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슨 원숭이 기절할 소리? 비명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토요일 백주대낮에 오가는 사람 많은 역전 광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니 나타나는 홍 반장'도 아니면서, 소리 나는 쪽으로 후다닥 다가갔다.
오지라퍼답게 사건현장에 끼어들었는데,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3초 정도가 지났나? "아하하하!" 누가 날 쳐다보든 말든 소리 내 웃었다.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닥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서 좋았고, 예상밖 풍경이 비현실적일 만큼 밝아서 좋았다.
괴성의 발신지는 키 낮은 물줄기들이 오르락내리락 춤추는 분수마당이었다. 한성대입구역 2번과 3번 출구 사이에 자리한 공간이다.
대여섯 명의 어린이들이 물과 혼연일체가 되어 뛰어다녔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까르르깍깍 소리 지르면서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야단법석이다. 반면,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하회탈처럼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나무계단을 객석 삼아 앉은 관객들 같았다. 아이들 무리로 뛰어들어 같이 첨벙거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발길을 돌렸다. 서둘러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공연장까지 3분도 채 안 걸렸다. '여행자극장'은 처음이었다.
나의 아지트 '파란여우'와 마찬가지로 지하공간이라 그런가 낯설지 않았다. 가만, 대학로 부근에 있는 소극장 대부분이... 지하 아닌가?
아무튼 프리셋 무대의 쪽빛조명에 웃고,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객석조명에 미간을 찡그리고, 한지 느낌이 물씬 나는 공연 순서지에 미소 짓고, 글씨가 가물거려 안경을 치켜들고 읽으며 다시 찡그렸다. '그러려니~' 해야 상책이다. 갱년기 혹은 노화 중이니 아주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따름이다.
심플한 순서지 안에는 작품 이름, 시간, 스텝, 출연진, 시놉시스가 담겨 있었다. 2벌식 타자기체로 적힌 글자들도 좋았지만, 작아도 있을 건 다 들어 있다.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다.
'희곡의 밤'
'세 번째 작품'
'극단 2악장'
'쓰레기집'
'청소를 전혀 하지 않고 쓰레기를 집안에 쌓아두고 살다가 병원에 실려간 사람의 집'
읽어 내려가다가 시선이 멈췄다.
'극작, 연출 : 박현정'
가만히 그 이름을 읊조렸다, 박현정...
우리 대관 손님,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느낌 참 좋은 우리 손님.
딱 한 달 전이었다. 그가 파란여우의 대관 손님으로 나타났다. 손님 누구에게나 보내는 사용안내문을 그에게도 전송했다.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회신이 날아들었다.
"오늘 사용하도록 안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속한 응답이었다. 안 그래도 대관 목적이 '대본 리딩'이라고 적혀 있어서 반가웠는데, 친절한 답문자를 이리 빨리? 내 입꼬리가 귓가로 올려 붙기 시작했다. 완전히 귓가에 착 달라붙은 건 그다음 날이었다.
"별이 10개 있다면 10개 누를 텐데... 연습실 만족도 표현에 별 5개가 부족하네요!"
대관 플랫폼에 뜬 그의 사용후기였다. 그 뒤로 문장이 더 이어졌지만 읽기를 멈췄다. 코 끝이 매워지면서 눈두덩이가 뜨거워진 덕분이다. 안구건조증 심해서 눈물도 잘 안 나오드만 그날은 달랐다. 눈물방울이 어느새 턱밑으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대관업을 준비하면서 한 고생들, 막상 오픈했는데 예약이 잘 안 들어와 애를 태운 시간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 받아내는 게 참 쉽지 않다며 내쉰 한숨들,... 그 모두가 '히히히' 소릴 내며 사라지는 것 같았다. 손님의 긍정의 피드백이 그렇게 고마울 줄 몰랐다.
물론 안다. 파란여우가 정말 훌륭해서가 아니라, 손님의 두 눈이 착하고 곱기 때문에 좋게 봐주고 멋지게 표현해 주셨을 수 있음을 나도 안다. 그럼에도 그의 사용후기를 접한 그 순간에 내 영혼은 태양빛이라도 이겨먹을 정도로 따뜻했다.
대관 손님이 나를 감동시키다니? 감동은 뭐니 뭐니 해도 '고객 감동'이지 않나? 연습실 사장인 내가 손님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인도해야지, 어찌 내가 감동을 받고 있는 거야? 의아했다. 기분이 상당히 좋은 물음표.
박현정 연출가는 그 뒤로 두어 번 더 그의 극단과 함께 대관 손님으로 찾아왔고, 인원 추가나 보면대 사용 등으로 우리 사이엔 전화 통화와 문자 교환이 이뤄졌다. 자연스럽게 SNS 계정이 연결되었고, 그가 만들어가는 창작예술의 자리도 조금 알게 되었다.
연출가로서, 희곡 집필가로서 그리고 극단 대표로서, 이미 나보다 앞서가는 선배님이었다. 게다가 나는 대놓고 여성편향적이지 않나? 두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연출작품이 궁금해졌다. 때마침 공연일이 잡혀 있었고,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연에 오라고 또 가겠다고 입을 맞췄었다.
1시간 정도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삭'!
공연 러닝타임은 허리 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출연배우 5인은 겹치기 배역 없이 오롯이 자신만의 캐릭터를 표현했다. 조명은 막 전환을 알려주는 정도만 쓰였다. 가연 역할의 배우가 등퇴장을 반복하고 무대 내 위치에도 변화를 주어 극이 훨씬 활기를 띄었다. 무엇보다 극 자체가 참 산뜻하게 다가왔다.
분명, 상상 이상의 쓰레기집 안 풍경이고 스토리인데도 대사며 연기며 연출 모두가 깔끔했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연출가와 대본 그리고 배우의 어우러짐. 2023년 우리 사회의 동시대성을 담아내면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도 놓치지 않은 균형감이 부럽다. 그리고 꿈틀거리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나의 다음 대본을 쓰고 싶다. 작품을 만들고 싶다. 정말 하고 싶니? 그러면 바로 하면 되잖아.'
공연 끝나면 얼굴 보자고 톡을 나눴었지만, 조용히 극장을 빠져나왔다. 스탭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박현정 연출가를 단박에 만날 수 있겠지만, 그저 걷는다. 나의 아지트까지 십 분 정도를 가만가만히. 한 시간 전쯤에 멈춰 섰던 분수 마당도 피해서.
파란여우에 도착하면 디카페인 커피에 얼음을 둥둥 띄어서 마셔야겠다. 그리고 우리 손님께 감사의 문자를 보내련다. 참 오랜만에 멋진 낭독극을 만났다고, 귀한 무대를 보여주시니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