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미선 Dec 28. 2020

드라마_퀸스 갬빗 (The Queen’s Gambit)

“여기 흰점들 보이시죠?”
시선에서 약간 높게 고정된 모니터에서는 방금 찍은 나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어 나오고 있었고 그 중 검은자위에는 아주 작은 흰색 점들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저게 뭐에요?”
“상처에요. 지금 초점이 잘 안맞고 빛번짐 현상이 생기는 건 이 상처들 때문이고요. 원인은...”
“아.... 원인이라면 알 것 같아요.”
 “모니터를 많이 보시는 직업인가봐요”
화장기 없는 얼굴, 부드러운 컬이 있는 숏컷의 여자 의사선생님은 살가운 느낌은 아니었지만 걱정을 담아 질문했다.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요 며칠 앞이 흐릿한 이유는 갑자기 몰아본 드라마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시작 안하려고 한건데.
얼마전 남편이 갑자기 ‘도깨비’가 보고 싶다고 했다. 인스타에서 드라마 짤을 보고 흥미가 생겼다나. 나는 남편이 드라마를 보는게 좋다. 뭔가 감정적으로 다정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 의욕이 꺾이기 전에 (나는 이미 봤지만) 같이 보자고 했다. 드라마가 거의 끝나가니 갑자기 커피프린스가 보고 싶어졌다. 배우 공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져서.(커피프린스에서 공유는 29살로 나온다...) 이때부터는 혼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드라마보기가 시작됐다. 그 시절 공유는 빛났지만 어둠속에서 빛나는 모니터는 내 눈동자에 무수히 많은 상처를 남겼다.
모니터 보기를 좀 더 자제해야 했다. 특히 드라마는 위험하다.
하지만 그세 드라마 근력이 생긴 탓에 이전보다 플레이가 쉬워졌다. 헤어나오기 힘든 걸 알면서도 그래도 일단 봐볼까하는, 장벽이 하나 없어진 느낌.
그중 ‘퀸스 갬빗’은 대사부터 화면구성까지 넷플렉스의 예고없이 뜨는 예고편들 중 가장 맘에 들었다. 시즌 하나에 에피소드 7개. 그래 이정도는 내눈도 소화할 수 있으리라. 아무것도 안보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다. 처방받은 2종류 안약도 잘 넣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아이패드 대신 프로젝터를 쐈다.

어떤 드라마는 보고나면 헛헛함이 몰려온다. 내가 이럴려고 이 시간을 썼나 싶은. 하지만 단언컨데 ‘퀸스 갬빗’은 당신의 마음과 인생을 1인치 정도는 넓혀줄만한 작품이다. 재능과 승부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연대를 주요하게 다룬다.
가장 좋았던 건, 쓸데없는 빌런이 없다는 것. 뛰어난 재능의 주인공, 그리고 승부를 내야하는 드라마에 악역이 없다니.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 허먼의 앞길을 막는 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그녀의 불안과 두려움 뿐이다.
보통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괴롭힐 것으로 기대되는 역할의 인물들중 그 누구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는다. 9살에 고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가게된 고아원에서는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는 원장 선생님이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입이 걸걸한, 같은 고아원의 흑인소녀 세실은 먼저 말을 걸어와 그녀에게 고아원 생활에 대한 여러 팁을 알려주면서 가족과 가까운 우정을 다진다.
 베스는 13살(사실은 15살)에 뒤늦게 입양이 되었지만 새아빠는 집을 떠나고 새엄마와 둘이 남게된다. 모녀지간의 정이 요원해 보였던 그들 사이에서 베스의 체스 우승으로 묘한 연대감이 생겨난다. 베스의 상금을 차지한다거나 그녀를 혹사시킨다는 등의 전개는 없다. 되려 베스로 인해 여러나라로 여행을 가고 좋은 호텔에서 좋아하는 술들을 즐길 수 있게된 휘틀러 부인은 베스의 매니져를 자처하고 커미션을 받는다. 비니지스 관계처럼 시작했지만 곧 그녀를 응원하고 이해하며 따뜻한 인생의 충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거기엔 사랑이 있다. 지은탁 뒷통수에 밥공기를 던지는 이모같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하지만 역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체스에 대한 베스의 뛰어난 재능과 그녀의 성장 그리고 승리이다. 체스를 몰라도 쫀득한 긴장감이 가득하고 그녀의 재능과 성장은 카타르시스를 주기 충분하다. 세계 챔피언이 되기위한 베스 내면의 불안과 중독에 관한 묘사는 드라마의 깊이를 만든다.
  
체스의 세계는 명료하고 평등하다. 1960년대이지만 어린소녀 베스는 체스의 세계에서 만큼은 공평한 대우를 받는다. 물론 남성들로만 이뤄진 견고한 세계라 진입하는데 편견과 무시가 있었지만 이기고 지는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부당한 경우는 거의 겪지 않는다. 흑과 백으로 나눠진 아름답고도 평등한 세계. 모두가 똑같이 16개의 기물과 동일한 시간을 부여받는다. 먼저 두는 백이 조금 유리한 것 정도일까. 64칸 보드안에서 베스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보드밖 진짜 인생은 어떨까. 체스밖에 몰랐던 그녀는 일상에서도 다른 것들에게 내줄 자리가 없다. 자신을 생각해주고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한 경기에서 만난 어린 꼬마에게서 자기 자신을 본다. 16살에 세계 챔피언이 될 것이라는 그 소년에게 묻는다. 그리고는 그후엔 뭘할껀데? 세계 챔피언이 되고 나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중요한 경기에서의 패배 이후 그녀는 그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게 그녀는 약과 술에 중독되어간다.


한사람의 빛나는 재능은 많은 사람들을 그 주위로 모이게 한다. 처음엔 그 재능이 주는 놀라운 선물로 주변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듯하지만 무엇이든 일방적인 것은 없다. 그 사람이 제대로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선 그 빛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인생,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마치 보드위의 기물들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고받는 말들, 행동들,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들. 인생에서 나의 재능과 노력은 일부일 뿐이다.

고아원 지하에서 그녀에게 처음 체스를 가르쳐줬던 샤이벌 아저씨나, 혼자남은 베스에게 코치를 자처하는 해리와 베니, 진짜 가족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세실까지.

베스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응원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를 깨닫게 되고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_
드라마가 힘든 또 다른 이유는 긴 시간 몰입하다보니 후유증이 오래간다는 것.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어서 보고나면 인물들의 감정이나 상황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이전 사랑을 잊기위해선 새로운 사랑밖에 없다고 했던가.
베스의 커다란 이목구비를 떨쳐내려 ‘경이로운 소문’을 플레이한다.
드라마 근력이 제대로 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_사이드웨이 (Sideways, 200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