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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May 15. 2022

어서 와, 중국은 처음이지?

세렝게티 초원에 던져진 기분이란 이런 걸까

인천에서 약 3시간 50분쯤 걸려 광저우 백운공항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던 내게 네 시간이란 꽤 긴 시간이었으나,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너무도 빨리 도착해버렸다. 공항에 내려 짐을 찾고 바로 학교로 갔다. 깜깜한 밤이었고, 공항에서 차로 약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 학교가 있었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땐 길에서 한자로 표기된 간판을 보고도 얼마나 신기했는지.


우측 상단에 표시된 곳이 내가 첫 유학 생활을 한 곳. 방금 찾아본 따끈따끈한 지도인데도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


나, 이 도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내가 살았던 도시 광저우에는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많은 고층 빌딩들과 신식 건물들이 지어졌지만, 그 전에는 중국 3대 도시라고 하기엔 북경과 상해에 비해 발달이 한참 덜 됐었다. 내가 다니게 된 학교는 심지어 광저우 시내에서도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학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깡시골이었다. 새벽엔 매일 이 집 저 집에서 닭이 크게 울었고, 오토바이 한 대에 온 가족이 타고 이동하는 모습은 어린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 일주일 정도 시간이 붕떠 학교가 있는 동네에 적응하고 싶었는데, 적응할 게 없었다. 말 그대로 허허벌판. 앞이 깜깜한 순간이었다. 




학기가 시작하고, 처음 등교했던 날이 생각난다. 기숙학교였고,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그러니까 초중고가 다 모여있는 꽤 큰 학교였다. 학교에서 편의를 봐줘 기숙사는 동생과 쓸 수 있었다.


팅부동(听不懂), 이 말만 외워-


우리의 첫 등교가 걱정됐던 엄마는, 팅부동이란 말만 무조건 외우고 가라고 했다. '못 알아듣겠다'라는 뜻인데, 외워가길 참 잘했다. 그 후 적어도 세 달 동안, 팅부동이란 말은 나에게 와일드카드와도 같은 존재였다. 교실에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는지, 정말 매 쉬는 시간마다 처음 보는 학생들이 몰려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팅부동이라는 말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했다. 초등학생 때 몽골 친구가 전학 온 적이 있었다. 그땐 외국인이 우리 학교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신기해 그 친구의 기분은 전혀 생각도 못한 채 한국어로 이것저것 캐묻곤 했었는데, 그게 어찌나 미안해지던지.


이때 대장금을 시작으로, 마이걸이라는 드라마가 중국에서 대유행했을 때라, 매 시간마다 아이들은 내 눈앞에 이준기와 이다해 사진을 들이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했다(심지어 주연은 이동욱이었는데). 내가 니하오 다음으로 처음 배운 중국어가 아마 이준기와 이다해의 중국 이름 일거다.       




친구들은 나랑 친해지고 싶어 좋은 뜻으로 말을 거는 건데 그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중국어 공부를 조금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어도 막상 이렇게 현지인들 사이에 던져지면 아무것도 못 알아 들었을지 모른다. 슬픈 건 친구들이 나에게 관심을 갖는 데도 유효기간이 있었다. 처음 한 달은 거의 모든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번갈아가며 말을 걸어주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니, 이들은 이내 곧 흥미를 잃었고, 두세 달쯤 지나니 같은 반 여자애들 몇 명만 나에게 여전히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입이 너무 근질거렸다. 밤에 기숙사에 돌아가면 단어를 열심히 외우긴 했지만, 그걸로는 택도 없었다. 한국에선 세상 활발했던 나인데, 성격이 점점 소심하게 바뀌는 것 같았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거의 매일 스카이프로 전화를 걸었다. 울면서 잠들고 울면서 깨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한 선택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그때 처음 배웠던 것 같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


싸이월드가 복구해 준 그 당시 내 친구. 하루 종일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시달려 귀가 먹먹해진 채 기숙사에 돌아와 아이팟을 켜면,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없었다.


너도 중국 제품 쓰는구나?


내가 본격적으로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특이하다. 어느 날 역사 시간에 선생님이 내 자리 쪽으로 걸어오시더니 책상에 올려진 내 휴대폰을 보고 말을 거셨다.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중국 제품을 많이 쓰냐고. 응? 뭔가 이상했다. 그 당시 내가 쓰던 휴대폰은 삼성전자의 미니스커트 폰. 앞면엔 Anycall이, 뒷면엔 Samsung이란 글자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되도 않는 중국어로 '이건 삼성 꺼고, 삼성은 한국 기업이다'라고 설명했지만 (심지어 친구들도 도와주었다) 그 선생님은 계속 내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셨다.


친구들이랑 대화가 어려울 때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게 답답하고 외로웠지만, 그날은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표현을 제대로 못 한다는 게 화가 난다는 감정을 느꼈다. 눈 뜨고 코 베인 느낌. 앞으로 이런 일을 안 당하려면 언어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날부터 나는 수업이 끝나고 조선족 선생님한테 스파르타식 중국어 교육을 받았고, 어린 마음에 독기 품고 더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3개월 만에 HSK 9급(지금은 신 HSK로 바뀌어 6급에 해당한다)을 딸 수 있었다.




인풋을 말도 안 되게 늘리다 보니 신기하게도 친구들의 말이 점점 이해되기 시작했다. 수업도 따라갈 수 있었고, 중간고사/기말고사 시험지도 더 이상 외계어처럼 보이지 않았다. 말이 통하기 시작하니, 나라는 한국인에 대한 관심의 유효기간이 끝났던 친구들도 다시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후로 흑백사진과도 같던 나의 학창 시절에 다시 여러 색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소풍도, 여행도, 서로의 기숙사 방에 놀러 다니던 그 시간들도 어찌나 즐겁던지.


싸이월드가 복구해 준 사진 두 번째, 내가 다녔던 기숙학교다. 밤에 혼자 센치해서 찍었나 보다.


그렇게 숨 가쁘게 1년이 지나고 중국어를 잘할 수 있게 되니, 인생의 첫 번째 퀘스트를 깬 기분이었다. 아, 내 꿈은 미국에 가는 거였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또 꿈틀댔고, 나는 그렇게 밤마다 국제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시작된 고생길에 어느 정도 적응해버린 나는 그렇게 자발적으로 두 번째 고생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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