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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May 17. 2023

좋은 영화에 관한 썰

영화 쫌 본 언니의 강추 리스트 (1화)


   이따금씩 이런 요청을 받는다,

 - 좋은 영화 좀 추천해 주세요.

 -  모처럼 극장 가서 직관하려는데 어떤 영화가 좋을까요?

 - 부쩍 소원해진 딸과 용기 내서 영화데이트를 하려는데 뭘 봐야 할까?

 - 퍽퍽한 가슴에 감동이란 걸 주고 싶은데 눈물 날 영화 좀...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결국  좋은 영화를 선택하기 어려우니 대신 골라달라는 말이다. 그런 지인들에게, 대단하진 않지만, 나의 영화 리스트들을 건네주곤 한다. 벌써 이십 년 정도를 그렇게 해왔다. 아마도 동년배 이웃에 비해 영화와의 거리가 가깝게 살아온 덕분일 것이다.  


    몇 년 전인지 헤아리기도 아득한, 딱 서른 살이 되던 해였다.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는 어느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6개월짜리 영화제작학교에 입학했다. 턱없이 등록비가 부족했지만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맡기는 묘수(?)를 부린 덕분이었다. 어쨌거나 여섯 달 내내 영화를 배우고 이야기하고 만들었다. 종종 영화 대신에 서로의 인생사를 더 중요히 여겨 새벽  전철이 뜰 때까지 술자리를 지키기도 했지만, 영화에 푹 잠겨 살 수 있어 행복했다. 비록 망작이지만 [15분 02초]라는 단편영화도 연출했고, 지금은 천상계로 올라선 '봉 감독'을 새파랗게 젊은 강사로 만났고, 아주 잠시지만 '창'이란 이름의 독립영화집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렇게 돈 안 되는 쪽으로 바쁘게 사는 것도 모자라 영화관에 내 지갑을 탈탈 털어주었다.

   어떤 경로로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는진 모르겠는데, 영화감독이 되려면 온 세상 명화를 두루 섭렵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었다. 지갑 사정이 워낙 헐벗은 시절이었지만, 밥을 굶어도 영화는 굶을 수 없다며 동숭시네마텍을 내 집처럼 드나든 것이다. 러시아 감독이 만든 영화는 다 [전함 포템킨](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1925) 같을 줄 알았는데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1986년 제작)을 만나며 선입견이 박살났다.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압바스 키오라스타키, 1987)를 본 날은 하늘의 별도 달도 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척박한 땅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다니? 기절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있어 보이고 싶어' 안달났던 서른 살의 나를 통째로 흔들어준 '진짜로 있어 보이는' 영화였다.   

       경향신문 기사 스크랩(블로그'세운상가키드')

   그런가 하면, 조조할인을 즐기며 넓은 객석에서 나 홀로 영화관람을 즐기기도 했다. 특히 당시엔 꽤 낯설었던 대만 영화 [애정만세](차이밍량 감독/1995년 제작)을 본 날이 기억난다. 정말 아무도 없는 극장이었기에 다행이었다. 영화의 엔딩씬에서 여자 주인공이 6분 동안인가? 아무튼 꽤 긴 시간을 아무런 배경음악이나 대사 없이 우는데 나도 따라 흐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흐느낌과 내 울음소리만 존재한 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영화를 보며 올라오는 부정적 반응으로 고생한 적도 있다. 지인 한 명이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밝히지 않은 채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틀어준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페이르 파올로 파솔리니/1975)를 보다가 우웩. 어떻게 할 새도 없이 토사물이 솟구친 것이다. 그게 감독이 노린 리액션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감독이 되겠다던 나의 욕망은 삼십 대 초반을 지나면서 영화마니아로 만족하자는 현실인식으로 바뀌었다.

    그저 기회만 오면 좋은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공적 글쓰기로 풀어내거나 좋은 영화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끝 모를 허기를 달랬다. 가만... 지금 나는 계속 '좋은 영화'란 표현을 쓰고 있다. 좋은 영화?  




    십일 년 전쯤, 13-18세 사이 어디쯤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토요영화교실‘을 진행했었다.

   [파워 오브 원](존 G 아빌드센/1992)을 보여준 첫날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기 직전, 나는 학생들에게 세 가지 감상미션을 주었다.

      첫째, 영화가 여러분한테 말을 걸어올 수 있으니 뭐가 들리는지 잘 들어보라.

      둘째, 여러분의 가슴이 막 뛰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게 어떤 장면인지 보라.

      셋째, 이해는 안 되는데 뭔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장면이 있다면 기억하라.

   서른 명 남짓 모인 아이들의 낯빛이 금세 흐려졌다. 몇몇은 영화를 그냥 보면 안 되냐고, 꼭 그렇게 복잡하게 머리 굴려가면서 봐야 하냐고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람한테 진짜 좋은 것은 하고 난 다음이 좋은 법이니, 난 그들의 소리를 귓등으로 들을 따름이었다.  

   러닝타임 123분은 쏜 살같이 지나고, 이어진 영화 감상 후 피드백 시간. 학생들은 놀라우리만치 뜨거운 소감들을 토해냈다. '예상보다 재미있었다'에서부터 '흑인들이 왜 백인을 레인메이커로 기다렸는지 이해가 안 된다'를 거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면서 '혼자인 나는 작고 약할 수 있지만 깨어난 나는 크고 강할 거고, 그 힘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까지. 20분으로 예상했던 소감 나눔은 아이들의 계속된 질문과 고백으로 한 시간여 진행되었다. 그런 시간은 두 번째 관람 후에도 세 번째 관람 후에도 계속되었다. 의식의 변화 차원에서 보면 수십 번의 강의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도구인 듯싶다.   


    누가 뭐래도 난 그런 영화에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영화를 보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고, 영화 속 상징과 장치들을 해석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심장에 긍정의 진동을 주는 영화. 그래서 우리의 삶을 더 넓고 깊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영화 말이다. 영화 한 편 보면서 무슨 기대가 그리 많냐고?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뭘 그렇게 많은 걸 바라냐고?... 그렇게 어렵게 만드는데 기왕이면 관객들 인생에 보탬이 되면 좋지 않을까?

    적어도 내겐 그랬다. 좋은 영화는 언제나 존재했고 내게 보탬이 되어주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여덟 살 무렵, 어린이날에 아버지 손 잡고 도원극장에 들어선 날부터. 공짜 영화라 어마어마한 인파로 극장 안이 혼란스러웠지만 상관없었다. 난생처음, 가슴이 터질 같았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형형색색의 움직이는 빛그림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아있음에 몸을 떨었다. 스크린과 나만이 존재하는 순간!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애가 태어났다는 저주 같은 비난을 들으며 자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살아있음'을 체험한 것이다. 세상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생명, 삶을 알아차렸고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을 믿고 사랑해 주기 시작했다. 영화를 처음 만난 그날의 이야기는 언젠가 또 꺼내게 될 테니 오늘은 여기에서 휘리릭 접는다.


    아무튼, 살아온 길 곳곳에서 영화는 나의 길벗이었고 위로자이자 자극제였다. 

   오십이 훌쩍 넘은 지금. 영화 전문가도 못 되었고 번듯하게 성공한 어른도 못 되었지만, 영화 덕분에 많이 행복했고 지금도 영화 덕을 보며 나이 들어가는 중이다. 하여, 고맙다. 영화와 영화의 사람들한테. 고마울 일도 많다고 핀잔의 눈흘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고마움이 이 만담의 시발점이다.   

   어딘가에서 나처럼 영화와 함께 행복하게 나이 들어가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부터 풀어낼 이야기가 그들에게 손톱만큼이라도 즐거움이 되길. 어디까지나 내 입맛대로 내 꼴리는 대로겠지만. 혹시라도 그들이 놓친 어떤 영화의 반짝거림을 내가 찾아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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