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후 두 번째로 이력서를 썼다

by 농부아내


농부가 되고 보니 겨울이 더 춥고 가혹했다.

땅이 얼어서가 아니라, 수입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농산물을 팔아야 돈이 생기는데 겨울에 팔 수 있는 작물은 한정적이었다. 겨울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계산기를 꺼내 든다. 그리고 남편의 눈치를 살핀다.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절을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해마다 반복되는 질문이었다.




2016년, 귀농 후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살 집과 땅을 구하기 전까지 ‘귀농인의 집’에 머물렀다. 비닐하우스를 임대해 농사를 시작했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아이들은 어렸고, 모든 것이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농사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을 것 같았고, 적어도 당분간은 다른 수입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017년, 귀농 후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다.

서울에서 이직할 때마다 사용하던 이력서를 꺼내 다시 다듬었다. 서울에서 일했던 경력들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최소한 방해는 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의 경력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서울에서 받던 연봉만큼을 요구할 거라 짐작했는지, 사장님들은 조심스럽게 선을 그었다. 시세라는 게 있지 않던가. 지방에 내려왔으니 지방의 연봉 수준에 맞출 수 있음에도, 번번이 내 이력서는 거부당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그만두었다.


그 이후로 나는 농사와 육아에 매진했다. 아이들은 자랐고, 하우스도 자리를 잡았다. 하루의 리듬은 단순해졌고, 계절에 맞춰 몸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물의 상태가 나의 성적표가 되었다. 잘 자라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다음 농사를 준비했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아이들은 더 이상 내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요구사항이 많아졌다. 예쁜 옷, 새 책가방, 게임기. 다 채워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원비도 함께 올라갔다. 성장에는 늘 비용이 따랐다.

2025년, 겨울이 다시 돌아왔다.

또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농사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듯했고, 아이들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는 직장을 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내 삶의 구조를 먼저 들여다봐야 했다. 농사는 남편과 단둘이 짓고 있어 평일에는 시간을 뺄 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 5일 근무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대신 토요일 하루, 혹은 평일 3~4시간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인구직 사이트를 매일 들여다봤다.

조건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주말 근무 가능자’, ‘경력자 우대’ 같은 문장들 사이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저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 맘카페에서 하나의 글을 발견했다.


토요일 근무. 실내놀이터 안전관리 업무.


아이들이 뛰어노는 공간, 넘어지지 않게 살피고, 다치지 않게 지켜보는 일. 농사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우대하는 자격증이 내게는 없었다. 그 대신 나는 두 아이를 안전하게 키워냈다. 이력서에는 잘 적히지 않는 능력이었지만, 분명한 경력이었다.


두 번째 이력서를 썼다.

귀농 10년 차, 밤호박 농사, 두 아이의 엄마. 나를 포장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대신 토요일 근무가 가능하다는 것,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적었다. 요구하는 서류들을 작성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메일로 보냈다.


제출 후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농사에서는 기다림이 일상이지만, 누군가의 판단을 기다리는 시간은 오랜만이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서류전형 결과 발표일까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외쳤다.


잘 될 거다.

나는 통과할 거다.


혹시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스쳤다. 귀농 첫 해의 기억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떨어지면 다시 구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발표일을 기다렸다. 농사도 그렇다.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우지 않으면, 다시 뿌리면 된다.


마음속으로 외친 말이 씨앗이 되어

“서류전형 통과”라는 싹을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