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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Mar 02. 2018

⎨COVER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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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DIO COVER STORY


책장이 가득 찼다.

더는 꽂을 곳이 없다.

빼내야 한다. 

어쩌면 썩어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 그곳에 있어 벌레가 들끓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 책장 앞창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것은 책의 명령이었다. 

책장에 빛을, 시선을, 진실을 허락하지 않는 책의 명령이었다. 

커튼에 가려진 빛은 어둠을 초대했고, 어둠은 눈 감길 권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벌레 가득한 책은 책장과 함께 썩어가고 있었다. 


이 짧고 부족한 이야기를 이름 모를 한 평론가에게 권한다. 그는 우려했다. 개인의 인성에 관한 문제로 작품성의 판단이 흐려지는 것을. 또한, 그는 우려했다. 이런 선례가 생긴다면 그것이 파장되어 한국 문학사가 거덜 날 것을. 그렇기에 죄는 미워하되 죄지은 이의 작품은 미워하지 말자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말을 2018년에 다시 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몹시 슬픈 일이다.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악랄한 범죄들. 그 시간의 틈에서 피해자들은 고통받아야 했고 가해자의 앞에 나서기까지 용기를 내야 했으며 정면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그런 사람들 앞에 한낱 종잇 조각을, 가해자의 이름이 적힌 그 더러운 종잇조각을 내미는 이들은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생각은 분명 지금을 살고 있지 않다. 그들은 교과서에 박제된, 그것으로 권위와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기에 두려운 것이다. 박제된 것은 떼어내는 순간 덩어리째 폐기처분 되는 것이니까. 그 시대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덕성과 작품성은 별개다. 친일이든 성폭력이든 살인이든. 예술가 개인의 잘못을 작품의 잣대에 들이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사람의 마음을 쓰고 자연을 노래하고 관계를 그려낸다던 예술이. 예술이 담아내야 하는 세계를 상처 입혔다면 그것이 그 예술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과 토론은 언제나 교묘히 옆길을 향해가고 그사이 침묵하던 박제의 작품들은 눈에 띄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


이제는 그런 우려마저 책장에서 빼내야 할 시기일지 모른다. 교과서에서 성폭력 가해자들의 작품을 모두 삭제하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세상을 그리고 있는 작가들에게 건네는 최대치의 치욕이다. 설령 그들의 논리대로 남는 것이 없다 한들 문제 될 것도 없다. 그들의 작품이 아니면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차라리 작품이 삭제된 공백의 교과서로 배움을 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이들은 알아야 한다. 빽빽이 담긴, 그들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작품들을 배우는 것보다 그들이 작품이라는 것으로, 권위라는 것으로, 예술이라는 허울로 교과서 밖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그것을 알리기 위한 공백이라면 충분히 값어치가 있을 것이며 그것이 동반되지 않는 배움은 또 다른 박제 인간을 낳을 뿐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올라가는 미투의 해시태그, 그곳에 가십을 따르듯 몰려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섞여 교묘히 상황을 빠져나가려는 가해자들. 그런 이들 덕에. 여전히 책장에 박힌 채 썩어가는 이들 덕에 자리 밖에서 물끄러미 주먹을 움켜 쥐어야 하는 이들. 그런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공백을 허락할 시기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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