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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Oct 24. 2017

⎨COVER STORY⎬
"몸의 감각"

BOOKDIO COVER STORY


1.

 잠시 길을 걸을 때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일반적인 경우 두 발에 몸의 모든 무게를 실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땅을 밟으면 "길을 걷는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이때 느껴지는 감각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눈앞으로 펼쳐진 풍경, 피부에 와닿는 볕과 바람, 귀를 울리는 경적 까지…. 아니, 한 가지가 빠졌다. 발과 땅이 호흡하는 감각. 가장 원초적인 그 감각이 빠졌다. 이것은 곰곰이 생각하면 오묘한 일처럼 보인다. 온몸을 발에 의지한 채 걷는 행위. 그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발이다. 그런데도 발이 느끼는 감각. 그것을 앞서 떠올리지 못한 것은 왜일까?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신발이라는 존재 때문일까? 그렇다면 신발을 벗고 걸어보자. 아주 짧은 거리라도 좋다. 열 줄이 채 안 되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정도도 무방하다. 애비로드를 걷던 폴 매카트니가 그랬던 것처럼. 발과 거리가 감각하는 순간. 그 순간 이야기는 탄생한다. 


 여기 어느 노작가가 있다. (물론 가상의 인물이다) 그는 열 편의 장편소설과 수십편의 단편을 발표했으며 에세이는 손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한 연구자가 그의 작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무엇일까? 그간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것? 아니면 그가 남긴 인터뷰 속 메시지를 살펴보는 것? 아니,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노작가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존재의 증명을 물성이라는 필요조건으로 채워야 하는 인간. 이 명제는 아직까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겼거나 수조의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몸'이라는 물성이 사라지면 그 순간 게임은 끝나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누구도 땅을 거부할 권리는 없으며 신발을 신더라도 땅의 기운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감각하지 않더라도 땅은 이미 심장 가장 가까운 곳까지 진동을 울리는 법이니까. 


 이것은 거의 모든 작가에게 해당하는 명제이다. 그렇기에 한 작가의 작품을 돌아볼 때, 그의 작품이 남기는 메시지를 오롯이 이어받고 싶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가 발 딛고 있던 땅을 찾아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산골을, 누군가는 도시를, 또 누군가는 타국의 곳곳을 자신의 진동으로 삼았을 테고 그곳의 진동을 함께 느끼는 것만으로 작품의 절반은 이해한 셈이다. 



2. 

 그런 의미에서 조금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여행지는 일본 가나가와 현에 위치한 가마쿠라다. 이곳은 막부 시절 가마쿠라 막부가 위치했던 역사 깊은 도시이며 막부 시대가 흐른 후에는 영광을 뒤로하고 본래 땅의 역할로 돌아간 곳이다. 최근에는 도쿄에서 1시간 거리에 있다는 점과 막부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문화재가 많다는 이유로 막부 시절 못지 않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새겨지고 있다. 조금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면 '가마쿠라 분시'라는 말을 찾아낼 수 있다. 이 말은 가마쿠라 지역에 살며 작품 활동을 하는 소설가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말이 생겨난 이유는 당연히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한 소설가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의 끝을 향하다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같은 작가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니 허명은 아님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소설가들이 많이 살았을까? 가장 현실적인 이유로는 수도 도쿄의 위치를 꼽을 수 있다. 출판사가 밀집된 도쿄.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출판사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활동에 용의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쿄의 물가를 모두 감당하기에 작가의 삶이 그리 윤택하지는 않았을 테고, 집중해서 작품을 쓰기에는 대도시의 한복판보다는 조금 떨어진 장소가 좋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마쿠라에 작가들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레 가마쿠라의 진동을 담은 작품도 서점 곳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점에 꽂힌 가마쿠라의 장르 역시 다양하다. 처음으로 둘러봐야 할 곳은 만화 섹션이다. 이 섹션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슬램덩크>가 있을 것이다. 특히 책의 중요한 장면으로 연출되었던 노면 전철을 기억하는 이들은 책 속의 가마쿠라 풍경 곳곳을 직접 걷는 여행을 하기도 한다. 최근의 작품 중에는 요시다 아키미 작가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마츠시타 코이치로의 <혼자 사는 초등학생>도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하여 책에서 오롯이 느끼기 어려웠던 실제 가마쿠라의 풍경을 만나볼 수 있기도 하다. 다음으로 찾아볼 챕터는 영상 섹션이다. 이곳에서는 영화와 소설 드라마, 뮤지컬로도 제작된 <태양의 노래>를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 초여름>이라는 작품도 눈에 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소설 섹션으로 넘어가 보자. 이곳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산의 소리>가 고전으로 가장 먼저 보이고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과 같은 장르 소설에도 가마쿠라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신작 섹션에 놓인 오가와 이토 작가의 <츠바키 문구점>도 찾아볼 수 있다. 


 <츠바키 문구점>이 작품은 에도 시대부터 가마쿠라에서 대필을 가업으로 삼고 살아가던 가문의 후손 '포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포포가 이어받은 가업은 의뢰받은 편지를 대필해 쓰는 것이다. 포포에게 전해지는 의뢰는 이혼부터 조문, 심지어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보내질 편지까지 다양하다.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의뢰를 받은 포포와 의뢰를 하는 이들 모두 가마쿠라의 같은 거리를 걷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이는 별다를 것 없는 조건처럼 보이지만 포포가 하는 대필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 중에 하나이다. 포포가 의뢰인의 몸에 새겨진 진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포포가 쓰는 편지 역시 의뢰인의 진동과 어긋나 버리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편지는 물성을 잃고 말 것이다.  


 <츠바키 문구점>을 비롯해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모두 그곳을 작품의 중요한 포인트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슬램덩크>에서 처럼 그저 이야기의 장소 정도로 쓰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편지 봉투의 주소지 정도로만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를 보고 자란 작가. 전철을 타면 도쿄에 1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지만, 자신이 사는 곳은 다리 하나로 겨우 이어진 섬에 사는 작가, 큰 빌딩 사이의 아파트에 살지만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문화재와 절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작가. 그들은 몸의 감각을 통해 자신이 사는 공간의 진동을 익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동은 자연스레 작품 속 인물과 이야기에 투영되었을 것이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예를 찾기 위해 조금 먼 곳으로 떠나보자. 카뮈의 고향 알제리로. 


사진출처 http://www.aladin.co.kr



3.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살인을 저지르고 법정에 선다. 그런 그가 살인의 이유로 밝힌 것은 바로 "태양이 너무 눈 부셔서." 였다. 이 황당한 자기변호에 법정의 모든 이가 당황한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주인공 뫼르소만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이 작품의 이야기와 결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완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을 조금 더 넓게 보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고 알제리의 거리를 거닐어야 한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강렬한 고대 무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순수하고 영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살인 충동을 느낄 만큼 강렬한 알제리의 햇빛. 그것은 마주한 사람만이 아는 환희이자 공포이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카뮈가 느낀 것이 이 중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알제리의 햇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자랐다는 점이다. 그리고 카뮈의 피부를 까슬하게 태운 그 빛은 <이방인> 속 뫼르소에게도 그대로 닿았을 것이다. 작가와 작품 속 인물이 함께 맞은 그 강렬한 햇빛.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뫼르소의 자기변호는 법정 안을 부유하는 메아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사진출처 http://www.aladin.co.kr


4. 

 작가의 공간, 작가의 걸음, 작가의 거리를 생각하거나 혹은 직접 걸어보는 것. 그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거나 메시지를 더욱 선명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손으로 감각하고 있는 작품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죽은 시체가 아닌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다는 기쁨. 그 기쁨의 진동은 이제 곧 신발을 벗어낸 내 발 끝에 서서히 울릴 것이다. 


Written by 최동민
1984romaingar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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