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로웨이스트샵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닫았습니다.(2)

제로웨이스트, 그 시작.

by 샘블리

나는 왜 제로웨이스터가 되었는가?


사실 소싯적부터 환경에 대한 조금의 배려는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길에 쓰레기통이 없으면 들고 있던 간식 쓰레기는 무조건 집으로 가져와서 버렸고, 친구들에게도 길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인물이었다. 대학 시절엔 동아리에서 환경을 위한 활동을 (일회성이었지만) 한 적도 있었다. 결혼을 준비할 때는 콩기름으로 인쇄한 청첩장(리프 프로젝트)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첫 아이를 낳으며 나는 그 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육아에 대해 1도 모른채 시작했는지라 극심한 산후 우울감에 시달리며 나는 조금이라도 편히 살자며 일회용품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장만 써도 될 물티슈를 두 장씩 뽑아 쓰기도 하고, 살짝 젖은 기저귀를 아이를 위한다며 그냥 갈아버리기도 했다. 금방 가득찬 쓰레기통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물티슈는 박스로 사들였고, 편하다고 하면 어떤 일회용 제품이든 다 써보고야 말았다. 그러던 내가 제로웨이스트샵을 열게 되다니 참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환경에 눈을 뜨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프리랜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던 나는 아이를 낳아도 정식 육아휴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이를 낳고 1년간 수입이 0원이 되었던 것이다. 식구는 하나 늘어났는데 한 사람의 수입이 없어지다니! 가정 경제의 관리를 담당하던 나는 어떻게든 지출을 줄여야했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면 생리대'였다. 생리대 값이라도 아끼자는 마음으로 나는 면 생리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양이 적었던 나에게 면 생리대의 사용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KakaoTalk_20250220_205149719_05.jpg 나의 첫 면생리대

그렇게 2년 정도 지나 나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기다렸던 둘째 아이가 우리 가족에게 찾아와 준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지만 나는 또 불안정한 나의 고용 형태로 인해 경제적인 걱정이 앞섰다. 4인 가족이 되었는데 내가 강사 일을 쉬는 1년 동안 수입이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산다는 말인가! 지출을 줄이는 데에 더 획기 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천기저귀'를 떠올렸다! 그래! 기저귀값 지출이라도 줄여보자! 면생리대도 잘 썼는데 천기저귀는 못쓰랴? 한번 꽂히면 주구장창 그것에 대해 알아보는 기질인 나는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폭풍 검색을 거친 결과 내가 도착한 곳은 천기저귀를 쓰는 엄마들의 커뮤니티인 네이버 카페 '천귀저귀 홀릭맘'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천기저귀에 대한 정보를 참 많이 얻었는데 카페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천기저귀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환경 보호를 실천하는 엄마들이 이야기또한 많이 읽을 수 있었다. 단순히 천기저귀 정보만 얻으려 들어온 카페에서 나는 환경을 생각하는 삶에 대해 성찰해 보게 되었고, 제로웨이스트로 조금씩 젖어들게 되었다.

KakaoTalk_20250220_205149719_03.jpg 오색 찬란한 울 애기의 천기저귀들

그렇게 둘째의 천기저귀는 순항하고 있었는데 둘째가 태어난지 5개월 무렵, 사상 초유의 팬데믹 사태가 찾아왔다. 모든 만남이 취소되고 우리들의 얼굴은 반이 가려진 채 삶은 계속 돌아갔다. 어느날 문득 커다란 마스크로 가려진 우리 아이들의 반쪽짜리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얼굴의 반쪽만 가리고 다니지만 언젠가 얼굴 전체를 가리는 방독면을 쓰게 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나는 이 팬데믹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을 환경 오염이라고 생각했고, 어디선가 흘려 들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이라는 말에 꽂혀 미래 세대인 우리 아이들을 위해 지체없이 움직여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적어도 방독면을 쓰는 시대를 살게하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사상 초유의 팬데믹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제로웨이스트를 외쳤다.




작가의 이전글제로웨이스트샵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닫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