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라는 리모컨에는 고장 난 '음소거' 버튼이 있다

못 들은 '척'이 아니고, 안 들리는 것도 아니지만 듣지 못할 때가 있다

by 마인드리프

ADHD라는 리모컨에는 고장 난 '음소거' 기능이 있다.

새해를 맞아 필요한 물품들을 사기 위해 남편과 함께 다이소에 갔습니다.

다이소는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일단 들어가면 필요한 게 없다가도 생기는 마력이 있는 곳이죠.

그날도 흥미로운 물건들에 홀린 듯 정신이 팔려 이것저것 들여다보던 중, 남편이 저를 불렀습니다.


"여보!!!! 내가 이것 좀 봐달라고 몇 번이나 불렀는데 못 들었어?"

"아 그래? 못 들었어. 헤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쇼핑 삼매경에 빠집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대화하는데 어쩐지 말투에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져 물었습니다.


"뭐 언짢은 일 있어?"

"응. 있어. 당신은 왜 사람이 바로 옆에서 몇 번을 부르는데도 못 들은 척 해?"

"아까 말하는 거야? 나 정말 못 들었어"


"바로 옆에서 부르는데 안들릴리가 없잖아. 가끔 보면 내가 옆에 있어도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 같고. 마치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서 무시당한 기분이야."


남편의 쏘아붙이는 것 같은 말투에 당혹감과 함께 익숙한 기분이 들었어요.

사실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넌 가끔 보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 같아. 아무리 관심 없어도 듣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돼?"

"또 못 들었다고 하려고? 안 듣고 싶은 건 아니고?"

"아니 방금 말했는데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어?"


순간 과거에 친구들에게 들었던 냉소적인 말투가 떠오르며 억울함이 몰려왔어요.

ADHD가 있는 분은 공감하겠지만 이런 경험이 꽤 흔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가 코칭하고 있는 여러 고객들이 비슷한 경우로 오해를 받았던 경험을 털어놓을 때도 많죠.


ADHD와 청력이 무슨 상관인가 의아한 분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청력이 좋지 않아 소리가 안 들린다기보다 뇌에서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처리가 잘 안 되는 현상입니다. 감각을 처리하는 뇌 영역이 오디오 믹서기라고 한다면 시기적절하게 볼륨을 높였다 줄였다 하는 기능의 오류가 생기는 거죠.


보통 ADHD를 '주의력 결핍'으로만 알고 있는데 주의력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선택 주의력'이 필요할 때가 있고,

두 가지 이상의 정보에 주의를 기울이는 '분할 주의력'

주의력을 계속 유지하는 '지속 주의력'

다른 정보로 주의를 옮기는 '주의력 전환'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함은 '지속 주의력'이 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만이 ADHD 주의력 조절 문제를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같은 ADHD라고 하더라도 개개인별로 약한 주의력이 조금씩 다르거든요.


저는 분할 주의력과 지속 주의력 가장 약합니다. 그래서 자주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거나 반대로 타기도 하고 멀티태스킹에 정말 취약합니다.


이런 특징을 차분하게 남편에게 설명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날은 감정이 앞서고 말았습니다.


"여보, 내가 일부러 신경 안 쓰거나 못 들은 척하는 게 아니라 나는 뭔가에 정신이 팔리면 바로 옆에서 말해도 잘 모를 때가 있어. 내가 ADHD인 거 알잖아."


"글쎄"


남편의 짧은 대답에 제 취약점이 변명으로만 치부되는 것 같아 답답함과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ADHD의 여러 증상들은 얼핏 보면 노력이나 의지 부재로 비치기 쉬워서 종종 변명으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ADHD에 대한 노출을 할 때는 적절한 타이밍과 설명 방식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죠.


이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도 사람인지라 적절하지 않을 때 미숙한 감정적으로 터뜨리고 말았네요^^;


"오빤 이해를 못 할 수도 있지만 ADHD는 핑계가 아니라 약점이야. 오빠가 왼쪽 귀가 잘 안 들려서 내가 왼쪽에서 이야기하면 잘 못 듣는 것처럼! 그렇다고 난 오빠가 잘 못 듣는다고 비난하지 않잖아"


남편은 어린 시절 사고로 왼쪽 청각을 거의 잃었습니다. 일상생활에는 크게 지장이 없어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항상 남편 오른쪽에 서서 걷거나 앉는 것이 습관이 되었죠.


제 말을 들은 남편의 얼굴이 순간 빠르게 굳어졌습니다.


아뿔싸.

억울한 감정과 함께 저를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앞선 나머지 남편의 취약한 부분을 건드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작은 불편함의 불씨가 자칫 큰 불로 번질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 저희는 잠시 말을 아낀 채 집으로 들어왔어요. 10년을 넘게 만나면서 큰소리 내며 싸워본 적이 없는 저희 부부의 노하우는 대화가 과열되기 시작할 때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지며 각자의 의도와 표현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약 10분 후에 거실에서 다시 만나 멈췄던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중요한 규칙은 이슈에 상관없이 먼저 각자 미숙한 표현방식에 대해 사과하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의도와 상대방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정제된 표현과 함께 진심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아까는 내가 서운한 마음이 앞서서 너무 냉소적으로 말한 것 같아. 나의 왼쪽 귀에 대해 언급했을 때는 당황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니 난 어쩔 때는 내가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잊을 때도 있거든. 마찬가지로 네가 ADHD라는 걸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아. 그래서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같아서 미안하네. 아까 옷의 지퍼가 고장 나서 봐달라고 불렀거든.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대답이 없어서 민망하고 아끼는 옷이 망가져서 갑자기 짜증도 났던 것 같아 "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스르륵 녹으며 남편의 입장을 제대로 들으니 미안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내 취약점을 이해받으려고 오빠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거 정말 미안해. 이미 서운한 사람한테 ADHD 때문이니까 무조건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것도 욕심이었던 것 같아. ADHD 코치라는 사람이 너무 성숙하지 못하게 표현했던 것 같아. 아까는 공공장소에서 나를 부르는데 내가 대답도 안 하고 쳐다보지도 않아서 민망했을 텐데 그 마음을 못 알아줬네. 다음엔 내가 바로 옆에서 불러도 못 들으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줘"


작은 소동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ADHD라는 '차이'가 관계의 '장벽'이 되지 않으려면 완벽한 이해보다 각자의 세상으로 초대하려는 다정한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할 일이 떠올랐는데요. ADHD 당사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우리 가족 ADHD 사용 설명서: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대화법> 워크숍을 준비해볼까 해요.

그 자리에 제 남편도 초대해야겠죠?^^


곧 소식 들려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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