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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Nov 14. 2023

첫 번째 단상

쓰는 이유

 존재하기 위해 쓴다.


존재라는 것은 연장을 가지고 있음이다.  연장이란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물로부터 고립된 사물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 존재란 다른 존재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만 입증된다.


 세계는 개인에겐 인식으로 환원된다.

 인식은 표상이다. 인상이란 표상의 변화이다.

 즉, 상호작용은 인상이다.

 의미 있는 모든 것은 인식지평이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인간은 구조적이다. 인격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유는 단지 생존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하는 존재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에는 생존과 부, 명예, 권력 따위의 이해관계로만 얽혀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이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혀있다.


 나 역시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가면들이다. 존재가 증명되는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몸은 마음의 텍스트다. 하지만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 육신으론 타인과 본심을 나누지 못한다. 그것은 기대할 수 있는 없는 일이고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남길 수 있다. 겹겹이 쌓인 페르소나들 속에서 추위에 웅크리고 있는 본심과 진심. 이 글을 읽어 독자의 인식지평에 변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상호작용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존재는 증명된다. 이것은 실존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이 글을 쓴다. 때때로 나의 살가죽은 무용한 껍데기처럼 느껴지곤 한다. 아니, 무용하다면 오히려 낫다. 몸을 떠나고 싶다. 그렇다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몸살이 나고, 불면증에 뒤척이지도 않을 텐데......, 나의 심정은 항상 자유인보단 죄수에 가깝다.


 고뇌롭다. 사실 이 글을 공개해야 할지 말지 오래 고민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올려서 좋을 게 없었다. 브런치에서 필자는 남들이 모르는 가면을 쓰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결국 지금 독자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가 결심을 세울 걸 테다. 뭐......, 언젠가 갑자기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혼란스럽다. 내가 옳은 판단을 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에도 그렇게 걱정하곤 한다. 항상 그렇다.


 필자는 사실 문학에 취미가 있다. 소설로 나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게 더 멋지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 취미다. 매일매일 써봤자 진전도 안 보이고 미래에 도움도 안 되니까. 그러니까, 비합리적이고 비실용적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쓰고 싶다. 존재하고 싶다. 이 단상은 이렇듯 우회적으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패배의 표상이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난 패배했다는 뜻이다.



 

 눈이 시큰거려서, 죽고 싶어졌다.

 

 내 부모님은 맞벌이였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모두에서 필자는 무리사이에서 잘 어울리지 못했다. 짝이 필요할 땐 선생님이 함께 해주곤 했다. 나이가 더 들고 성인이 되어선 남들과의 갈등을 피하는 법을 배웠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얼굴에 철판도 잘 깔 수 있다. 큰 발전이었지만 그래도 타인과 가까워지긴 어려웠다. 과거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웠다. 난 용기가 없었고 어리고 여리기도 했다. 언젠가부턴 관계가 귀찮아졌고, 포기했다. 어느새 두려움보다 정신적 나른함과 귀찮음이 더 커져있었다.


 그러고 보면 책과 친한 편이다. 부모님은 소싯적 독서를 좋아하셨고, 중요성도 알았다. 거실의 책장에는 수백 권의 동화책들이 빽빽하게 비치되어 있었다.-읽었던 것만 읽고 또 읽고 했지만- 바쁘셨던 부모와 날 피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했다. 사회성, 사회적 능력, 뭐 그 따위 것들. 지식의 여백을 난 실재와 삶이 아닌 책을 통해 배웠다. 물론 장단이 있긴 하지만, 책을 벗으로 두는 삶은 썩 만족스럽다. 하지만 이 만족감이 나의 본능까지 져버릴 순 없었다. 외로움을 채우고 싶다는 욕구, 나의 인상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다는 본능말이다.


 독서란, 책을 낸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화다. 이건 책은 아니지만 크게 다르진 않다. 그림도, 영화도, 소설과 시도 이런 단상들도 말이다. 때론 누군가와 실제로 대면하는 것보다 지면을 통 대화가 더 우월하다고 느껴진다. 누군가는 타인과 대면 대화는 상호소통되니 지면 대화보다 더 저급하다 할 수 없다고 말할 테지. 그런데 정말 타인과 소통이 된다고 믿는가? 인간에게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상호소통이라는 장점은 무용하다.


 그래서 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기 보단 사회적이어야 하는 동물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동정이나 연민, 공감 따위를 바라진 않는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불쾌함을 느꼈거나 상처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환영이다. 원래 다정한 포옹보다 서슬퍼런 상처를 더 강렬하오래 기억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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