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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긴믈 May 28. 2020

參. 청동기시대 ㅂ

청동기시대 신성공간의 구성 요소와 경관

신성공간 즉 성소Shrine는 신앙이 공간에 반영된 결과물이다. 일신과 집단의 안녕을 위해 신앙을 갖게 된 인류가 정주를 개시하면서, 신앙의 대상자를 그들이 경영하는 공간에 모시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따로 마련하게 된 것이다. 원시한국문화의 전개 과정에서 신성공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은 청동기시대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이어진 오랜 정주생활로 안정된 물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된 인간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이 되었건 더욱 크고 단단한 집단을 형성하기 원하였고 이에 따라 체계적인 조직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런 체계화는 직역과 계층의 분화를 야기하는데, 여기서 의례는 계층의 최상층에 주어진 직역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마을 경관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청동기시대의 신성공간은 대개 그것을 표상하는 기념물이나 기념물의 흔적, 혹은 공간을 분화한 시설의 흔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기념물로는 암각화와 입석으로 대표되는 거석기념물이나 군집분묘 등이 있으며, 기념물의 흔적은 입대목立大木의 흔적으로 판단되는 높은 지대의 기둥자국이나 신전건축으로 판단되는 독특한 건물지, 혹은 유구 군집 가운데 위치한 빈 터 등이 있다. 공간을 분화한 시설로는 환호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취락의 외연을 두른 방어용 환호가 아니라 협소한 특정 공간을 두른 작은 환호이다. 이 환호를 특별히 환구環溝라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고고자료들로 규정할 수 있는 신성공간은 크게 거석기념물 구축지, 공동묘원, 고지성 제의소, 신성건축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다.


가. 거석기념물 구축지


원시 인류의 대표적인 의례적 기념물로 누구나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거석기념물’일 것이다. 거석기념물이란 말 그대로 거대한 돌로 만든 기념물Monument인데, 기념물이 세워진 주변에서 의례를 거행하거나 망자를 매장하거나 신성성을 부여하는 등의 행위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스톤헨지‧모아이석상‧피라미드 등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석기념물이며 원시 한국에서는 암각화‧입석‧지석묘‧적석총 등이 대표적이다. 보통 암각화라고 하면 암벽에 각화가 새겨진 유적을 떠올리는데, 그 외에도 지석묘와 석실묘의 개석이나 입석 등에 그림이 새겨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 논하는 암각화는 전자의 것만을 이르며, 나머지는 각각 지석묘와 입석으로 따로 논한다.


암각화에 새겨진 물상은 사실적인 것과 도식적인 것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 울산 반구대‧울산 천전리 등이, 후자의 경우 남원 대곡리‧영주 가흥동‧고령 양전동‧고령 안화리‧영천 보성리‧영일 칠포리‧경주 석장동‧경주 상신리‧울산 천전리 등이 있다. 사실적 물상은 공감주술을 의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즉 원하는 결과물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실현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도식적 물상은 정확히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모르지만 대개 태양‧광명‧샤먼‧인면 등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암각화유적들은 입지에 있어 관통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물과 인접해 있으면서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곳에 격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이 공통된다는 것은 곧 암각화 제작 집단들 간에 입지에 있어 상호 공감하는 관념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즉 암각화 제작 주체들이 의례에 있어 같은 아비투스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암각화의 여러 물상


입석은 탑처럼 높게 솟은 돌을 일컬으며 그 형태로 인해 남근숭배사상과 관련된 기념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단독으로 세워지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열을 지어 세워지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제단이나 제의대상으로, 후자는 생활공간의 안팎을 나누는 상징적 경계로 해석되기도 한다. 입석이 갖고 있던 신성성은 조선시대 이후까지도 지속되어 기자신앙의 대상물이나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대구 진천동 입석의 경우 장방형 석축 위에 세워져 있고 그 주변으로 동시기 묘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와 더불어 돌 상부에 동심원이 새겨져 있고 개천 근처에 입지한다는 점이 앞서 언급한 암각화와 궤를 같이 하므로 제단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입석


나. 공동묘원


기실 공동묘원은 석기시대 때부터 존재했지만, 이것이 마을의 주요 경관요소로서 본격적으로 집단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은 동기시대 이후이다. 특히 동기시대의 마을 경관에 있어 지석묘군집의 존재감은 상당한데, 지상에 구축된 거석기념물의 군집은 환호나 개천과 같은 마을 경계지역에 조성되어 마을을 표상하는 지표가 된다. 이 시기 사람들의 경계의식과 매장공간 조성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현상이 한반도 내 동기시대 취락에서 꽤 다수 확인된다는 것은, 분명히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천 이금동 취락과 공주 산의리 묘원


진주 평거동유적과 사천 이금동유적은 동기시대 취락의 공동묘원이 갖고 있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취락 외곽을 지나는 하천의 자연제방을 따라 묘역이 넓게 형성되어 있는데, 이 공간의 전면에 유물이 산포하고 대형 고상가옥이 축조되었다. 이것은 묘원 공간을 대상으로 하여 의례가 있었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고상가옥은 창고보다는 신전 혹은 종묘의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묘원 공간 내에 제의와 관련된 시설을 설치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구 진천동의 입석형 제단 추정 시설에서도 확인된다. 공주 산의리의 묘원은 중앙에 공터를 두고 동심원을 그리면서 분묘가 축조되어 있는데, 중앙 공터에는 큰 바위가 놓여 있다. 바위 하부로 무덤시설이 없기 때문에 부천 고강동이나 안성 반제리유적의 그것과 같은 제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 고지성 제의소


고지성高地性 제의소란 말 그대로 높은 곳에 위치한 제의 공간을 의미한다. 대부분 별다른 유구는 없지만 환호나 적석으로 협소한 특정 공간이 구획되어 있거나, 솟대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입목立木이 세워졌거나, 의례와 관련된 유물들이 산포해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지성이니만큼 산이나 언덕의 정상부, 혹은 그에 근접한 사면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개 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 전기 사이에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서 거행된 의례는 대부분 하늘天神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근방에 바다가 있는 경우 항해 및 어로와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상정된다.


부천 고강동‧안성 반제리‧평택 용이동‧구리 교문동‧화성 쌍송리‧화성 동학산‧수원 율전동‧오산 가장동‧고창 죽림리‧보령 명천동‧함평 백호리‧경산 임당동‧경주 탑동‧경주 화천리‧울산 연암동에서는 고지에 작은 공간을 구획한 환호가 확인되었다. 대개 환호란 주거지 군집으로 이루어진 취락을 감싸는 방어시설로 생각되기 마련인데, 이 환호유적의 경우는 내부에 수혈이나 바위, 적석시설 외에는 어떠한 유구도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좁은 공간을 구획하고 있어 취락을 상정하기 어렵다. 이 내부에서 발견되는 수혈은 의례와 관련된 유물을 매납하거나 입목을 세웠던 흔적으로 생각되며, 바위와 적석시설은 제단을 연상케 한다.


고지성 환호유적


이 공간 내에서 출토된 유물들 역시 의례행위를 시사하는 것들이다. 제기로 이용되었을 두와 적‧흑색마연토기, 제의를 담당한 권력자가 사용하였을 동검이나 다두석부를 비롯하여 각종 석기와 동기, 토기 등이 그것이다. 출토한 환호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듯, 공간이 매우 협소하기 때문에 의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성소 안에 자리할 수 인원은 매우 제한적이다. 자연스럽게 의례 과정을 유추했을 때 환호 내부에 배치할 수 있는 인물은 제사장을 비롯한 의례 관계자일 것이며, 환호 밖에 배치된 인물들과 계서관계에 있어 표상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홍성 석택리‧강릉 방동리‧순천 덕암동‧합천 영창리‧창원 남산에서도 앞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양상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의례 공간을 감싸는 환호가 따로 없지만, 환호취락 내에서 가장 정상부에 공터가 마련되어 있다. 인근 지역에 환호를 갖추지 못한 취락이 있음을 감안했을 때, 이 지점의 취락은 광장을 갖춘 중심취락으로 인근의 집단 제의를 주도적으로 진행했으리라 판단된다. 특히 합천 영창리의 경우 광장 내 수혈에서 동검이 바닥에 꽂힌 채 출토된 것을 보았을 때, 분명히 의례와 관련된 행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유적들은 취락 내부, 혹은 인근의 특정 공간을 장기 점유하며 거주민들로 하여금 분명히 성소로 인지되던 장소였다. 그러나 이와 달리 특수 목적을 띠고 한시적으로 제의의 공간이 마련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경우 거행되는 제의는 대개 다량의 청동기를 땅 속에 매립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천 일출동‧평양 서포동‧개성 해평리‧완주 상림리‧산청 백운리‧대전 문화동‧영암 신연리‧고흥 소록도‧마산 가포동‧삼천포 마도동‧성주 초전면‧김천 송죽리‧대구 만촌동‧청도 예전동‧합천 임북리‧합천 영창리‧남해 소초도‧제주 건입동 등 다양한 곳에서 확인된다. 그 시기 역시 이르면 동기시대 중기부터 철기시대 중기 이후까지 다양한 지점에서 확인되며, 일본에서도 상당수 확인된다.


고지성 제의소의 여러 형태(좌상: 고창 죽림리; 좌하: 순천 덕암동; 우: 보령 명천동)


매납지의 입지를 보았을 때 모두 산 정상부나 깊은 지점의 사면, 능선 등에 위치하며 대개 인근 평야나 바다가 조망되는 곳에 위치한다. 생활공간과 비교한다면 대개 취락 외곽에 위치하며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대에 있는 것이다. 매납되는 청동기들은 대부분 자연 암반이나 바위, 돌무더기에 꽂혀있거나 자갈무더기에 매립되어 있고 수혈에서 확인되는 경우도 발견되는데 그 조합이 일부 거울과 화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검을 위시한 병구류이다. 매납이 일시에 이루어지고 그친다는 점은 동기 매납 의례가 한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며, 매납 장소나 유물을 보았을 때 정기적으로 거행되었을 종교적 의례와는 성격이 판이함을 알 수 있다. 아마 군사軍事와 관련된 일회적 사건, 말하자면 침략이나 방어를 앞두고 거행한 일회성 의례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찌되었건 집단이 긴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다량의 동기를 활용할 수 있는 권력자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특별 의례라는 점은 분명하다.


라. 신전건축


앞서 언급한 신성공간은 모두 노천에 마련된 것이지만, 취락 내부에 있을 경우 중에는 건물을 축조하여 공간을 마련하는 사례도 왕왕 확인된다. 부여 송국리(54지구)‧공주 신영리‧보령 관창리‧청도 진라리‧사천 이금동 등지에서 확인되는데 모두 고상건물의 형태를 띠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대부분의 고상건물은 창고로 판단되지만, 야요이시대 이후 일본의 사례를 보았을 때 신성건축 즉 신전을 목적으로 축조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보령 관창리 B지구 E군에 건설되었던 고상건물은 평면 7각을 띠고 있어 일반 창고로 보기 어렵다. 이러한 형태의 건물은 이후 삼국시대에도 탑이나 제의소 등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신전건축의 여러 형태


그 외 유적의 고상건물은 평면 장방형을 띠는데, 그 규모가 일반 창고건물에 비해 두드러지게 크다. 부산 기장의 청강‧대라리유적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취락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신전이 확인되었으므로, 이러한 형태의 신전건축 역시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옆으로 긴 육각형을 띤 고상건물도 확인되었다. 보령 관창리와 공주 신영리에서 확인된 이 고상건물은 얼핏 평면 장방형을 띠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 옆에 기둥을 하나 더 박아서 독특한 형태를 구현한다. 이러한 건물들은 제의소 혹은 회의소로 쓰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특정 인물만이 출입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환호공간들과 마찬가지로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신성공간 안에 있는 존재와 밖에 있는 존재는 구분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사회적 분화와 자연스럽게 연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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