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 EPL Episode 2.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부부싸움을 하고 난 뒤 운전을 하면 교통사고의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굳이 연구를 통해 알아본 연구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아무튼, 부부싸움 후 잔뜩 성이 난 상태. 집안은 어수선하고 싸우느라 오후의 회의 준비는 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나를 정직하게 나를 조여 오는데 차선은 꽉꽉 막혀있다. 짜증과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상태. 바로 그 상태에서 사고는 일어난다. 리버풀의 17-18 EPL 개막전처럼 말이다.
리버풀의 개막전 상대는 왓포드다. 지난 시즌 17위라는 성적표로 간신히 강등당하지 않은 왓포드. 하지만 지난 시즌(부터 라고 하기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는)의 리버풀 별명은 '의적풀'이었다. 강팀에게 승리하고 약팀에게 어이없이 패배하며 승점을 나눠 주는 의적. 그것이 리버풀이었다. 그런 이유로 리버풀로서는 우승팀 첼시를 만나는 것보다 껄끄러운 상대를 개막전부터 만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지난 시즌 리버풀은 홈에서 왓포드를 6:1로 대파했고, 어웨이에서도 1:0으로 승리했다. 그래서인지 리버풀을 조롱하는 팬들은 "알고 보니 왓포드가 강팀이었다." 며 결과를 놓고 놀리기도 했다.
아무튼, 기존의 상대 전적과 현재 전력을 비교해봤을 때 분명 승리의 추는 리버풀로 기울어져 보였다. 경기 시작 이틀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문제의 사건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개막 하루 전, 에이스 쿠티뉴가 바르셀로나로 이적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제출했다. 이 때문에 팀 분위기는 급격히 내려앉았고, 평소 시원한 인터뷰를 자랑하던 클롭 역시 쿠티뉴의 질문에는 숨겨놓은 비상금을 걸린 사람처럼 확실한 답을 해주지 못했다.
지난 시즌 큰 활약을 해주었던 랄라나는 프리시즌부터 부상을 당했고, 스터리지는 당연히 부상을 당했고, 쿠티뉴는 부상과 함께 떠난다는 선언을 했고, 이적 시장의 목표였던 사우트햄튼의 수비수 버질 반다이크는 첼시로 이적하게 생겼고, 또 다른 목표인 나비 케이타는 소속 구단 라이프치히가 그 말 밖에는 배운 적이 없다는 듯 "Not For Sale"만 외치고 있는 상황. 부부싸움이 일어난 집처럼 집안은 난장판이었고 밖에 나가서도 왠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리버풀은 왓포드의 홈구장 '비커리지 로드'로 향했다.
리버풀은 예상대로 마네, 피르미누, 살라를 전방에 장착했다. 바이날둠과 헨더슨, 그리고 찬에게는 허리를 맡겼다. 마지막으로 수비는 프리시즌 큰 활약을 해준 아놀드가 오른쪽에, 마찬가지로 프리시즌 새 사람으로 태어난 모레노가 왼쪽에, 중앙에는 로브렌, 마팁이라는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의 수비수를 기용했다. 골키퍼는 각성한 미뇰렛이 섰다.
로브렌과 마팁은 지난 시즌부터 주전 중앙 수비수로 활약. 아니, 활동했던 수비수이다. 그만큼 현재 리버풀 수비수 중 가장 호흡이 잘 맞는 조합이며 가장 안전한 조합이다. 클롭 감독이 이 둘을 선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마팁은 수비수 치고 뛰어난 발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클롭의 성향에 잘 맞았다. 그리고 로브렌은 로브렌 보다 나은 선수가 없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단순한 이유지만 그것 외에는 로브렌의 선발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왓포드는 리버풀의 수비를 헤집어 놓기 위해 오카카를 투입했다. 강력한 피지컬을 지닌 오카카는 돌아오지 않는 윙백 모레노는 물론이고 싸움을 싫어하는 리버풀의 '평화주의' 중앙 수비에 큰 위협이 될 것이었다.
왓포드의 예상은 오래지 않아 적중했다. 리버풀에게는 페널티킥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코너킥 상황이 왓포드에게 주어졌다. 언제나 그랬듯 리버풀은 존 디펜스로 페널티 박스 안을 가득 채웠다. 수비수들이 자신이 맡은 구역을 책임지고 지키는 존 디펜스. 이것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두 가지 전술 중 하나다. 나머지 하나는 공격팀의 선수를 1:1로 마킹하는 맨 마킹 방식의 수비인데 리버풀은 줄곧 존 디펜스만 사용하고 있다. (맨 마킹을 하기에 리버풀 수비진의 마크 능력은 좋지 않았으니까)
존 디펜스는 정말이지 강력한 수비법이다. 제대로 지역을 나누고 각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면 서울의 부동산만큼이나 파고들 곳이 없는 것이 바로 존 디펜스다. 하지만 리버풀은 이러한 강력한 존 디펜스를 사용하면서도 세트피스에서 엄청나게 많은 실점을 해왔다. 실점의 이유로 많은 이유가 제시되고 있지만 진리는 간단하다.
"그들은 '존'을 지키지 못한다."
리버풀 선수들은 그저 자신의 지역에 서서 택배 기사가 벨을 누를때까지 절대 문을 나서려 하지 않는다. 이 비판은 수비수들에게 문밖으로 나가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자신의 지역에 공이 떨어지기 전, 다시 말해 택배 기사가 박스를 던지기 전에 문을 열고 발을 뻗으라는 것이다. (정말로 기다리던 택배가 온다면 그 정도 수고쯤은 해줄 수 있지 않은가) 리버풀 수비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북적이며 박스 안에 서 있었지만 모두가 "현관문 앞에 놓아주세요."라고 메시지를 적어둔 사람처럼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 틈을 타 오카카는 지역과 지역 사이로 파고들며 헤더 골을 완성해 냈다. 리버풀 선수들은 오카카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뒤늦게 창문으로 지켜보고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원정에서 실점한 리버풀은 왓포드가 더 엉덩이를 내리깔고 뭉개기 전에 택배를 찾아 나서야 했다. 이에 가장 적합한 선수는 역시나 마네였다. 마네의 질주에 다른 선수는 필요가 없었다. (있다손 치더라도 리버풀 미드필더진의 투박한 패스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공을 찾았고 스스로 질주했다. 그리고 엠레 찬을 이용해 완벽한 공간을 만들고 아름다운 피니쉬 골을 터뜨렸다. 리버풀의 올 시즌 첫 골이자 경기를 원점으로 만드는 골이었다.
이 골의 의미는 더할 나위 없이 컸다. 골이 터지기 전, 리버풀은 작년과 같은 실수로 실점을 했고 경기력 역시 작년의 장점과 단점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에이스 쿠티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리버풀에게 굉장한 불안요소였다. 불안한 마음은 조급증을 부르고 조급한 마음이 담긴 공은 길고 높이 벗어날 뿐이다. 마네의 동점 골이 지금 이 순간 터지지 않았더라면 경기 막판까지 양상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 경기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지금의 리버풀은 크게 흔들리는 배였다.
리버풀이란 배의 조타수를 자처한 마네. 그의 골은 어쩌다 얻어걸린 득점이 아니었다. 자신의 장점인 스피드를 100% 활용했고, 중앙에서 이어지는 창의적인 연계 플레이도 끌어냈다. 이런 과정 끝에 들어간 골은 "여전히 할 수 있다."라는 심리적 완성을 끌어냈고 경기의 분위기는 리버풀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첫 공식 데뷔전을 가진 살라는 마네와 더불어 리버풀이 올시즌 EPL 최고의 스피드를 가진 팀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그는 가능한 공은 받아서 질주했고, 가능해보이지 않는 공조차 반박자 빨리 도착해 따냈다. 상대로서는 마네가 뛰는 것도 무서운데 반대쪽에서 질주하는 살라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지경이었다. 조금만 방심해서 수비의 선을 잘못맞추면 어김없이 살라는 뛰었고 그 사이로 공은 통과했다.
문제는 이 통과 직전의 공을 누가 잡고 있느냐이다. 만약 리버풀의 주장 헨더슨이 공을 잡았다면 그는 하늘이든 땅이든 가리지 않고 정확한 패스를 꽂아 줄 것이었다. 여기에 쿠티뉴가 있었다면?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헨더슨과 쿠티뉴는 다른 점이 있었다. 쿠티뉴는 중거리 슛 혹은 드리블 돌파 라는 강력한 무기 두 자루를 손에 들고 공을 잡는 순간부터 수비수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었다. 쿠티뉴가 던지는 5지선다 문제를 받아든 수비수가 고심끝에 '3번'으로 찍기를 결심했을 때, 쿠티뉴의 창의적 패스는 살라 혹은 마네에게 들어갈 것이었고 이는 리버풀의 메인 공격루트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쿠티뉴가 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쿠티뉴는 이적 요청을 한 상태이다. 물론 그서이 아니라도 등 부상 때문에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할을 엠레 찬과 바이날둠이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그런 플레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들의 플레이가 아닌 이름만 아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결국, 리버풀은 헨더슨이 간혹 뿌려주는 패스를 제외하고는 살라와 마네의 동력에 시동을 켜줄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경기 자체가 다소 도박적으로 흐르는 기분이 드는 순간, 리버풀의 또다른 브라질 선수 피르미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시즌부터 가짜 9번의 역할을 맡고 있는 피르미누. 그가 가짜 9번 자리에 섰을 때 가장 큰 장점은 공격수와의 연계 플레이였다. 반면 단점으로 지목된 것은 정통 스트라이커들보다 득점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피르미누는 여전히 가짜 9번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리고 왓포드 전에서도 역시나 최전방에 위치했다. 그는 투박한 미드필더진에 창의력을 심어주기 위해 최전방에 머무르기보다는 마네와 살라 뒤를 받치는 역할에 집중했다. 계주 경기를 뛰는데 자꾸 바통을 놓치는 동료를 위해 직접 동료가 넘어진 곳까지 가서 바통을 건네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뛸 준비를 하는 살라와 마네에게 양질의 패스를 넣어주었다. 친정팀 호펜하임에 있었을 때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던 피르미누였기에 이런 역할의 옷은 런웨이에 서도 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는 가짜이긴 해도 9번. 즉, 골게터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현대 축구는 골게터에게 골만 넣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골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예전의 스트라이커는 말하자면 '힙'하지 않다. 최근 축구의 골게터들은 골을 넣는 능력은 당연했고, 연계와 수비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점에서 피르미누는 골을 넣는 능력을 제외하고는 훌륭한 자질을 가진 골게터 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난 시즌처럼 그의 골 결정력은 별달리 발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영입된 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지난 시즌 'AS 로마'에서도 결정력을 지적을 받았다. 이번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살라는 자신의 장점인 무시무시한 스피드를 통해 많은 찬스를 만들어냈지만 빗맞은 슛, 다소 무리한 슛, 높게 뜬 슛, 어이없이 옆으로 빠지는 슛까지…. 슈팅의 정확도가 높지 않았다. 물론 피르미누의 토킥을 몸과 함께 밀어 넣어 득점을 올린 점은 칭찬해주어야 하지만 그 외의 슈팅 장면은 피르미누와 함께 슈팅 연습을 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었다. 특히 현재 리버풀처럼 미드필드 선수들의 공격력이 높지 않은 상황이라면 골 결정력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한 경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결정적 찬스. 그 숫자 자체가 현저히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이런저런 공격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리버풀은 어쨌든 3골을 집어넣었다. 마네의 환상적인 골, 피르미누의 페널티 킥, 그리고 살라의 데뷔골까지. 골 하나하나의 의미로 치면 꽤 순도 높은 골들이었다.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면 "수비에서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공격에서는 역시 리버풀이라는 말이 나오는 경기였다."라는 평이 신문에 실려도 무방했다. 하지만 신문의 헤드라인은 후반 추가시간에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왓포드의 코너킥 찬스였다. 가뜩이나 세트피스에 약한 리버풀에는 꽤나 가슴 떨리는 위기였다. 그들이 선택한 수비법은 이번에도 존 디펜스였으며 팬들은 두 가지를 바랐다. 언더독 마냥 달려드는 수비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길. 혹은 언더독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먼 곳까지 공이 날아가 버리길.
팬들이 소원을 다 빌기도 전에 왓포드의 킥으로 경기는 재개되었고 공은 가까운 쪽 골포스트를 향했다. 공과 가장 가까운 이는 다행히 리버풀의 바이날둠이었고 팬들의 주먹 쥔 손은 반쯤 올라간 상태였다. 바이날둠이 공을 깔끔히 클리어함과 동시에 그들의 손은 번쩍 올라갈 것이고 그것을 신호로 휘슬이 울리면 3:2. 기분 좋은 승점 3점을 챙길 수 있었다. 이 승점 3점은 팀이 뒤숭숭한 상황을 이겨내고 얻은 것이었기에 며칠 후에 있을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경기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정말 모든 게 좋아질 예정이었다. 바이날둠의 헤더 클리어 하나면 그 모든 게 좋아질 것이었다.
3:3
경기가 종료되었다. 바이날둠의 헤더는 지저분하게 페널티 박스 안에 떨어졌고 공은 흘러 흘러 리버풀 골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자세히 보면 오프사이드 반칙이었다) 다시 달려야 했지만 남은 시간은 없었다. 1분 전까지만 해도 3점이었던 승점은 순식간에 1점으로 변해 버렸고 신문 기사의 내용과 라커룸의 분위기 역시 1분 전과 사뭇 달라져 버렸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리버풀은 이 경기를 통해서 현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고쳐야 할 부분이었고 고칠 방법과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시장에서 선수를 사 오든 전술을 추가하든 최대 약점으로 지목받는 수비(특히나 세트피스 상황)는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미드필더진은 능력에 부치더라도 지금 가진 능력 이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공격과 수비' 모든 면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공격진은 스피드는 지금처럼 유지하되 유기적인 패스를 통한 연계, 그리고 영점을 맞추고 돌아온 사수처럼 한 번의 슈팅을 하더라도 정확하게 꽂아 넣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러너스 하이'가 찾아오기 전에 체력은 조기 방전될 것이고 그 순간 시즌은 끝나버릴 것이다.
어쨌든 이제 첫 번째 경기를 마쳤다. 겨우 첫 경기를 마쳤을 뿐이다. 1점에 불과하지만, 승점도 얻었다. 승점을 얻지 못한 강팀도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지난 시즌 챔피언 첼시라거나…) 게다가 리버풀은 리그 내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선수들이 뛰고 있다. 어린 선수들의 팀. 그것의 장점은 경기를 마친 후에도 분노할 체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리버풀은 분명 조금 더 격렬히 분노해야 한다.
Written by 최동민
1984romaingar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