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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Oct 30.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해석

어른과 아이의 변증법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하 그대들 』)테마와 컨셉의 측면에서 델 토로의 판의 미로와 비슷하다. 둘 다 전쟁의 참혹함을 아이의 시선을 통해 동화적으로 풀어간 영화다. 둘을 비교해 가며 읽는 것도 작품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가 난해하다는 후기가 많던데 하야오의 작품을 자주 접한 사람들에겐 이해가 어렵진 않을 것이다. 하야오는 반전주의/생태주의적 작품을 주로 만들어왔다.  『그대들 』 역시 테마를 충실히 따른다.




 불의 세계와 물의 세계


 하야오가 자주 사용하는 메타포가 있다. 불과 쇠를 폭력, 전쟁등의 상징물로 사용한다. 반대로 물은 평화나 모성애, 이상향, 자연등의 상징물로 애용한다. 그대들에선 이 메타포들이 더욱 확장된다.


 작품의 주인공인 마토는 불로 인해, 즉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는다. 그리고 자신 역시 화마의 습격을 받는 악몽을 꾼다.


 이세계는 바다의 세계라고 주인공의 입을 통해 언급된다. 파시즘 이태리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앵무들은 대장간을 점령하고 식칼등의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잡아간다. 그리고 불로 요리하려한다. 마토의 아버지는 전투기공장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구하기 위한 채비를 할 때 가장 먼저 챙기는 물건은 검이다.  중에서고 일본도. 그가 가부장적인 인물임을 고려해 보면 이는 일본의 제국주의자와 직간접적으로 그에 협력했던 어른들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불에 의해 희생된 히도 이런 비판에선 벗어갈 수 없다. 그는 불을 이용해 알라알라들을 잡아먹는 펠리컨들을 몰아낸다. 하지만 그 불로 인해 몇몇의 와라와라들도 희생당한다. 마토는 이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을 가진다. 하지만 조력자인 키리도 이에 의한 비판의식을 가지지 못한다. 그녀가 불의 세계와 물의 세계의 중간쯤에 위치한 인물이지만, 본질적으론 어른 중 한 명일 뿐이다.


 하지만 펠리컨도 결국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알라알라를 피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자 물의 세계다. 하지만 히마와 키리코는 불을 통해 이들을 몰아낸다. 즉 불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지배하려는 것이다 키리코는 동시에 바람과 물을 거스르지 않으며 세계를 유랑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불과 물 사이에 위치한 인물인 까닭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며, 이세계에서 주인공의 첫 번째 조력자가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인 마토는 죽은 펠리컨을 위해 무덤을 만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필자는 마히토가 불의 세계에서 벗어난 게 이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왜가리를 공격하기 위해 불을 이용해야 필 수 있는 담배를 하인에게 뇌물로 주며 칼과 죽도, 화살등의 무기를 만들고 이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불의 세계'에 산다면 그것이 아이라도 원하든 원치 안 든 그러한 세계 속에 속해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는 히미를 통해 나타나는 불의 문제-자연을 거스르며, 정작 지키려는 와라와라를 희생시키는 모습-을 보고, 죽어가는 펠리컨의 말을 통해 물의 세계에 내재된 법칙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배신하고 공격했던 왜가리와 친구가 되는 것도 아마 이런 성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로 보인다. 왜가리는 물과 불 사이의 인물이지만 기본적으로 물새다. 즉 그는 물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다. 그가 마히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이유는 아마 불의 세계와 어른들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쌓여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히토는 그런 왜가리에게 끝까지 도움을 주며 친구라고 부른다. 왜가리 역시 마히토를 친구라고 부른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



 어른과 아이의 변증법

 

 하지만 '어른'들은 무조건 비판만 받아야 할 대상인 건 아니다. 이들은 폭력적이고 아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존재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식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희생을 마다않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히마는 자신이 불을 통래 죽을 것임을 안다. 자신의 자식을 여동생에게 뺏길 거라는 사실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토와 그의 엄마가 될 존재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돌에게 소원을 빈다. 결국 둘은 원래 세계로 무사히 돌아간다. 마토는 히에게 묻는다. 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죽는다고. 히는 대답한다. 그럼에도 너를 낳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친엄마는 새엄마이자 여동생에게 아들을 연결해 주기 위해 끔찍한 죽음을 선택한다.


 나츠코가 마히토의 관계성이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마히토가 산모실에 들어가서 같이 돌아가자고 하자 나츠코는 몇 번이나 그 요청을 거부한다. 그리고 마히토에게 너를 증오한다며 화를 표출한다. 여기서 마히토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에게 엄마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츠코는 마음이 풀어지는 듯한 표정으로 묘사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둘은 서로를 모자로 인정한 듯하다.


나츠코의 경우 마히토를 나름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그를 친절하게 대하고 왜가리로부터 구하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활을 쏘기도 한다. (이 장면은 두 세계를 연결해주는 를 공격하는, 나츠코가 불과 쇠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기도 하다.) 마히토가 남편의 아들이고 언니의 아들이기도 하니 분명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자식에게 방해가 될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 마히토와 그녀의 친자가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츠코는 마히토의 편을 들어줄 수 없다. 거기다가 마히토는 나츠코를 계속 냉담하게 대한다. 키리코와 히미는 각각 마히토에게 왜 나츠코를 구하려고 하는지 묻는다. 마히토는 "자신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녀를 구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즉, 나츠코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히토의 이런 태도에 나츠코가 어느 정도 상처를 입었을 직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니 마히토가 자신을 엄마라고 인정하자 자신 역시 그를 아들로 인정했을 성싶다. 몇몇 관객들은 마키 쇼이치가 아내의 동생과 결혼하는 것, 마키 마히토가 이모를 엄마로 받아들이는 것이 꺼름직하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런 결혼이 꽤 많았다고 하던데, 그런 건 차치하고 말하겠다. 그런 사람들 덕에 마히토의 선택이 더 위대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감사하다.


 키리코는 숲으로 들어가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마히토를 끝까지 따라간다. 그리고 바다의 세계에 가서는 강력한 부적이 되어줌과 동시에 펠리컨으로부터 구해주고 음식과 잘 곳을 제공해 준다. 전술했듯 그는 자연을 따르면서도 불을 다루며 펠리컨들을 적으로 인식하는, 물과 불의 사이에 있는 인물이다.


 큰할아버지는 세계를 관리하는 자이다. 그는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블록을 들고 나름대로의 고심과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한다. 그는 마히토에게 블록을 주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눈치챈다. 이 블록들에 악의가 깃들어있다고 어른인 큰할아버지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세상은 악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후대에 더 나은 세상이 오길 바라는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필자는  『그대들 』이 기본적으로 어른과 아이의 변증법의 스토리로 이해했다. 이 '어른'안에는 폭력과 모성애가 공존하며 이는 상호모순된다. 스토리는 이 모순에 의해 추동된다. 히미와 키리코는 아이를 후대로 연결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마히토는 그 모순 속에서 성장하고, 기억한다. 그가 현실세계에 가져온 것은 '블록'과 자신을 지켜주었던 '키리코'의 인형이다. 하야오는 어떻게 살 것이냐? 묻지만 사실상 이는 답변이 결정된 질문이다. 너는 어른들의 악의와 사랑을 모두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하야오가 제시하는 진테제다.


 두 명의 하야오


 작품에서 하야오는 두 가지 모습으로 표상된다. 하나는 큰할아버지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인 마히토다. 하야오는 악의로 블록을 쌓은 어른이며 후대에 더 아름다운 세상이 오길 바란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권하기도 하지만 다른 어른-앵무대왕-에 의해 세계와 함께 무너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하야오는 아이였다. 가족들이 전투기 공장을 운영하여 여유롭게 산 굉장한 엘리트기도 했다. 그가 전쟁의 수혜를 받으며 산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을 일으킨 자는 아니다. 사실 하야오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구세계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른으로 스스로 내재화한다.


 마히토는 큰할아버지로서 나타나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신이다. 동시에 어른들의 악의와 애정을 동시에 경험한 젊은이와 아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야오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죄책감을 지닌 어른이자 그들을 보고자란 아이이기도 하다. 그건 관객들은 우리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대들 』은 잔소리가 아니다. 그저 하야오 스스로를 내보일 뿐.


 



 영화를 자주 보는 타입이 아니고 난해하다는 이야기가 많아 굳~~~이 같이 보자는 사람이 있어서 그대들을 보았다.


 다 보고 꽤 감동했다. 영화를 보면서 플롯이 어떻고, 연출이 적절하고 이는 어떤 비유인지 따지면서 보는 성격이라  『그대들 』을 볼 때도 그랬다. 아마 그런 성격이 아니라면 울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책과 달리 다시 보기가 힘든 예술이다. 그래서 최대한 기억이 남아있을 때 급하게 쓴다.


하야오가 80세가 넘은 것으로 아는데 저런 상상력과 비주얼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아직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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