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임당동 신라비 壹

잊혀진 비석

by 새긴믈

지금 소개하는 유물은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대 비석이다. 비석은 당대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재론할 여지가 없는 1차 사료로서 역사학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유사한 자료로는 비석과 동류라고 할 수 있는 지석誌石 · 각석刻石 · 인장印章 · 와전瓦塼 등의 금석문金石文이라든지, 나무와 대나무 따위를 가공해 제작한 문서인 목죽간木竹簡 등이 있다. 이런 종류의 기록물에는 정제된 사서에는 없는 당대의 표현이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상의 정체나 사건의 전말 등이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판독한 성과는 당대 기억을 현장감 있게 복원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


이렇게 중요한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 비석만큼은 잘 알려지지 않는데, 그 이유가 뭘까? 일단 기본적으로 비문 마멸이 너무 심하여 내용 파악이 극히 제한적이다. 게다가, 다른 비석들과 달리 발굴조사를 통해 지표면 아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타 출토품과 함께 수장고에 보관되면서 대중들이 접근하기 어려워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비석이 발견되었을 때 언론을 통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특별히 이슈가 되거나 교육자료로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학계의 연구 성과도 거의 없어, 일본 관서대학의 시노하라 히로카타篠原啓方가 최초 판독을 시도한 이후 다른 안이 제시된 바 없다.


임당고비.png 경산 임당동 신라비


학계에서 심도있게 다루지 않으므로, 그것을 지칭하는 특별한 이름도 없다. 비석이 유적에서 출토한 후, 조사자들은 이를 〈고비古碑〉라 불렀으며, 시노하라 히로카타 역시 이를 임당 출토 고비로 지칭하였다. 명문에서 확언할 수 있는 특징적 문구가 없기 떄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석의 일반적인 칭호를 기존의 명칭과 크게 다르지 않게 〈임당고비林堂古碑〉라고 부르고자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의를 위한 명명이며, 정식적으로는 〈경산 임당동 신라비〉라고 불리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경산 임당동에서 출토한 사실이 명백하며, 비문 중 신라의 사로육부를 지칭함이 분명한 명문이 두 군데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문을 검토하면서 이 비석을 대표할 만한 구절이 있다면, 그것으로 이름을 삼아도 좋을 것이다.


임당유적 저습지.png 임당유적의 I지구 저습지와 비석 출토 유구
도로와 배수로 추정 유구 사진.png 임당유적 I지구 도로 및 배수로 추정 유구와 비석 출토 상황


비석이 출토한 임당유적은 경상북도 경산시에 소재하는 대규모 복합유적으로, 분묘 · 주거 · 향소享所 · 토성 · 습지 등 다양한 유구나 흔적이 전근대 전반에 걸쳐 확인되어 기록이 부족한 지방사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특히 습지유적의 경우 수분과 점토가 외부 공기를 차단하여 유기물의 부식을 방지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비석은 바로 이 습지, 즉 저습지유적 인근에서 발견된 도로와 배수로 추정 유구에서 출토하였다. 유구는 저습지 유구의 남쪽에서 남동-북서향을 향해 진행된다. 유구 발견 당시 배수로는 그 형태를 명확히 알 수 있었던 반면, 도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배수로의 부석시설로 규정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적심석건물의 담장이나 도로 등으로 추정되었는데, 담장이라고 보기에는 너비가 과도하게 넓으며 유사한 시기의 담장유구에서 확인되는 흔적들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도로유구로 보기에 수레바퀴흔 등 그것을 확정할 만한 근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수레를 이용하지 않는 보도 관련 시설로 잠정 결론내렸다. 이 유구가 돌을 깔아 만든 보도와 그 가장자리의 배수로가 조합된 도로시설이라면, 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비문 내용을 공지할 목적으로 도로변에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구와 비석의 대응관계가 인정되기 때문에 유구가 조성된 시기는 비석 제작 시기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유구가 조성된 시기는 인근에 위치한 적심석건물지에서 출토한 토기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이들은 서기 5~9세기로 상당히 넓은 시간폭을 가지지만 중심연대는 서기 6세기 초엽에서 7세기 중엽 사이로 한정된다. 그러므로 이 비석 역시 서기 6~7세기 즈음일 가능성이 높다. 비석의 출토 지점이 유구 서쪽 가장자리인데, 이곳은 켜켜이 쌓인 문화층이 어떠한 이유로 교란되어 있었으므로 출토상으로는 이런 식으로 시기를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다음 장에서 서술할 비석이 갖고 있는 형태적 특성을 보면, 서기 6세기 신라비들이 갖고 있는 특성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