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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Jul 22. 2024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서평

진화는 진화만의 잣대가 있다.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 는 진화생물학를 다룬 교양서적이다. 이 책에 대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사람들이 '진화'라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부터 짚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바로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을 읽을 이유를 보여줄 것이다.


 누군지 밝히지는 않겠다. 어쩌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중 한 명이 “리처드 도킨스 유전자절대주의자 아니야?”라고 말했는데, 필자는 막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무엇인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예가 바로 『이기적 유전자』였던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책 말미에서 저 둘을 엄격히 구분해야하며 유전자가 이기적이라고 인간이 이기적일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저 말이 리처드 도킨스가 자신의 책을 통해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기도 했다. 저자가 상기의 발언을 책 마지막에 써 넣은 것은 분명 의도적이다. 그 사람은 아닌데……, 분명 아닐텐데라는 말을 연신 반복하더니 유튜브를 한 번 더 찾아봐야겠다고 했다. -필자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분명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보았을 텐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선 유튜브로 책을 찾아보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이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점이다. 이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진화론을 오해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 중 하나다.


 물론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에 대한 혼동만이 진화론을 오해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의 저자 앤디 돕슨은 자신을 포함한 과학자들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고 성찰한다. 가령 많은 과학자들은 “기린은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먹기 위해 긴 목을 가지도록 진화했다.”라는 식으로 글을 작성하곤 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무척 경제적이지만 진화라는 과학적 현상에 대해 거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위의 문장은 지극히 목적론적이다. 마치 '진화'라는 현상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자연적 현상, 특히 진화는 -과학의 시각에서는- 지극히 우연적이다. 진화는 무작위적으로 나타난 돌연변이가 우연히 주의 환경에 생존하기 유리하여 많은 번식을 하고, 그에 따라 종에 대대적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작위'와 '우연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생물이 어떠한 목적이나 의지가 작용하는 것처럼 진화를 생각한다. 물론 최근엔 후성유전학의 발달로 생물의 후천적인 경험이 유전자 발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지만 위의 목적론적인 진화관과는 연관이 없다. 앤디 돕슨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오래 전부터 인류 지성사에 뿌리내려있던 목적론적 자연관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고 추측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공교육, 즉 정부와 정치인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거에는 진화론이 교과서의 마지막 챕터에서 나왔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전부 떼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걸 상기해보면, 결국 진화론에 대해서는 배우더라도 아주 대강 배우고 넘어가게 된다. 필자 역시 진화론에 대해 충분히 배우진 못했다. 적자생존, 용불용설, 자연선택 같은 단어를 듣기야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미국에선 교회의 입김에 의해 창조진화론이 공교육에 편입되었던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이 어떤 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말이다. 필자가 이토록 긴 사설을 펼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즉, 이것이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를 읽어야할 이유다.


 우선 책의 장점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우선 저자가 진화생물학 전공자이다. -필자가 들은 얘기에 따르면- 생물학 교양 서적의 다수가 의사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의학 역시 생물학과 큰 연관관계가 있고, 그들이 하는 말도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생물학적 지식에 관해서는 의대출신보단 생물학과 출신에게 더 신뢰감이 생길 수 밖에 없음은 사실이다. 또 구성이 세련되고 속도감 있게 많은 동물들을 예를 들며 저자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전달한다. 즉 과학책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무척 재밌다.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표현이지만 말이다. 책 뒤에 참고문헌이 기록되어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의 원제는 『Flaws of Nature』이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이 책은 자연의 결함들, 그 중에서도 생물의 진화에 있어 자연의 결함들을 들춰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저자가 이러한 작업에 착수한 이유는 그를 통해, '자연적인 것'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돌파하는 것이다. 이는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의 구별과도 관련되는 일이다. 특히 화장품이나 세제, 조미료 따위를 자연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흔한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독과 약도 애시당초 자연에서 온다. 앤디 돕슨은 자신이 연구를 위해 나가있던 지역에서 한 원주민이 자신에게 물고기를 잡아 대접해준 이야기를 한다. 그 원주민은 어디선가 식물을 뜯어와 물에 풀었더니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 이렇듯 자연 역시 무척 위력적이며 자기파괴적이기도 하다.


 자연 중에서도 진화의 자연파괴적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는 여럿 있다. 그런 사례 중 하나가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체에 기생하여서만 생존할 수 있다. 생명학에서는 적응도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말해 자손을 얼마나 많이 만드냐로 생물체가 환경에 얼마나 적합한지를 따지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많은 자손을 만들어내면 적응도가 높은 것, 반대면 적응도가 낮은 것이다. 몇몇 종들은 적응도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인해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기본적으로 치사율이 너무 낮을 경우 나약해진다. 그러한 바이러스들은 면역체계에 의해 쉽게 쓰러지곤 한다. 즉 치사율이 어느 정도 높은 바이러스여야 최소한의 생존을 하고 스스로를 복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사율이 너무 올라가버리면 해당 돌연변이는 오래지 않아 멸종해버린다. 자신들이 전염되기 전에 숙주를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기생은 바이러스나 그에 준하는 작은 생물들만이 행하는 일이 아니다. (애시당초 바이러스를 '동물'로 취급하는 게 애매한 일이기도 하고) 충분히 거대하다고 할 수 있는 조류들도 다른 종에 기생하는 경우가 있다. 탁란을 하는 종들은 기생조라고 불리는데, 우리에겐 뻐꾸기라는 이름으로 특히 친숙하다. 탁란은 새들 특유의 본능에 의해 작동할 수 있는 번식방법이다. 새들은 각인효과 혹은 그에 준하는 -둥지에 있으면 반드시 보호한다던가, 둥지 근처로 오는 생물은 반드시 공격한다던가- 본능이나 유전자적 차원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눈에는 이는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왜 탁란에 당해주는 것일까? 기생조 중에는 다른 새의 알과 거의 엇비슷한 생김새의 알을 낳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확연히 구별될 정도다. 또 탁란은 비도덕적으로도 보인다. 뻐꾸기는 자신의 새끼를 낳은 책임을 일절 지지 않고 다른 새한테 떠맡기는 셈이니까 하지만 이 두 관점 모두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생물학자들은 탁란을 하는 새들이 그렇지 않은 새보다 더 위험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위험이란 번식에 있어서의 위험이다. 탁란을 당하는 새들은 뻐꾸기의 알을 알아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그 새들은 알을 깨버리거나 둥지를 통째로 버려버린다. 알에서 뻐꾸기가 태어난다고 마음을 편히 가질 수는 없다. 새끼 뻐꾸기를 내쫓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내쫓긴 새끼 뻐꾸기는 보통 오래지 않아 죽는다. 이런 경우 뻐꾸기의 적응도는 0이 된다. 번식에서 개인에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새끼를 얻되 자신은 키우는 노력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탁란이랑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인 번식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앞에서 언급한 각인효과 그에 준하는 것들을 지니고 있는 게 적응도를 높이는데 더 유리할 거라는 과학자들의 지적도 있다. 즉 유전자적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탁란을 당해주고 있는 셈이다.


 탁란과 같이 적응도를 높이기 위해 비도덕적인 행위를 보이는 사례는 더 많다. 새끼를 살해하는 행위는 자연에서 많다. 이 경우는 보통 새끼를 여러 마리 키우기 애는 너무 벅찬 상황에서 벌어진다. 부모 개체는 비교적 건강하게 태어난 새끼를 남기고 나머지를 죽인다. 새끼 하나에 집중해서 살릴까 말까라면, 정말로 한 명만 남기는 일이 적응도를 높이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어떤 개체가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대표적 사례를 또 뽑아보라면 고래가 그 중 첫째로 언급되지 않을까? 고래는 뭍으로 올라왔던 포유류가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 경우에 속한다. 그런데 대체 왜 이들은 아가미가 없어서 매번 물 위로 올라가 숨을 쉬는 번거로운 작업을 행하는 걸까? 차라리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진화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들이 바다에서 생활한지 족히 수천만년은 되었을 텐데 말이다. 앤디 돕슨을 일단 진화란 이전의 영향에서 갑자기 벗어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고래가 본래 폐로 숨쉬는 포유류 였으니 여기서 갑자기 폐가 퇴화되고 아가미가 생기긴 어렵다. 또 물 속의 산소농도는 물 밖의 3분의 1정도 뿐이 되지 않는다. 만약 아가미가 있다하더라도 산소를 확보하는데 있어서는 더 비효율적이다. 차라리 고래는 산소를 저장하는 기관을 더 키운다거나, 덩치를 키우는 등 다른 곳에 투자되는게 적응도에 더 이로웠으리라.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을 섣불리 이해하긴 무척 어렵다. 진화의 경우엔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돌연변이 자체는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며, 우연히 당시의 환경과 맞아떨어져 생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진화를 오독하곤 한다. 진화의 결과 오히려 죽어버리는 바이러스, 물에 사는 주제에 물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 고래, 탁란을 당해주는 새들은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또 동물들이 벌이는 자식살해나 탁란은 비도덕적으로 보이며, 이런 사례에 진심으로 분노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아니면 새들의 멍청함에 아연해하거나 연민을 느끼거나. 확실한 건 이런 관점 모두 자연을 이해하기에 좋은 방식은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 진화는 우연 그 자체다. 여기엔 합리니 윤리니 같은 요소들이 개입할 틈이 없다. 이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자연적이다'라는 수식어가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건 잘못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자연적이라고 홍보되는 제품들이 정말 몸에도 좋고 환경에도 좋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정말로 그런 경우는 존재한다. 하지만 만약 자연적인 게 옳다면, 우리는 새끼살해도 옳다고 말해야 하며 탁란도 옳다고 말해야 한다. 당신은 그럴 수 있는가? 당연히 이 문단에서 옳다는 가치 판단으로서의 옳다에 해당한다.


 결국 앤디 돕슨 역시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의 구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같다고 필자는 느꼈다. 특히 오늘 날에는 존재 자체를 도덕적으로 용인되는 것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아도르노가 과학과 실증주의가 인류에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말했듯이) 일부일처제에서 바람을 피는 것은 적응도를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다. 그리고 바람을 당한 사람이 간통한 두 남녀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키워준다면 그것은 최고의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비도덕중에서도 비도덕이다. 하지만 생물체들은, 또 유전자들은 이런 가치나 윤리를 따지지 않는다.


또 탁란을 당해주는 새들이 정말 멍청하다고 볼 수 있을까? 적어도 그들은 기생조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적응도를 높일 수 있는데 말이다. 고래라는 종은 정말 비합리자체일까? 그렇다면 수천만년이 넘는 기간 동안 생존할 순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의 잣대로 자연을 판단하기는 너무 편파적이다.

  인간은 나약한 생물체다. 치타처럼 빠르지도 않고, 고래처럼 천적을 없앨 만큼 거대하지도 않다. 자외선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줄 비늘도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능이 있다.또 그 지능을 통해 자연을 '극복'하면서 생존해왔다. 우리는 진화를 하지 않고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타고났다. 그러니 진화가 완벽하지 않고 목적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류의 생존은 협동과 지능, 직립보행 따위를 유전적으로 성취해서 얻어진 것이지만, 그것만이 우리의 존속을 설명해줄 순 없다. 인류를 존속시킨 또 하나의 무기는 가치와 윤리였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자연이나 유전적 본능을 무조건 긍정적인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가 앤디 돕슨이 가장 타파하고 싶어했던 자연에 대한 오해이자 사고관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오류를 최대한 피하고 싶어했다. 그 오류 중에서 가장 피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마 진화론을 목적론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이었을 성싶다. 저자는 자신이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책에 오류가 있다면 그건 자신의 책임이라고 덤덤히, 또 겸손하게 말한다. 물론 대중교양서적이니 만큼 어느정도 축약되고 편의적인 문장이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해가 될만한 서술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 이 책이 우리에게 진화론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도와줄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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