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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Feb 21. 2018

⎨COVER STORY⎬
악의 연대기

BOOKDIO COVER STORY


식장을 나서는 신랑과 신부. 두 사람은 지금 막 결혼의 예를 마치고 부부가 되었다. 긴 연애의 시간. 몇 개월의 식 준비. 함께 살 집을 알아보고 함께 놓을 마음을 맞추며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15분 동안 이어진 식순과 터져나오는 박수소리. 그 소리에 떠밀려 행진을 마쳤지만 두 사람의 귓가엔 아직 먼 박수소리가 들린다. 박수소리가 사라질때쯤 두 사람은 타국에 도착한다. 그리고 전화를 건다. 이제 "가족"이 된 이들에게. 


신혼 여행에서 첫날밤을 보낸 두 사람. 그들에게는 갑작스레 가족이 늘어난다. 흡사 분단된 국가가 통일이라도 된 듯. 같은 민족이라는 카테고리 하나로 두 사람과 두 사람을 연결하던 인과의 고리들이 마구 뒤엉킨다. 그것을 풀어낼 방법은 없다. 끊거나 혹은 엉켜 있거나. 선택지는 그것이 전부다. 이런 단 하나의 조건. 그것으로 두 사람의 숨은 가빠진다. 악과 연대해 살아야 하는 삶이 늘 그렇듯이 말이다. 


결혼으로 부부가 탄생하고 두 사람 각자의 가족이 두 사람의 가족이 되는 순간. 악과의 연대기가 시작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기심과 계급 차이. 그리고 "가족이니까"라는 유일한 헌법으로 허락되는 온갖 소악의 행위들. 그런 행위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상처받는다.


만화 <며느라기>는 바로 그 악의 연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랑 무구영과 신부 민사린.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두 사람은 새로운 가족의 둘레 안에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그 가족의 둘레 안에는 의자의 갯수가 정해져 있어 의자 뺏기 싸움이 자연스레 시작된다. 하지만 게임의 마지막에 의자를 잃고 술래가 되는 이는 언제나 사린이었다. 왜냐하면 게임이 시작되고 흥겨운 음악이 흐른다한들 누구하나 자신의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도 핑계는 있다. 지금 앉아 있는 의자는 원래 자신들의 의자라는 것. 그것은 불패의 논리였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논리로 중무장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이들은 의자에 앉지 못한 한 사람. 사린에게는 철저히 감정적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일 혹은 불리한 일에 "가족이니까"라는 감정적 짐을 들이밀면 며느리 사린은 그것을 떠안아야 했다. 이때, 얼마나 완벽히 가면을 쓰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며느라기가 될 수 있는지 여부는 말이다.


"시댁 식구에게 예쁨받고 칭창받고 싶은 시기."


며느라기는 바로 그 시기를 뜻하는 말이다. 보통 결혼 후 1, 2년간 지속되고 사람에 따라 10년이 넘게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하는 시기다. 달리 말하면 어느 누구도 그들이 원하는대로 며느라기가 된 이는 없으며 그것은 골인 지점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일종의 질병이며 치유의 성공 여부는 넘어서느냐 못하느냐가 아닌, 빠져나오느냐 아니냐로 갈리게 된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며느리라는 없는게 편한 계급장을 단 이들은 자연스레 제복이 이끄는 그 시기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얼굴을 잊어간다. 


만화 속 사린은 남편 구영에게 이런 말을 한다.


"고민이 설거지라니 시시하다.
그런데 그 시시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순간들이 자꾸자꾸 떠오르는걸, 어떡하지?"


사린이 말하는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순간들. 그 순간은 너무나 사소하고 너무나 작아서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설거지, 반찬, 의미없이 내뱉는 말들, 숨기는척 하지만 날을 잔뜩 세워 날아오는 가족이란 이들의 목소리. 그것은 폭력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폭력을 구사하는 방법은 매우 특별했다. 웃음과 배려. 혹은 관심이라는 이름의 포장은 사린으로 하여금 미소와 겸손, 그리고 더 큰 신경을 요구한다. 사린에게 결정권은 없다. 그저 메뉴얼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행동의 채점은 문제를 낸 이들의 몫이었다. 


지금껏 어떤 악마도 그런것을 해내진 못했다. 웃음과 배려로 자신을 포장한 악마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악마의 현관은 한번도 잠긴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린은 그저 자신의 결정으로 현관안에 들어왔고 의자를 내주지 않아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게임의 룰은 이미 사린에게 불평등했으며 그것을 모른척 할때가 가장 덜 상처받는 길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악마들은 가장 모르는 게 많은 이들에게 며느라기의 칭호를 선사하곤 했다. 물론 그것도 거품으로 만든 훈장이었지만 말이다. 


다시 만화 <며느라기>를 펼쳐본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몇 십만명의 팔로우를 기록한 이 만화는 설날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종이책으로 발매가 되었다. 이 책은 조금 특별하게 제작되었는데 바로 케이스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케이스에 사린은 아주 밝은 미소를 짓고 있으며 사린의 머리 위로는 흐릿하지만 '며느라기' 네 글자가 적혀있다. 그렇다면 케이스를 빼면 어떻게 될까? 예상했듯이 사린의 표정은 굉장히 슬픈 모습이며 '며느라기' 네 글자는 모르고 보면 글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뼈만 앙상히 남아 있다. 이 모습이 사린이 앞서 말한 자신의 본 모습일 것이다. 사소한 악에 맞서다 멍이 들고 얼룩이 튄 채 닦지도 못하고 서있어야 하는 사린의 모습. 이 모습이 싫다한들 사린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대체 무엇일까? 얇디 얇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씌운 채 가짜 미소를 그리며 사는 것. 그것이 전부여야 할까?  아니, 지금 다시 사린에게 그 방법을 묻는 것은 또 하나의 악일 것이다. 지금 우리 곁에 만연한 악의 연대기. 그것을 끊어낼 방법을 묻는 질문의 방향은 악의 둘레, 그곳을 향해야 한다. 거창한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거대한 대답의 목소리는 그정도 크기의 입을 가진 이들만 할 수 있으니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고 아주 마땅한 것이라도 좋다. 심지어 <며느라기>를 펼쳐 보겠다 정도만으로도 괜찮다. 대신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게는 악이라는 사실.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얼굴에 거친 낙서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채 책장을 넘기길 바란다. 일년의 시작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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