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술
"저 오빠는 왜 TV에 나와서 소주 이야기를 해?"
잠시 켜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아이가 물었다. 저녁 먹기 전 급하게 거실을 치우던 중이라 딸아이도 나도 화면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물은 것. 아이 질문에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 속에는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고3인 듯 인터뷰 내용은 고등학교 졸업 후 '진로'에 대한 이야기였다.
왓? 진로? 소주?
그렇다. 저학년이었던 아이는 앞으로 나아갈 길의 '진로(進路)'라는 단어를 소주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
단어 뜻을 모른다는 것에 1차 놀랐고, 소주로 알고 있다는 사실에 혼자 남부끄러웠다.
하긴. "너의 진로를 생각해 보았니?"라는 이상적인 말 보다 "여기 진로 하나 주세요"라는 말을 더 많이 들어봤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그 당시 우리 부부는 외식을 할 때건 캠핑을 가서건 진로이즈백을 참 많이도 마셨더랬다.(하하)
에세이 아무튼 시리즈에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이라는 책이 있다. <전국축제자랑>을 읽고 그녀의 유머코드에 빠졌었는데, 술 이야기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냉큼 빌려왔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딸에게 생색을 내는 편이다. '딸아 책이란 건 너무 재밌고 즐겁고 유익하고 좋은 것이란다' 오버해서 알려준다. 그날도 엄마가 좋아하는 작가 책이라는 둥, 아무튼 시리즈가 유명하다는 둥 이런저런 썰을 풀고 있는데, 5학년이던 딸아이가 책 표지를 보며 한마디 한다.
엄마! 이거 참이슬이야?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그.. 그.. 그렇지. 참이슬이지. 옆에껀 맥주고"
아이가 '참이슬'이라는 술 이름을 어쩜 그리도 바로 떠올렸을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마도 그 시기엔 우리 부부가 참이슬을 마셨겠거니 이해가 간다.(헤헤)
그렇다. 우리 부부는 술을 꽤나 좋아하고 잘 마신다.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던 대학시절. 화이트데이에 감자탕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사탕 대신 감자탕을 선물 받았다 깔깔거렸고, 성이 '이'씨라 다음에 아이를 낳으면 아들은 '이 산' 딸은 '이 슬'로 지어야겠다 철없는 소리도 해댔다.(다들 산소주 기억하시죠?^^)
그때부터 만나고 마셨으니 함께 술잔을 기울인 세월도 20년이 넘었다. 지금까지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관계가 유지되는 건 8할이 술일지도.(어쩌면 10할?) 안 맞는 구석이 제법 많지만 다행히 술코드는 여태껏 맞다. 평생 술친구 하나 얻었다 생각하고 살면 그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기도.
아이에게 술 마시는 부모의 모습을 너무 많이 노출한 거 아니냐 혹시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염려해 주어도 괜찮다. 왜냐. 나도 걱정되니까.(헤헷) 그래서 아이에게 꾸준히 이야기한다. 엄마는 꿈이 있다고. 네가 성인이 되는 날 예쁜 레스토랑에 가서 함께 와인을 마시고 싶다고. 너의 첫 술은 엄마 아빠와 꼭 함께 하자고 귀가 닳도록 말한다. 호기심에라도 청소년기에 술을 마시면 어쩌나 염려하는 마음은 꽁꽁 숨긴 채 말이다. 그러면 남편은 한 술 더 떠 술은 꼭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며 훈장님 모드로 변신한다. 뭐 이런 교훈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도 우리 부부는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가끔은 술맛을 아예 모르는, 술은 일절 입에도 대지 않는 인생을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거짓말을 해본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거짓말은 곧 들통나기 일쑤다. 아무리 더워도 야맥(야외에서 마시는 맥주)은 거부할 수 없다며 길을 걷다가도 냉큼 가서 자리부터 잡고 앉으니 말이다.
본의 아니게 이번 글도 직전 글(이거 배려 맞나요?)과 똑같은 끝맺음을 해야겠다.
과유불급.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니. 적당히 마시며 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