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 있는 많은 꽃들의 대부분은 숙근초이다. 맨몸으로 씩씩하게 겨울을 나고 남이야 지켜보든 말든, 항상 같은 자리에서 때가 되면 알아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해를 거듭하며 몸집을 불려 가는 아주 기특한 숙근초들이다. 나의 숙근초 사랑에도 불구하고 일년초 중 유일하게 매년 챙겨 심는 꽃이 있다. 바로 천일홍이다. 4월에 파종하면 6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서 서리 내릴 때까지 점점 풍성하게 피어 정원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천일홍을 맨 처음 본 곳은 매일 지나다니던 도로가의 화분이었다. 처음 볼 때는 작은 꽃이 바글바글 모여있어 좀 징그럽기도 하고 색깔도 쨍한 것이 아주 촌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매일매일 보다 보니 점점 정이 들었는지동글동글한 공 모양이 귀엽고, 선명한 자줏빛 색깔은 보석 같았다. 게다가 가을이 되면서, 잎은 퇴색되어 가는데 점점 꽃들이 많아져 화분 가득 동글동글한 꽃들이 차는 게 너무 분위기 있었다.
화무십일홍. 꽃이 아무리 붉어도 십일을 가지 못한다는데, 백일홍도 아니고 천일홍이라니.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뻥이 좀 심하구나’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일홍은 진짜 천일을 간다. 일년초지만 천일동안 우리 집 거실에 피어 있다. 약 3년 전에 말려 둔 거실의 천일홍 꽃이 거의 천일을 채워가고 있는 중이지만, 꽃색이 여전히 아름다운 자줏빛을 유지하고 있다. 천일홍을 천일동안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드라이플라워이다. 까슬거리는 종이 질감의 꽃이 드라이플라워로 딱 좋다.
<우리 집 거실에서 천일을 채워가고 있는 천일홍과 스타티스>
여물어가는 천일홍 꽃을 수확했다. 꽃을 말려 거실 장식도 바꾸어 주고 마른 화병에도 꽂을 생각이다. 꽃대가 단단히 여문 줄기를 중심으로 잎을 따고 길이 별로 정리했다. 꽃받침도 따는 것이 깔끔하다. 꽃대가 덜 여물어 부드러운 것은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었을 때 꽃을 받치는 힘이 없어 자꾸 구부러진다. 그래서 꽃대가 덜 여문 꽃들은 꽃만 따서 말린 다음에 리스를 만들 예정이다.
너무 여물어서 미워진 꽃은 채종을 한다. 솜털껍질에 쌓인 천일홍 씨앗을 그냥 심으면 발아율이 낮다. 딱딱한 솜털 껍질을 벗겨 속 씨앗을 분리해서 보관한다. 이렇게 심으면 대부분 쉽게 발아한다. 꽃잎 아래의 솜털껍질을 잘 벗겨 내면 갈색의 동그란 씨앗을 만날 수 있다. 정리한 꽃들은 길이별로 모아서 고무줄로 묶어 주방 한쪽에 잘 걸어 두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인간들아 겸손해라’하는 말이지만, 정원을 가꾸다 보면 ‘꽃이 어찌 붉을 때만 아름답겠나’ 싶다. 특히나 정원에서 사랑받는 꽃들은, 꽃이 없을 때도 단정한 몸가짐과 색을 유지하는 꽃들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꽃은 졌어도, 젊음은 갔어도, 단정함과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채우며 나이 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