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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Aug 20. 2021

판데믹시대의 데카메론

재난의 한가운데에 선 우리

< 데카메론 프로젝트>

마거릿 에트우드 외 28인, 인플루엔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의 피난민(?)들은 페스트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인 아름다운 교외 별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모임의 액자틀 안에는 해학, 관능, 풍자, 희극과 비극이 있지만 결코 '신이 내린  재앙'에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잊기위한 모임이고 책속의 이야기꾼들은  모임을 사적으로 여기고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2020년의 뉴욕타임스 편집자들이 현대의 이야기꾼들인 소설가들에게 원고를 청탁해 엮어낸 이야기 꾸러미는 '바로 그것' 대해 말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두의 현실, 경험과 떨어져 있지 않겠다는 태도로 씌어졌기때문이리라. 물론 여기 실린 단편소설들은 'covid 19'이나 '전염병'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가급적 삼가하면서 서술된다. 이는 오히려 '이것들' 대해서 제대로 말하고자 했기때문일 것이다.


그러고보니 지속되고 있는 재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방식에 대해서라면 유명한 알레고리가 있다. 바로 에드거 앨런 포의 <적사병 가면> 속 귀족들이다. 이들은 전염병을 피해 자신들의 부와 특권을 이용해 궁전을 폐쇄하고 연회를 즐긴다. 그러나 향락으로 재난의 현실을 덮으려는 이들 앞에 가면을 쓴 전염병이 나타나며 이들의 도피는 파멸로 끝을 맺는다. ' 방안의 코끼리'는 말하지 않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코끼리든 가면을 쓴 실체가 없는 형상이든 평범한 시민 대다수는 복잡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일부로서 폐쇄할 궁전도 이야기 모임을 열 아름다운 교외별장도 없이 바이러스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위험에 그대로 노출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다. 현실이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굳이 또다시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고 재현한 문화콘텐츠를 들이미는 행동이 도리어 애써누르고 있는 생생이 현존하는 고통을 들쑤시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물론 문학적으로 각도를 새롭게 하고 비유와 행간의 암시를 이용해 서술한다면 꼭 그로테스크하게 적나라한 묘사로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감과 이해와 위안을 추구한다면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요소가 들어간다. 각양각색의 모자이크 타일처럼 재난 아래 현실사회의 다양한 계층, 인종, 동성애, 난민, 가족, 미래사회, 소중한 이들의 상실이 짧고 강렬한 인상으로 들이친다. 이는 이 책이 다양한 이들의 경험을 포괄할 가능성을 가지게 한다.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글의 기나긴 서사로서 주의를 분산시키고 망각의 반창고를 상처 위에 덮는 전통적인 방식과 사뭇 다르다. 허면 이 모던한 방식이야말로 문화 콘텐츠의 향유자들을 관전이 아닌 참여하는 주체로서 소통하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 걸까? 고통의 개인적 측면을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서 연대에 까지 이르렀는가?


부족한 '무언가'가 뭔지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이런 의문은 제법 묵은 질문인 '예술이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는가?' 혹은 ' 예술이 삶에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방식이 삶의 고통에 찬 인간을 별세계로 데려감으로써 외딴 시설에서 기나긴 입원치료를 하느냐, 노출치료를 택해 현실의 공경을 대면하게 하느냐의 방법론적인 문제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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