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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의 고백: 올해로 벌써 세 번째 플래너를 샀다.

플래너의 역할은 기분전환과 안도감까지였다.

by 마인드리프

익숙한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요?


마감기한은 성큼 다가오는데 해놓은 일은 별로 없고, 머릿속도 어지럽지만 침대와 책상은 더 뒤죽박죽일 때가 있습니다. 시간은 어찌나 야속하게도 부지런한지 쉬지 않고 흐르고, 마음은 점점 초조하고 막막해지다 못해 멍해집니다.


해야 할 일 위에 또 다른 일이 쌓이고,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일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그러는 사이 빨래는 더 높이 쌓여갑니다. 개지 않은 철 지난 옷들과 읽지 않은 카톡 메시지들은 괜히 나를 째려보는 것 같고, 읽기만 하고 답장하지 않은 문자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네가 그렇지 뭐'


익숙한 마음의 소리가 들립니다. 어쩌면 과거에 가족, 친구들에게 들었던 목소리의 메아리 같기도 합니다.


‘그래, 내가 그렇지 뭐. 아 몰라.’


잡은 것도 없지만 모든 걸 놓아버리고 도망치고 마음이 솟습니다. 하지만 가느다란 이성의 끈을 간신히 잡고 다시 시작해 보자며 플래너를 한 권 샀습니다. 새 플래너를 펼치고 알록달록하게 색을 칠하면 잠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며칠 뒤, 플래너는 책상 한 구석에 던져져 있죠.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아직 한 해의 절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세 번째 플래너입니다. 물론 먼저 산 두 개의 플래너 모두 일주일도 쓰지 않고 방치되어 있습니다. 한 권은 디자인은 마음에 드는데 내부 구성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한 권은 구성은 좋은데 너무 크고 무거워서 쓰지 않게 되었다는 핑계를 만들어냅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정말 매일 잘 써보자고 다짐하고 유튜브에서 플래너 활용하는 법을 찾아보며 생산적인 하루를 기대해 봅니다. 반전 없는 결말을 알려드리자면 그렇게 매년 쌓인 플래너와 다이어리, 노트들이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플래너 같은 도구들은 잠시 안도감을 줄 뿐,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시간 관리의 어려움이 실제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수면 위 빙산의 일각이 아닌 그 아래 잠긴 빙산의 전체 모습입니다.


나만의 ‘빙산’ 이해하기

빙산이 바다에 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볼까요? 수면 위에는 겨우 10%만 드러나 있고, 나머지 90%는 물속에 숨어 있습니다. 수면 위의 부분은 눈에 보이는 행동들을 의미합니다. 시간관리를 못해서 기한을 맞추지 못하고, 일을 시작하거나 끝내는 것도 어렵고, 산만하고 정리 못하는 행동들처럼요. 하지만 수면 아래의 빙산의 몸통을 살펴보면 반복된 실패와 좌절 경험으로 인한 수치심과 열등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쉬고 싶다는 마음에 대한 죄책감,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꽁꽁 얼어있습니다.


‘나는 게으르고 의지가 약한 사람이야’

‘나는 중요한 걸 자꾸 까먹는 덜렁대는 사람이야’

‘나는 늘 뭔가 부족해. 다른 사람들처럼 못 해’

‘나는 늘 사람들에게 실망을 줘'

‘난 통제가 안 돼’

‘난 쓸모없는 사람이야'

‘노력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그냥 포기하는 게 편해'


하지만 수면 아래 잠긴 빙산의 모습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심해에 있는 빙산에는 이런 글귀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함께 하고 싶어’

‘도움이 되고 싶어’

‘즐거운 일을 하고 싶어’

‘나의 재능을 펼치고 싶어’


우리가 잘 보지 않지만 빙산의 일부에는 연결되고 싶은 마음, 가치 있고 싶다는 욕구, 몰입과 기쁨을 느끼고 싶다는 갈망도 함께 숨겨져 있습니다. ‘나는 왜 자꾸 미룰까?’라는 마음 아래에는 어쩌면 ‘잘 해내고 싶다'는 욕구가 숨겨져 있으며, ‘난 쓸모없는 사람이야'라는 생각 아래에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가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ADHD를 가진 많은 분들이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좌절 속에서 스스로를 탓하는 동안 순수한 욕구는 점점 더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 스스로를 탓하고 미워하고 죄책감과 수치심만 느끼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변화의 시작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 감춰진 내면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을 다그치기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감정과 신념,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욕구를 이해하고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내면에 숨겨진 잠재력과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왜'라는 질문도 못한 채 해야만 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진짜 원하는 것을 외면한 채 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거나 도구에만 의존한다면,

혹은 ADHD라서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한다면 아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얼마 전 개인 세션을 마친 내담자의 이야기를 잠시 나눠볼게요. 상담을 시작하기 전 자칭 민폐녀라고 소개한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와 대인관계에서 자꾸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좀처럼 해야 하는 일도, 사람들과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아 속상하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무책임한 모습 아래에는 부담감, 죄책감, 수치심, 자책감이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몇 번의 세션 후에 제가 물었습니다.


“민폐 끼치지 않는 거 말고 000님에게 만족스러운 하루는 어떤 모습이고 무엇을 하고 싶나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지 말해볼까요?”


“일주일에 한 번은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하루에 30분은 죄책감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허락하고, 자기 전에는 나를 돌보는 글쓰기를 하고 싶어요.”


“000님이 원하는 것은 연결감, 온전한 휴식, 자기돌봄이네요."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에만 몰두했었는데 이런 욕구가 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았네요"


이후 그녀는 3가지 욕구와 연결된 작은 계획들을 실천하며 조금씩 일상의 만족감을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션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엔 뭔가 잘못되면 무조건 내 탓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그럴 수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뭔가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물론 스스로에 대한 관점을 변화한다고 해서 어느 날 마법처럼 ADHD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는 여전히 삐걱대고, 뚝딱거리고, 그러다 넘어지고 주저앉는 날도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러니까요.


ADHD를 가진 사람에게 효과적인 도구와 시스템, 약물도 필요할 때가 있지만 외면해 온 신념과 욕구를 인정하고 들여다보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물론 이 과정을 혼자 해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와 함께 심해를 탐사하는 경험을 함께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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