶다.
러시아에서도 사람들이 루블을
좀더 안정적인 유로나 달러로 환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르비아의 통화는 디나르(dinar/динар)인데,
2018년 현재 1디나르는 10원 정도다.
그런데 환전소마다 환율에 큰 차이가 없고,
커미션도 없다.
그리고 바깥엔 주로 Euro환율이 붙어 있다.
세르비아뿐 아니라,
Euro를 쓰지 않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이젠 미국 dollar보다
euro가 더 많이 통용되고 선호되는 것 같다.
물론 미국 dollar도 당연히 환전이 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외국통화는 이제 Euro다.
세르비아에서도 그렇고,
통화가 유로가 아닌
다른 유럽국가들에서도 그렇고,
ATM기가 여기저기 곳곳에 있는데,
난 뺄 때마다 수수료를 내야하는 ATM보다는
대체로 Euro를 조금씩 환전해서 썼다.
근데 사실 세르비아에서는
디나르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
우선 카드로 결제되는 데가 많다.
버스터미널에서는 카드결제 안 된다고 했는데,
(엄밀히 말해서 되긴 하는데,
일반 신용카드말고,
세르비아에서만 통용되는 카드만 됐다)
버스터미널 말고 웬만한 데는
다 카드결제가 됐다.
호텔에서 숙박료를 결제할 때도,
서점에서 책 샀을 때도,
그 책을 우체국에서 한국에 부쳤을 때도
카드 결제가 됐고,
난 레스토랑에서는 현금만 사용했던 것 같은데,
레스토랑에도 웬만해선 카드 그림이 붙어있다.
단, 가판대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이나 빵,
커피 같은 건 너무 싸서
카드로 결제하기 뭐하다.
세르비아에서 디나르가 많이 필요 없는
두번째 이유는
물가가 비교적 싸기 때문이다.
커피 한잔은 200디나르(약 2,000원) 내외.
보통 밥 한 끼는 500-1000디나르로 먹을 수 있다.
물론 한끼가 이보다 싸거나 비싼 경우도 있다.
난 지도 구하러 구시가로 걸어가다가
우연히 시장을 하나 발견했는데,
거기서 산 체리 1킬로가 50디나르(500원),
복숭아 1킬로가 50디나르다.
그 다음날은 검은 산딸기 한 컵에 100디나르,
블랙베리 한 컵에 200디나르를 줬다.
(커피전문점 테이크아웃 커피 tall사이즈 정도)
나중에 알고보니,
거기가 과일, 채소가 베오그라드에서 젤 싼
젤레니 베나츠 시장(Pijaca Zeleni Venac)이었다.
1847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최근에 리모델링된 듯한 건물이
깔끔하고 또 매우 개성있다.
이 시장 말고 다른 곳도
베오그라드는 전반적으로 물가가 싼 편이다.
베오그라드는 원래 밤문화로 유명하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가로등은 좀 어둡긴 하지만,
밤늦게까지, 밤 12시까지 상점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도 많이 다니는 편이고 해서,
적어도 시내에서는 꽤 늦게까지 돌아다녀도
안전한 편인것 같다.
언어는 역시 예상대로 세르비아어가
크로아티아어랑 별 차이가 없다.
단지 크로아티아에서 의식적으로
언어순화 작업을 한 단어들이 좀 있어서,
남한과 북한의 언어처럼 어휘에선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도서관"이 세르비아어에서
biblioteka[비블리오테카]라면
크로아티아는 knjižnica[크니쥬니차],
"비행기"가 세르비아어 avion[아비온]이면,
크로아티아어 zrakoplov[즈라코플로프]인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가서 보니,
"터미널"이 크로아티아어 kolodvor[콜로드보르],
세르비아어 stanica[스타니차],
"얼마예요?"는 크로아티아어
Koliko košta [콜리코 코슈타],
세르비아어 Koliko stoji[콜리코 스토이],
"커피"는 크로아티아어 kava[카바],
세르비아어 kafa[카파],
"출발"은 크로아티아에서 odlazak[오들라작],
세르비아에선 polazak[폴라작],
"1000"이 크로아티아에선 tisuca[티슈차],
세르비아에선 hiljada[힐랴다],
"이탈리아의"를 크로아티아어는 Taljanski
세르비아어는 Italjanski라고 쓰고,
"무엇"을 크로아티아어는 što,
세르비아어에선 šta라고 쓰기도 한다.
그리고 세르비아어 버전은
보스니아, 몬테네그로에서도 그대로인 걸 보니,
이것도 크로아티아가 혼자 바꾼 게 아닐까 싶다.
근데 세르비아어 버전은
다른 슬라브어나 다른 유럽어에 있는
표현인 경우가 많아서
크로아티아어만 알아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고,
금방 세르비아어 버전으로 바꿔쓸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이것도 러시아어 전공자인 나에겐
문제가 안 되었지만,
세르비아어는 라틴문자말고
키릴문자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예상보단 라틴문자,
즉 우리가 흔히 알파벳이라고 하는 걸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
그건 그냥 써진대로 정직하게 읽으면 된다.
그래도 혹시 키릴문자만 써 있다면,
혹은 영어알파벳에 무언가 덧붙은 글자가 있다면,
그걸 읽는 법은
다음과 같은 사이트에서 참고할 수 있다.
그런데 세르비아어를 몰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 같은 것이,
호텔이나 식당 같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어느 정도 영어를 하는 것 같고,
혹시 길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지나가는 젊은 사람에게 영어로 물으면
아마 친절하게 대답해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