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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Apr 18. 2018

⎨COVER STORY⎬
수영장의 워킹맨

BOOKDIO COVER STORY


걸어가는 조각상이 있다.  

‘워킹맨’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1960년 맨하탄의 공공 공간에 설치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었다. 그가 자신의 예술과 관객에 대해 밝힌바에 따르면, 작가가 완성하는 부분은 작품의 절반에 해당하며 나머지 절반은 관객에 의해 완성된다. 이로써 한정된 시대를 사는 예술가의 작품일지라도 그 후대 관객들의 손길을 통해 영원히 살게 된다. 


예술의 전당 디자인 미술관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 120여점을 볼수있는 전시가 열렸다. 마지막 전시실에 자리잡은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조각은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수영장에서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풀장을 향해 걸을 때 내 맨살에 엄습해오는 차가운 공기를 떠오르게 했다.  

잔뜩 움츠린 어깨에 어색한 팔놀림과 함께 걷는 걸음, 맨살을 애이는 찬 공기속을 영문도 모른채 걸어가는 듯한 모습. 지나치리만큼 왜곡되어 기다랗게 늘어진 팔이며 다리, 허리는 부러질듯 약해보인다. 도통 표정을 알수 없고 잔뜩 움츠러들어 눈빛은 심연을 향해 있는듯한 조각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의지와 두려움이 뒤섞인 마음을 드러내는 듯 했다. 


작품 앞에 서면 우선 말도안되게 늘어진 신체 비율에 주목하게 된다.  

수년전 인터넷에 떠돌던 졸라맨의 몸통, 그리고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의 늘어나는 팔다리는 놀라울것 없지만, 미술관에 자리잡은 조각품이 보여주는 부러질듯 가늘고 긴 몸은 당혹스럽다. 미켈란젤로의 아찔하게 아름다운 조각이나, 로댕의 역동적인 군상에서 드러나는 육체와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미술의 본질이 있다. 이상적인 몸의 형태를 보여주는 전통 예술과는 달리, 현대미술은 한 개인이 풀어놓는 무형의 생각과 이야기에 더 큰 무게를 싣는다. 즉 개인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물리적인 몸의 형태는 얼마든지 늘리고, 줄이고, 찌그러뜨리는 등 왜곡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미술에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이나 신화가 그 주류를 차지했는데, 이 둘은 한 개인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전 인류를 보편적으로 다루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에 반해, 앞서 언급한 원피스나 졸라맨 시리즈는 보편성과는 거리가 멀어서, 한 작가의 개성있는 생각이 빚어낸 꽤나 특수한 이야기이다.  

보편적인 신화와 개별 작가의 애니메이션을 비교해보자. 신화 속에서 자신의 침대 길이에 맞춰 행인의 몸을 늘이고 줄여 살해하는 괴물의 이야기를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괴물 프로크루스테스가 사람의 팔다리를 쭉 늘렸을때에 당사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원피스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주인공 루피는 스스로 팔 다리를 기일게 늘리는데, 동시에 ‘고무고무 주먹!’이라는 기합이 울려퍼지면 악당 괴물들이 나동그라져 세상을 뜬다. 

자코메티의 ‘워킹맨’도 작가의 이야기를 위해 기다랗게 왜곡된 형태의 몸을 지니고 있다. 현대미술에서는 원피스나 졸라맨처럼 작가 개인이 펼치는 생각과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인체비례는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 물론 워킹맨은 루피와 달리 어떠한 음성적 자기표현도 하지 않는탓에, 그 겉모습만으로 작가의 이야기를 읽어내야 한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자코메티의 이야기가 원피스나 졸라맨 보다는 좀더 진지하고 근원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워킹맨 속에 ‘살아있음, 혹은 살아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독특한 신체 비율을 뒤로하고, 그 표면을 살펴보면 매끈하게 닦여있지 않고 온통 울퉁불퉁한 모습이다. 이게 완성된 상태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친 표면은 차마 그것을 피부라고 칭하기 조차 어렵게 만든다. 역시나 보통의 아름다운 조각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작품을 관찰하다보면, 여기에 담긴 이야기는 울퉁불퉁한 ‘피부’ 그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표면은 우리들의 마음 속 풍경을 담고있다. 마음이 약하든 강하든, 사람들은 살면서 수도없이 실패하고 상처 입는다. 겉으로 보이는 상흔과 비교했을때, 마음속에 흉터로 남은 상처가 훨씬 많지만 역설적으로 그 많은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워킹맨은 그러나, 그 수도없는 실패와 상처를 드러낸 모습으로 걷고 있다. 

이어서 두 손을 살펴보면, 손가락이 표현되지 않은 투박한 덩어리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정교한 손기술로 도구를 만들면서 시작된  문명과, 오늘날 자판을 두드리며 긴 시간을 보내는 우리를 생각하면, 작가는 복잡한 문명을 넘어 삶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타자기를 쓰든 태블릿을 쓰든, 모국어가 영어이건 한국어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될 삶의 이야기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위해선, 손가락의 형태는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고, 생략해 버리는게 오히려 완성도를 높이는 셈이다.  

워킹맨은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의 원형이다. 그의 얼굴은 오른편과 왼편의 생김새와 표정이 다른데, 한 사람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그 차이가 상식적인 수준을 벋어나 있다. 뿐만 아니라, 몸에는 성별에 따른 특징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성별이나 생김새는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그 외모가 어떻든 상관없이 그저 상처를 가득 안고도 계속해서 걸어가는 한 인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작품의 좌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작가의 이야기를 읽는 흥미로운 방법이다. 그 표정과 포즈가 좌우로 나뉘어 묘한 조화와 대비가 섞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딘가를 빤히 올려다보는 오른편 얼굴에는 의아함과 호기심이 묻어나지만, 왼쪽 얼굴에서는 아래로 살짝 쳐진 시선이 앙상한 볼과 함께 체념과 낙담을 빚어낸다. 

다만, 양쪽팔은 똑같이 어색해서,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에 어울리지않게 몸통 가까이에 붙어 있다. 특히 오른팔은 어깨 선보다 안쪽으로 움츠러져 두려움과 긴장을 품은듯한 느낌을 준다. 미지의 세계로 걸어가는 이의 나아가려는 의지와 그 의지를 꺾으려는 두려움이 온통 뒤섞인 모양새다.  

이렇듯 작품이 드러내는 이야기는 영웅적이거나 신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늘 접하는 심정과 그럼에도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어쩔수 없는 상황에 대한 일기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갖은 실패를 거치며 복잡하게 얽힌 마음을 품은채 한걸음씩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Transition - 내 삶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특히 걸음걸이와 어울리지 않는 양 팔의 부조화를 보면서 떠오른 것은, 수영장 탈의실을 막 나와 풀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한 뒤, 얇은 수영복을 입고 냉랭한 풀 공간으로 막 들어와서 걸어가는 사람들 말이다. 양 팔을 몸통에 거의 붙이다시피 움츠리면서도 두 다리만은 성큼성큼 앞으로 내 뻗는 모습은 수영장에서 매번 보게되는 일상적 풍경이다.  

수영장에 갈때면, 김서린 샤워장 밖의 차디찬 공기를 떠올리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찬공기에 옥죄이지 않도록 으름장이라도 놓아 본다. 그러나 막상 두 팔이 내 몸통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살결위를 달리는 차가움, 매번 새로운 그 차가움에 발꿈치를 땅에 붙이지도 못하고 종종 걸음으로 걷는다. 그 보행끝에 대단한 일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레인의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으로 헤엄치는 일을 반복하기 위해서 찬 공기를 뚫고 걸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수영장으로 매주 나를 내던지는 것은 내 의지지만, 세상에 내던져진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수영장에 들어설때 나를 가려주는 한조각의 수영복조차 없이, 이곳에 나동그라진것이다. 살면 살수록 초라하기 짝이없고 당황스러울 만치 텅 비어있는 삶에 이따금씩 경악을 금치 못한다. 찾아봤자 찾고자 하는 의미란 없을때가 많고, 우연히 기대않은 의미를 발견한 적이 있지만, 거기에 ‘휘발성’이라는 경고문이 붙어있지 않은탓에, 휙 날아가버린 뒤에는 더 큰 허망함이 마음을 덮치는 것이다.  

나와 내가본 많은 사람들은 그게 사랑이든, 우정이든, 정의든, 뭔가를 찾다가, 찾다가 지쳐 주저앉곤 하는데, 이 찾고자 하는 의지의 끈질김은 주저앉고 나서는 기다림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일어나 찾을 수 없다면 주저 앉아 기다려 본다. 바람은 불고, 지구는 돌고, 태양은 타오르고, 파도는 철썩이므로 그들의 숨결에 치여서라도 (우연히) 우리가 찾던 것이 주저않은 이곳으로 밀려올지 누가 아는가.  

흡사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블라디미르)와 고고(에스트라공)의 모습과 같다. 이들은 극문학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으로 - 고도라고 불리는 뭔가를 기다리는데, 그게 사람인지 물건인지 뭔지가 명확치 않으며 언제올지, 오긴올건지, 지금 어디있는지도 알수 없다. 한그루의 앙상한 나무 뿐인 무대에서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고도만을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 이 무대를 디자인한 이가 워킹맨의 작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연극에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에, 그 무대 공간을 직접 만들었던 것이리라.  


친구와 고도가 존재하는지를 두고 대화한 적이 있다. 우리 역시 고도를 기다리는지, 그 이전에 고도가 있다고 믿는지, 내심 고도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미없는 삶이 쪽팔려서 기다리는 척 하는 것은 아닌지. 고도없는 삶의 허망함을  감당할 수 없어서 존재하지도 않는 고도를 하릴없이 기다려 보는 것은 아닌지.  

세상에 던져진 데에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찾던것을 멈출만큼 우리는 용감하거나 현명할까. 오히려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채울 의미 찾기를 멈출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즉, 인간이란 대상의 유무에 상관없이 늘 뭔가를 찾게 되어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목적지가 없어도 그저 걷게 되어있는 존재. 보물이 뭔지 몰라도 일단은 보물 상자를 찾으러 떠나는 존재.  

누군가 자기만의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간다면, 툭 떨어진 세상에서 뭐라도 기다리지 않고는 살수 없기 때문에, 고도가 있든 없든, 그게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기다리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좀더 기운을 차리면 고도를 직접 찾아 나서리라. 찾다가 못찾으면 쓰러져 잠시 낙담하리라. 낙담후엔 또다시 무엇이든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찾고 기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걸어가는 사람이고, 때로는 걷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발목을 다쳐 걸을 수 없다면, 헤엄이라도 치는 사람이고, 헤엄치지 않을때는 헤엄쳐 나아가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적어도 자코메티의 워킹맨은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이렇게 내가 절반을 완성한 워킹맨은 막 샤워장을 나와서 (기대과 체념이 뒤섞인 표정으로) 수영장 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여러분의 워킹맨은 어떤 표정으로, 어디에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지. 그 답을 하릴없이 기다려 본다. 누군가 답을 이어가는 한, 자코메티의 워킹맨은 영원히 살아있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Written by 박진용
suj20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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