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의 형태와 각자
비석은 화강암계 석재로 제작되었으며, 발견 당시 높이 66.7㎝×너비 32.7㎝×두께 6.5~20.2㎝의 규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와 형태적으로 가장 유사한 고대 비석으로는, 〈명활산성작성비〉와 〈남산신성제3비〉가 있다. 전자는 551년에 제작되었으며 높이 65㎝×너비 31㎝, 후자는 591년에 제작되었으며 높이 81㎝×너비 31㎝의 규격을 갖추고 있다. 모두 서기 6세기 비석인 것이다. 이 비석이 출토한 도로와 배수로 추정 유구의 중심 연대가 서기 6~7세기에 비정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비석들과의 연결은 편년에 있어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노하라 히로카타는 비석의 형태를 묘사하면서 앞면의 오른끝은 경계가 분명하지만 왼끝은 불분명하다고 하였다. 사실 실물 사진과 도면을 참고하면 '분명하지 않'을 정도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비석의 전체적인 생김새를 보았을 때 전면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오른쪽과 달리 외쪽은 곡선을 그리며 뒷면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 생각한다. 윗면은 수평선을 의도한 가공이 확인되므로, 비석 제작 당시의 윗면으로 인정된다. 비석의 앞면 가운데에 완전히 평평하게 다듬어진 구간이 상부부터 하부까지 일정한 너비로 존재하는데, 이 부분은 문자가 새겨진 범위와 대응된다.
비석의 전체적인 형태는 위가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아랫면의 너비가 윗면에 비해 1/3 정도이다. 이러한 형태는 동시기 비석들과는 다른 양상이며 비석을 세우기 위한 구조로는 불안정하다. 다만 비문의 아래끝부터 비석의 아래끝까지 길이가 비석 전체 높이의 20%를 상회하는 15㎝이므로, 대략 10㎝가 넘는 부분을 지하에 꽂아 세운 것이라 판단한다면 그리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석의 아래에 여유를 많이 남긴 사례는 역시 서기 6세기의 신라비에서 많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시노하라 히로카타는 이 비석의 상하 너비 차이가 당대 신라비들과 다른 양상이기 때문에, 이 비석의 하부는 파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비석의 전체적 형상을 보면,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점진적으로 얇아지는 경향성이 확인된다. 비석의 옆 단면을 앞면이 수직이 되도록 배치했을 때, 자연스럽게 윗면은 수평을 이루게 된다. 이를 기준으로 옆면과 뒷면이 이루는 선을 보면 파손을 단정할 수 있을 정도의 극단적인 굴곡은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실물을 확인한 것도 아니거니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으므로 이 역시 추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겠다. 다만 땅 속에 묻히는 부분이 현재 남아 있는 15㎝보다 짧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시노하라 히로카타의 견해에는 동의하며, 비석이 실제보다 더 길었거나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의 아래끝이 지상에 노출되는 지점의 아래끝과 대응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비문은 비석의 훼손 여부와 관계 없이 거의 대부분 현재 남아 있는 앞면 안에 새겨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부 닳아 없어지거나 떨어져 나갔을 가능성은 생각된다. 우선 시노하라 히로카타가 판독한 비문은 아래와 같다.
남아 있는 글자를 통해 보았을 때 비문은 4행 13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총 글자 수도 52자 이하일 것으로 생각된다. ㄷ-⑧~⑪ · ㄴ-①~⑤·⑩·⑪ · ㄱ-④·⑤은 시노하라 히노카타의 추독이며, ■는 새겨진 것은 확실하지만 판독할 수 없는 글자이다. 글자의 형태는 자획이 많으면 글자가 커지고 적으면 작아지는 경향을 띠며 행과 열을 엄격하게 맞추지는 않았다. 필체는 해서체와 예서체가 혼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글자 자체가 불규칙하고 조잡하다. 시노하라 히로카타는 이러한 성격을 종합했을 때 비석 제작 실무자가 글자를 쓰거나 새기는 기술이 미숙했기 때문으로 이해하며, 그러한 이유로 글자의 형태만을 가지고 필체를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비석의 형태는 서기 6세기의 여러 신라비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필체는 그것들보다 조잡한 편이다. 이는 이 비석이 서기 6세기에, 비석 제작 혹은 한자 사용에 미숙한 존재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판독 가능한 각자들 중 최상부에 해당하는 글자는 〈㖨〉과 〈壹〉인데, 이들 바로 윗부분이 단을 지며 높아지며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면이다. 즉 〈㖨〉과 〈壹〉이 새겨진 ①열은 실제 비문의 최상단일 가능성이 높다. 비문의 최하부는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ㄴ-⑬에 글자의 존재는 확인되기 때문에, ⑬열에서 끝맺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아래는 편평하게 가공되었지만 의도적으로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 비문의 진행 방향은 여느 한자문화권에서 그러하듯 ①에서 ⑬, ㄹ에서 ㄱ 순이기 때문에 현재 판독 가능한 비문 중 가장 처음 오는 것은 〈日〉이다. 〈日〉 위로는 최소 여섯 글자 정도가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 가능한데, 중고기 신라 비문의 첫 행에 연대가 기록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ㄹ행은 년월일을 표기한 구절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 밑으로 내용이 더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日〉자가 다른 글자들에 비해 유독 작다는 것과 그 아랫면에 글자가 새겨졌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전혀 없기 때문에 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는다.
참고문헌
篠原啓方, 2008, 「경산 임당동 I지구 출토 古碑」, 『慶山 林堂洞 建物址遺蹟』, 영남문화재연구원.
篠原啓方, 2010, 「慶山林堂遺跡出土古碑の内容とその歴史的背景」, 『東アジア文化交渉研究』 3, 関西大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