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8일의 심정
... 음악 인생이라 하니까 뭐 음악가의 그것인가 싶지만...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음악을 즐겨 소비하던 평범한 인생들 중 하나.
지난 몇 년 간 윤종신의 노래에 미쳐 살았다. 삶이 매우 우울했던 그 날들, 윤종신 발라드 그 특유의 감성은 내 멜랑꼴리를 위로해주었다. 특히 「나이」라는 노래를 가장 좋아해서 많이 듣고 부르고 했었다. 그때는 노래방에 가면 친구들이 윤종신처럼 부른다고 할 정도로 거의 덕후처럼 좋아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윤종신을 거의 듣지 않았다. 그의 멜랑꼴리에 동조하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노래 취향이 아마 2020년 서른을 기점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나이」를 들을 일이 있었다. 찾아 들은 건 아니고, 운전 중에 알고리즘을 타고 재생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전주가 채 끝나기도 전에 노래를 꺼버렸다.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다. 전주의 일렉트로닉 기타 선율이 너무 무거웠다. 뭐라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현을 뜯어 내는 소리소리마다 마음을 쥐어 뜯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즐겨 들었지? 저 무겁고 괴로운 노래를 어떻게 견뎠지? 마음이 달라지면서 노래에 대한 감상도 확 달라진 것 같다. 아마 내가 한창 힘들고 우울했던 때에는 이 노래가 이렇게 아픈지 몰랐던 거겠지. 내가 더 아팠으니까.
이 경험에 대하여 어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문득 나의 인생은 내가 좋아했던 가수로써 단계 설정이 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오늘의 일기는 이 잡상을 정리하는 것으로 갈음해보고자 한다.
먼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 2006 : 발라드 단계, ~중학교 3학년
2007 ~ 2010년 : 뉴에이지 단계, 고등학교~대학교 1학년
2011 ~ 2012년 : 자우림 단계, 군 복무
2013 ~ 2019년 : 윤종신 단계, 대학교 2학년~대학원
2020 ~ : 루시 단계, 현재
1. 발라드 단계
초등·중학생 때에 내 평생 음악 취향의 기반이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조성모, 성시경 등 조금은 차분하고 우울한 발라드를 즐겨 들었다. 이 시기에 가장 각인된 작품은 「The Lost Empire」이다. 사극 명성황후의 OST 음반. 여기 노래들은 군 복무 중에도 즐겨들었던 것 같다. 조수미를 비롯한 다양한 버전의 「나 가거든」이 있었고(여기서 조수미와 양파 버전을 가장 좋아했다.) 이수영의 「나를 지켜주세요」,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 등 좋아하는 노래들이 수두룩했다. 「Adoremus Te Jesu Christe」 같은 종교색 물씬한 노래는 뉴에이지 단계 때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있다.
노래도 노래지만, 이 음반을 떠올리면 가족이라는 키워드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리 생생하지 않다.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들이 즐겁게 떠드는 추억들에 입을 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가족들과의 일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전축에 이 음반을 올려놓고 함께 노래를 감상한 기억만은 감정까지 강렬히 남아 있다. 그때 전인권의 노래가 나올 때마다 동생이 울어 재미있어 했던 에피소드도 생생하다. 그 여름 밤의 추억.
2. 뉴에이지 단계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현실에 발 못 붙이고 부유했던 것 같다. 친구들이랑 활발히 어울렸던 것도 아니고,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고, 그 외 인생의 다른 부분에 열중했던 것도 아니다. 추억도 별로 없고 뭔가... 나사 빼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이다. 당시 뉴에이지 장르가 유행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엄밀히 말해 뉴에이지라기보다는 그냥 잔잔한 연주곡이랄까? 그냥 뉴에이지라는 키워드가 강렬히 남아 이미지화된 것일 뿐 본 의미의 뉴에이지 범주라고 보기는 어렵다. 뉴에이지를 표방했던 음악들 중에서는 이루마나 유키 구라모토, 히사이시 조 등의 작품을 찾아 들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노래를 접했다. 에스닉 퓨전 밴드 두번째달이나 가야금 연주자 이슬기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이슬기의 「Happiness」가 KTX의 안내 방송 음악으로 흘러나왔을 때 기분이 좀 묘했다.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The Lost Empire」 음반을 다시 찾아 듣기도 했다. 팝페라 장르도 굉장히 좋아했다. 키메라와 임형주, 마리아, 정세훈, 결(지금은 카이), 엘리나(지금은 엘리케이) 등 많은 가수를 좋아했다. 특히 임형주의 「하월가」, 「풍운애가」, 마리아의 「마론인형」, 「위대한 여정」, 「사랑동화」, 「Lunatique」, 「I pray for you」, 결의 「월하연」, 엘리나의 「sogno」 등의 노래를 즐겨들었다.
써놓고 돌이켜보니 당시 나는 정통의 기반 위에 변화가 가미된 작품을 좋아했나보다. 퓨전은 당시 트렌드이기도 했으니, 시대의 조류에 잘 녹아들었던 게 아닐까?
3. 자우림 단계
군인 새긴믈은 뭔가 불만이 가득하고 이것저것 개혁하고 싶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나 좀 잘 할 것이지. 성리학에서 말하는 수신재가치국평천하의 기본 원리만 좀 잘 지켰더라도 후회는 덜 했을 것 같다. 당시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나와 군 복무를 함께 해준 전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강하다.
당시 자우림은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에 나와 유명세를 타던 와중이었다. 고등학생 때 체리필터의 「달빛소년」, 「여신의 나무」와 함께 자우림의 「행복한 왕자」를 참 좋아했는데, 모두 묘한 처연함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였다. 고등학생 때는 체리필터의 처절함에 조금 더 눈길이 갔지만, 자우림의 「음모론」 음반을 접한 뒤에는 그들이 던지는 물음표와 느낌표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들의 의뭉스러움이 좋았고, 붉은 열정과 푸른 우울의 공존을 닮고 싶었다. 그만큼 내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것이 아닐까? 내 안의 그라데이션을 그렇게 붉음과 푸름으로 극명히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그렇지 못하다면 어여쁜 보랏빛으로 조화되기를 바랐다. 결국 거무죽죽하게 오염되고 낡은 국방색이 되었지만.
이 시기 이후로 김윤아는 나의 아프로디테가 되었다.
아,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곡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들었다. 그 종잡을 수 없는 리듬과 스캣은 어지러운 내 마음에 잘 녹아들었다. 뭐랄까 형언하기는 어려운데, 그냥 그런 분위기의 노래들을 좋아했다. 전에도, 그때도, 지금도.
4. 윤종신 단계
대학 복학 이후 박사 수료 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아픈 시간이었다. 가장 치열하게 살았고,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얼마 전 루시가 발표한 신보 「열」은 나의 윤종신 단계를 위로해주는 음반일 것이다. 사람들과 가장 많이 어울리면서도 가장 외로웠고, 번아웃도 왔고, 미완의 사랑도 해봤다. 상처를 많이 받았으며, 그만큼 많이 주기도 했다. 사회인으로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그 기초를 배웠던 시기이다.
윤종신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던 그 순간은 아직도 깊게 각인되어 있다. 아마 말년이었거나 거의 최고 고참이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소대 사람들에게 외면 받던 존재였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할 수 없겠지만, 나만의 생각을 강요하고 예민함으로 날카롭게 굴다가 고립되었다. 외로운 나날을 그저 버티고 버텼던 것 같다. 휴가를 나갔다가 복귀해서 아무도 반기지 않는 내무반에 들어섰을 때, 티비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윤종신의 「도착」이었다. 박정현의 구슬픈 목소리와 낯선 발음으로 읊조리는 그 가사.
"잘 도착했어.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아."
지금도 돌이켜보면 너무 아픈 순간이다. 내가 받은 상처도 크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나는 여전히 괴롭다. 그들이 나를 모두 잊었으면 좋겠다. 제대 후 복학해서도 나는 그때의 버릇을 다 고치지 못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지금도 그러려나. 나를 고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했고,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불안하다. 또, 그래서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한다. 6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꽤 아픈 마음의 성장통을 겪었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글의 서두에 언급한 그 이야기들. 전술한 바와 같이 지금은 차마 즐기지 못하는 그 노래들. 그래도 내게는 소중한 노래들이다. 내 미개의 시대를 지탱해주었던.
5. 루시 단계
지치고 해져 넝마가 된 나를 위로하고 추스리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깜냥 없는 완벽주의자로 살며 망쳐버린 모든 것들이 그저 혐오스러웠던 나날들을 지나쳐가고 있다. 아직 자기 혐오를 모두 벗어내지 못하였다. 오히려 자기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그래도 그런 나까지 나이니까. 나라는 사람을 점점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또 끝까지 부정하는 양가감정의 시기. 그래도 뭔가 좋아지고 있기는 한 게 아닐까.
MBTI 검사가 한창 유행일 때 여러 차례 해봤는데, 하나같이 INFJ란다. 왠지 '너는 원래 그런 놈이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루시의 프론트맨인 최상엽은 그런 이유에서 MBTI를 밝히지 않는다는데, 나는 오히려 그러한 규정됨이 주는 포근함을 느낀다. 그저 이상한 놈이 아니라 그냥 그 범주에 있는 놈인 편이 뭔가 더 안심이 된다. 나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녀석이 자꾸 남의 눈치나 보고, 남이 만든 범주에 들어가려 하고 해서 되겠나 싶지만은... 뭐 어쩌라고.
2020년에 데뷔한 루시의 노래는 대부분이 걸레짝이 된 나의 마음을 다독이고 두드려 빨아주고 따뜻하게 널어준다. 조금 덜 빛나도 별은 별이란다. 고통 속에서 피워내고 살아낸 이들, 너의 미소가 의미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쉽게 망치고 막혀도 너는 빛이 난단다. 니들 생각으로 재단하며 발목잡지 말고, 빛나게 될 우리를 지켜나 보라고 대신 화를 내준다. 참으로 고마운 밴드이다. 내가 좋아하는 처연함, 그리움, 청량함 등의 갖가지 푸른 감성과 지금 나에게 필요한 열정, 진취, 따뜻한 위로 등의 붉은 감성을 모두 갖춘 밴드가 아닐까.
루시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가. 2018년쯤? 내 우울감이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 앳된 소년이 바이올린으로 「인생의 회전목마」와 「Smooth Criminal」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 시작이다. 속주도 놀라웠지만, 동심을 자극하는 구슬픈 선율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것들은 쉬이 지나치지 못한다. 알고보니 그 소년은 나와 고작 한 살 차이나는 신예찬이었고, 당시에는 가능동 밴드의 멤버였다. 훌륭한 기량을 가진 또래라는 사실에 관심과 부러움을 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무언가 좋아할만한 사람에 몰두할 수 없었다. 관심의 표현은 그냥 영상만 종종 찾아 보는 정도로 그칠 뿐이었다. 나와 다른 세계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같은 성별, 같은 나이대의 누군가를 좋아하고 찾아보는 것은 자존감이 꽤 받쳐줘야 유지할 수 있는 취미이다. 하여 나는 지금도 덕질을 통해 자아 실현을 한다거나 자기 개발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내가 나의 감정에 짓눌려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때, 그 우울의 무게가 최대치였던 2019년에 신예찬은 「슈퍼밴드」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더니 결국 밴드 루시로서 준우승을 차지했더라. 그와 가능동 밴드가 「슈퍼밴드」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고, 차마 그 프로를 보지는 못했으나 그가 꽤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기사를 통해 좇고 있었다. 그들이 윤종신의 미스틱 스토리에 들어가고(대부분의 왈왈이들은 미막대기라고 부르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정식 데뷔를 하는 과정까지 죽 지켜봤다. 멀리서 곁눈질로.
그들이 데뷔한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일들을 쳐내기에 바빴고, 곁에 둘 수 없는 무언가에게 일방적으로 감정을 쏟는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관심을 행동으로 취하기 시작한 건 2022년 즈음인 것 같다. 이제는 좋아하는 마음을 비행기로 접어 휘휘 날릴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갖게 된 것 같다. 더불어 혼자 궁상떠느라 놓쳐버린 공연들에 대한 아쉬움까지...
앞으로 그들의 행보가 기대되고, 그만큼 나의 회복도 기대해본다. 올해부터는 앨범도 사모으기 시작했고 콘서트도 적극적으로 다니고 있다. 내가 내 의지에 따라 가는 최초이자 유일한 음악 공연이 루시의 콘서트이니... 이 열렬한 마음이 꽤 오래 갈 것 같다. 이제 동경할 사람을 직시할 수 있는 마음 정도는 갖춘 것 같다. 공연이 끝나거나 그들의 영상을 보고난 후 이유를 알 수 없는 먹먹한 감정이 해일처럼 한꺼번에 밀려들기도 하는데, 견딜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