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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주 Jul 31. 2022

먹방 ON AIR

인도여행 셋

인도는 꽤나 넓다. 인도여행 가는 동안 전체를 돌아보지도 못한다. 체력이 동네 마트 정도 갈 수 있는 수준이었던 나는 한 지방만 돌아다니기로 했다. 나는 이번 인도여행에서 대안공동체인 오로빌이 있는 남인도 타밀나두 지방으로 가기로 했고, 그곳으로 가는 비행편 중 제일 저렴한 티루칠라팔리행 비행편을 끊었다. 태국을 경유하는 그 비행편은 경유 시간이 길어 저렴했다. 대학생인 나는 돈보다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마침 그때는 12월 25일이라서 경유지인 태국돈므앙 공항에는 산타 복장 입은 승무원 형누나들이 지나다녔다. 산타를 보면 당연히 깜짝 선물도 기대할 거다. 하지만 내가 탄 에어아시아 비행기에는 내 기대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산타도 선물도 없었다. 비행기는 인도인으로 가득했고 동양인은 나와 일본인뿐이었다. 여행에서 만나는 동양인은 반가울 때가 많다. 일본 친구와 나는 서로 안되는 영어로 재미있게 대화했다. 그러다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인도 친구 하나가 끼어들어 대화가 끊어졌다. 친구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좌석마저 멀리 떨어져 앉게 되어 내심 아쉬웠다.


비행기 안 내 옆 좌석에는 인도인 여성이 앉아계셨는데 갑자기 덩치 크신 남성이 찾아와 자기 아내가 내 옆에 앉았다면서 내게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했다. 내가 젠틀하게 자리를 내어주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져서 한국말을 배우는 인도인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서 나는 "오브 콜스"하며 자리를 옮겼지만 아무도 내 국적 따위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인도인 남성 두 명 사이에 앉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돈을 내고 나를 관찰할 권리를 구입한 사람들처럼 내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는 걸까? 낯선 사람으로부터 그런 눈길은 처음이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일상적으로 학습하며 살았던 내게는 당혹스러웠다. 통성명이라도 해야 하나? 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없다는 듯 나를 관찰하는 그들의 눈길에는 호기심과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소 같은 맑은 눈으로 주는 관심은 부담스러웠다. 인도여행을 하려는 자여 이 시선을 견디어라!


그러다가 기내식 시간이 찾아왔다. 좌석 앞주머니에는 세금을 빼도 비싼 면세품 카탈로그와 에어아시아의 자랑인 기내식 메뉴판이 있었다. 참고로 에어아시아는 저가 항공이라 기내식이 기본 제공되지 않는다. 배고프면 돈 주고 사 먹어야 한다. 그래서 메뉴판에는 가격도 함께 적혀있다. 나는 예매할 당시에 기내식을 미리 구입했기에 따끈따끈한 기내식을 받게 되었지만, 양옆에 앉은 인도인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내식을 예약하지 않았고 기내에서 구입하지도 않았다. 나는 의도치 않게 배고픈 영혼들 사이에서 말레이시아 음식 먹방을 찍게 되었다. 부담스러웠던 시선에 복수할 기회가 주어졌다. 비행기가 하늘을 가르고 인도로 나아가고 있으니 이는 마치 방송국의 ON AIR처럼 공중에서 찍는 먹방 아닌가? 기내식의 신이 내게 주신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악해진 나는 누구 하나 별풍선을 쏘지 않았지만, 먹방 BJ가 되어 역할에 더 심취하기 시작했다.


음식의 시작은 디스플레이다. 그 좁은 접이식 테이블을 구석구석 활용해 내가 시킨 아름다운 나시레막의 전경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펼쳤다. 나시레막을 개봉하니 칠리소스의 매운 향이 공기 중으로 퍼진다. 나는 '스읍~하아아~'하며 자극스러운 음식 냄새를 변태스럽게 들이마셨고, 어떻게 이런 냄새가 날 수 있을까 하는 몸짓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 먹기 좋게 조금씩 잘 비벼 한 술 푸짐하게 떠 입 안 가득 넣고, 골고루 들어간 내용물을 천천히 씹으며, '음~'하고 목과 코를 이용해 음식에 감탄사를 더했다. 먹느라 깜빡한 호흡도 가쁘게 쉬고, 거기에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쩝쩝' 소리를 가미해서 앞에 놓인 나시레막을 기깔나게 먹어 치웠다. 인도인들은 그제서야 '이건 너무하지 않냐?'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 내가 이겼다. 그들은 시선을 거둬들였다. 나의 놀라운 식습관에는 호기심이 가질 않나 보다. 하지만 이 방송은 실시간이고 화장실을 가지 않는 한 강제 시청이다.


아쉽게도 새벽에 도착하는 비행기였기에 먹방은 저녁 한 끼로 끝났다. 아마 새벽 식사까지 챙겨줬더라면 나는 사 먹었으리라. 그때 먹었던 나시레막은 내 인생 최고의 나시레막이다. 그 까닭은 이후에 나시레막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맛을 만끽한 경험과 희열, 추억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고객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주는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움츠려 허리 아픈 몇 시간을 보냈지만, 조미료가 가득 들어가고 짰던 나시레막 맛과 그 기이한 식사 장면은 잊을 수 없고 그 비행이 행복했다. 나시레막은 내게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었고 인도여행의 시작점에서 나는 나의 애청자들과 함께 외롭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배를 채우니 잠이 오고, 잠을 자고 깨니 거의 도착해 있었다. 비행기에서 본 인도 거리의 불빛은 흩뿌린 모래 같았다. 새벽 3시쯤 도착하는 비행기였는데 나는 별생각 없이 공항 안에 있는 벤치에서 잠을 잘 생각을 하고 티켓을 끊었다. 그러나 티루칠라팔리 공항에서 입국 절차를 마치니 밖이었다. 실내 대합실이 없었던 것이다. 커다란 인도 국기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낯선 땅에 떨어진 나는 뜨거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거리에 버려졌다. 주변에 내가 의존할 수 있고 나를 해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아까 안면을 튼 일본 친구였다. 그 친구는 예약한 호텔로 향하기 위해 택시에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택시 같이 타면 참 좋겠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물론 나는 당신을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고 당신과 같은 여행객에 불과하기에 나 하나 택시에 태운다고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로 설득해야 했다. 다행히 일본 친구는 택시비를 반띵 해서 기쁜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불 꺼진 거리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기사님을 감시하며 인도의 새벽 위를 달렸다. 인도여행은 시작부터 삐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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