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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Oct 09. 2017

⎨COVER STORY⎬
"너의 목소리가 보여"

BOOKDIO COVER STORY



1.

 지금 막 한 편의 드라마 혹은 영화가 끝났다. 물론 엔딩 크레딧도 콘텐츠의 일부이기에 엄연히 말하자면 아직 화면 속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애호가들의 언어. 대다수 사람에게 이야기는 엔딩 크레딧을 기점으로 끝이 난다. 방금 본 화면 속에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등장했다. 그들이 입은 화려한 의상과 독특한 헤어 스타일. 평생 그것만 신었다는 듯 발에 딱 맞는 구두와 그것으로 발 딛고 선 세트 속 대지. 화면 속에 담긴 모든 것을 사랑해도 좋을 만큼 영상에 빠져 있던 지난 시간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금 긴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이 지나면 영영 이별이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과의 이별. 그것은 오래된 것과의 이별과는 조금 다른 슬픔의 감정을 가져온다. 하나밖에 없는 문을 나설 때 받는 관람의 선물. 거부할 수도, 미루어 둘 수도 없는 어떤 선물. 지금 느끼는 슬픔의 감정은 그 선물 상자 속에 담겨 있다.

 영상을 보는 행위. 더 구체적으로 말해 영상 속 이야기를 본다는 행위. 그것의 가장 큰 동력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어떤 것을 만나는 기쁨에 있다. 그들이 서로 비슷한 얼굴, 혹은 며칠 전 만났던 얼굴이라 해도 상관은 없다. 왜냐하면, 지금 내 얼굴은 그때와 다르니까. 


 중요한 것은 내 얼굴과 그들의 얼굴이 가까이 있는지 여부다. 그들의 눈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나의 눈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그 순간이 중요하다. 서로 눈을 마주쳤으니 이제 몇 가지 놀이를 해야 할 때다. 대화도 좋고 관찰도 나쁘지 않다. 침묵 혹은 공감, 때로는 화를 내도 무방하다. 그 모두가 영상 속 인물과 나누는 시간 제한의 놀이니까. 최대한 시간을 채워 놀수록 좋다. 게다가 아까워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되감기 버튼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을 되감으며 좋아하는 영상 속 좋아하는 이야기, 그리고 좋아하는 인물을 만난다. 어제도 만났지만 오늘 또 만나고 싶대도 문제는 없다. 횟수 제한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 한 가지. 영상 속 인물을 만나는 시간은 점점 쌓여가는데 여전히 그와 손을 잡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정도 시간이면 서로의 손이 차가운지 아닌지, 숨은 입으로 내쉬는지 코로 내쉬는지 정도는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영 가까워지질 않는다. 머릿속으로 떠올린대도 그것으로 끝. 더 선명해지지는 않는다. 


 이때 생기는 감정은 욕심일 것이다. 영상 속 모든 것. 즉, 손에 잡히지 않는 모든 것을 쥐려는 욕심. 좋아하면 소유하고 싶어지는 본능이 가져오는 욕심. 바로 그것이다. 이 당연한 감정을 나쁘다고 말할 것인가? 영상 속 배경을 여행하고 코스를 만들어 함께 투어에 나서는 것을 한심하다고 말할 것인가? 그럴 필요는 없다. 놀이는 이제 시작이니까 말이다. 



2. 

 영화 <아가씨>의 각본을 박찬욱 감독과 공동으로 쓴 정서경 작가. 작가는 시나리오를 완성하면 한동안 인물들의 대사를 마음속으로 되뇌며 재생하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정서경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혼자서만 하는 놀이”였다. 정서경 작가의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정서경 작가가 재생할 대사와 그 대사를 입술 사이로 내뱉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말 따라 하기’ 라는 고약한 놀이를 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기억하려면. 혹은 따라 하려면 누군가가 말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놀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서경 작가의 놀이에도 ‘인물’과 ‘대사’라는 선행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어떠한 영상 콘텐츠를 보는 행위. 그것은 이 놀이의 선행조건을 채워주는 일이다. 선후는 중요하지 않지만 어쨌든 조건이 채워졌으니 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든다. 정서경 작가처럼, 혹은 그의 목소리를 읽는 것으로. 


 정서경 작가와 같은 놀이를 하는 이는 셀 수 없이 많다. 이 놀이의 이름이 지어지지 않아 태그를 달지 못할 뿐, 우리는 한 번 이상 이 놀이를 해보았다. 영화 사이트에 기억에 남는 대사를 남기고, SNS에 해시태그를 공유하는 일. 그것 역시 이 놀이의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여기에 이 놀이를 하는 더 은밀하고 더 가까운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목소리를 보는 것이다. 


 영화 <아가씨>는 대중성이 뛰어난 영화가 아니었기에 천만 관객을 동원한다거나 하는 기록을 내지는 못했다. 호와 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본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했던 말은 “대사가 훌륭하다.”라는 것이었다. 극 중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사는 때로는 영상을 집어삼켜 텍스트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그것은 영상 콘텐츠에 있어서 되려 단점이 될지도 모르지만, 뿌리를 거스르는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이렇게 뛰어난 대사 덕에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인물의 입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가는 숨과 떨리는 음이 나오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그 순간을 다시 즐기기 위해 영화를 한 번 더 관람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정서경 작가처럼 머릿속으로 되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이들이 선택한 놀이 방법은 더 은밀하고 더 가까운 방법이었다. 


사진출처 http://www.aladin.co.kr


 그들은 <아가씨>의 대사가 담긴 각본집을 사는 것으로 놀이를 시작했다. 각본은 흔히 영상을 위한 글이자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영상 제작 후에는 한 발자국 물러서 있어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러한 각본이 묶이고 표지의 옷을 입고 한 발자국 걸음을 앞으로 옮기는 순간, 놀이의 환경은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인물의 입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 그리고 그 무언가가 내가 사랑하는 입과 말과 목소리라는 것. 이것은 말로 할 수 없거나 애써라도 숨기고 싶은 내밀한 놀이가 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 화면 속 인물과 나를 연결해준 나의 구원자는 바로 문자 매체인 책이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저 연기를 위한 대사에 불과하고 그 대사가 종이에 프린트되어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대사를 이미 영상을 통해 만났고 영상 속 인물이 숨결을 불어 넣어준 이상, 프린트된 종이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일종의 착각이라고 말해도 무방하지만 우리는 종이에 프린트된 목소리를 보고 읽고 만지고 또 지그시 누르며 내가 사랑한 인물을 갖는다. 술래잡기처럼 보이는 이 놀이는 누군가를 독점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놀이의 진정한 의미는 물성 없는 영상, 그중에서도 인물의 목소리를 물성 있는 어떤 것에 담아내 간직한다는 것에 있다. 영상을 다시 보는 것? 생생하더라도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인물의 대사를 되뇌는 것? 그것은 은밀한 만큼 허무하다. 하지만 각본집을 손에 얹는다는 것. 그것은 나만 간직한다는 내밀함과 눈과 귀, 심지어 촉감으로도 느낌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감각적인 놀이가 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구태여 이미 완성된 영상 속으로 들어가 각본집을 꺼내 드는 것이다.


 각본집 출판의 첫 성공사례를 꼽자면 단연 노희경 작가의 각본집일 것이다. 삶과 긴밀히 연결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흐르는 아름다운 대사들. 노희경 표 드라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는 드라마적 문법도 문법이지만 그 안에 흐르는 대사 역시 특별하다. 그 때문일까? 노희경 드라마의 팬들이라면 누구나 정서경 작가와 같은 놀이를 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손에 넣었을 것이다. 노희경의 드라마를. 


 <거짓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부터 <디어 마이 프렌즈>까지…. 노희경 작가의 작품은 빠짐없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을 드라마 작법 교육의 목적으로 구입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드라마를 관통하는 메시지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들도 이 책을 구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구입한 다수의 독자들은 ‘소유'를 목적으로 이 책을 구입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 내가 좋아하는 인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대사. 그 대사가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을 구입한 것이다. 그 영원할 것만 같은 소유의 감각.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각본집을 사게 된다. 


사진출처 http://www.aladin.co.kr


 노희경 작가의 성공사례 외에도 최근에는 다양한 드라마의 각본집이 출간되고 있다. 최근의 예를 살펴보면 조승우, 배두나 주연의 <비밀의 숲>을 찾아볼 수 있다. 이수연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작품. 첫 작품인데도 조승우, 배두나라는 거물급 배우가 캐스팅되었고 한국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는 쉽지 않은 사전제작이 결정된 작품. 그리고 매회 호평을 온몸에 안으며 막을 내린 작품. <비밀의 숲>은 그런 작품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았다. 작품이 예상 이상의 화제를 몰고 오고 작품성을 인정받자 첫 데뷔작을 이토록 완벽하게 써낸 이수연 작가에게 시선이 쏠렸다. 평범한 회사 일을 하다가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는 이수연 작가의 스토리가 얹히면서 <비밀의 숲>은 일종의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드라마의 팬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치밀하게 쌓아 올린 스토리 라인과 숨 막히는 장면과 장면들. 그리고 장면에 녹아든 대사와 여백을 놓고 싶지 않았던 팬들은 이번에도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런 팬들의 기대에 힘입어 <비밀의 숲> 역시 각본집으로 출간되었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진출처 http://www.aladin.co.kr


3.

 이번에는 영화로 시선을 옮겨보자. 영화 <최악의 하루>로 마니아층을 형성한 김종관 감독. 그의 다음 연출작은 영화 <더 테이블>이었다.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임수정 네 명의 배우가 출연한 이 영화는 하나의 테이블 위에서 벌어지는 네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영화와 함께 각본집이 팬들에게 전해졌다. 조금 특이한 점은 작품이 독자에게 가는 방법이 달랐다는 것이다.


 보통 각본집의 경우 기본이 되는 각본을 제외하고 작가나 배우의 인터뷰, 비하인드 스토리 등이 블루레이의 추가 영상처럼 담긴다. 지금까지 보통의 각본집은 그런 형태였다. 왜냐하면, 각본집의 경우 작품의 기획단계에 포함된 것이 아닌, 작품이 끝난 후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자체를 전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작품과 책을 연결하는 고리는 다소 부실했다. 하지만 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각본집은 대사를 소유하려는 이들의 수집품이니까. 


 하지만 <더 테이블>의 경우는 달랐다. 책의 목차를 보면 기존의 각본집처럼 시나리오가 있고, 인터뷰가 있으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특별한 한 가지. ‘언더 더 테이블'이 놓여 있다. 목차에서 말하는 ‘언더 더 테이블'은 시나리오 밖에 담긴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챕터다. 그것도 단편소설의 형태로 만들어진 챕터. 이는 새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원작 소설이 있는 작품이 아니기에 구태여 단편소설을 담을 필요가 없다. 기존의 방식대로 진행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테이블>의 책에는 책에 가장 어울리는 작법인 ‘소설'로 만든 작품이 담겼다. 왜 그랬을까?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http://www.aladin.co.kr 


 일단 영화의 관점에서 이 기획을 설명하면 영화관 밖에서 새로운 영화관을 관객에게 선물하겠다. 라는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책의 관점에서 이를 보면 영화와 책이 이어달리기를 하는 모습을 전하기 위해서. 라는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더 테이블>이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책에 각본과 소설로 담겼을 때, 이를 받아보는 관객 혹은 독자에게는 이런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영화는 영화의 작법으로 이야기를 달리고, 달리기가 끝나면 책에 바통을 넘긴다. 바통을 받은 책은 책과 소설의 작법을 통해 이야기를 달려내 마침내 나에게 들어온다.” 


 영화를 보고 각본집을 손에 얹으며 마침내 그것의 목소리를 소유한 관객 혹은 독자. 그들에게 <더 테이블>과 같은 새로운 시도의 각본집은 흡사 러시아 인형을 선물 받은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인형을 열면 또 다른 인형이, 그 인형을 열면 또 다른 인형이 내 손에 얹히는 것. 그런 선물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그런 이야기라면 조금 더 객석에 앉아 책을 펼칠 여유를 낼 수 있다.


사진출처 https://unsplash.com


Written by 최동민
1984romaingar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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