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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새롬 Oct 03. 2018

#115.런던에도 맑은 날은 있다

보통 남녀의 375일 세계여행 기록

#영국 #런던 #몬머스커피

#코벤트가든 #런던아이 

#카지노 #뮤지컬킹키부츠

#2017년10월25일

<살짝은 당황스러운 런던의 맑은 얼굴.>

 선심 쓰듯 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밀던 날도 런던은 아름다웠다. 가을이 불러들인 맑은 도시의 얼굴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그 아래에서 알싸한 공기의 틈새를 비집고 걷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이른 아침, 조용하게 내려앉은 도시의 고요함이 나를 설레게 했다. 

<언니들이 살고 있는 깔꼼하고 가격이 사악한 아파트.>

 런던에서 공부 중인 친척 언니들은 이른 아침부터 자신들의 아파트로 우리를 초대해 아침밥을 차려주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공부 중인 학교 구경도 시켜주었다. 땅값이 극단적으로 비싼 런던에는 우리나라처럼 캠퍼스를 가진 대학교가 없다고 한다. 외곽으로 나가면 캠브리지나 옥스퍼드 같이 멋진 정원을 가진 학교들이 많지만 말이다. 그래서 언니들이 다니는 UCL 런던 대학교도 도심 곳곳에 위치한 건물들을 학교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마 전공에 따라 나눠지는 것 같았다. 

<UCL 런던 대학교 교육학부 건물.>

 스치듯 학교 구경을 끝내고 요즘 핫하다는 '몬모스 커피 Monmoth Coffee'에 갔다. 작은 가게 안은 사람들의 기분 좋은 소란과 고소한 커피 향기로 가득했다. 자리가 없어 커피를 가지고 나갈까 하다가 언니들이 여기까지 왔으니 기다렸다가 안에서 마셔보자고 했다. 

<몬모스 커피도 언니 카드 찬스ㅋ>

 공간이 좁으니 합석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그마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와 남편 쌍둥이 언니들 그리고 처음 보는 두 명의 남자분이 둘러앉아 커피를 마셨다. 테이블 위에는 이곳의 명물이라는 설탕이 밥그릇 같은 곳에 듬뿍 담겨 있었다. 설탕이 다 같은 설탕이지 뭐가 다르겠어라는 마음으로 티스푼을 이용해 조금 맛을 봤는데 진짜 맛있다. 노골적인 단맛을 지닌 백설탕과 다르게 은은하게 달짝지근하면서도 특유의 향이 있어 좋았다.

<맛있는 설탕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됨.>

 커피 한 잔을 말끔하게 비우고 카페를 나오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카페인에 취약한 나의 체질 때문인지 아니면 댄디한 영국 남자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날씨 좋은 런던의 풍경 때문인지는 잘은 모르겠으나 나의 빨라지는 동공의 움직임을 미루어 봤을 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런던은 사람 구경만 해도 재미있다. 패션쇼 구경하는 느낌.>

 정체불명의 두근거림을 안고 런던의 햇살을 가르며 도착한 곳은 '코벤트 가든 Covent Garden'. 지금은 광장이지만 옛날엔 이곳이 수도원(Covent)의 채소밭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에서 주인공 오드리 헵번이 꽃을 팔던 바로 그 장소이기도 하다. 

<날이 좋아 그런지 코벤트 가든에 사람들이 많다.>

 크리스마스가 아직 두 달이나 남았음에도 광장 옆 마켓 곳곳에는 이미 그날의 달뜬 설렘이 한창이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로 이루어진 현악 사중주의 버스킹 연주가 사람들의 대화 사이로 스몄고, 우리는 난간에 기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를 10월부터 준비하는 부지런쟁이들.>
<사진만 봐도 그날의 기억이 귀로부터 솟아난다.>

 작은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인 마켓의 높은 천정에 현악기의 울림이 닿아 만들어지는 소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다른 악기들이 귀를 통해 머리를 거쳐 마음으로 들어온다면 바이올린은 왠지 모르게 쇄골 어디쯤에 강하게 부딪히며 깨지듯 심장을 파고드는 느낌이 든다. 떨림 없이 정직히 그어지는 활의 움직임에도, 현을 흔드는 왼손의 강도가 점차 강해질 때에도 같은 울림으로 말이다. 나는 아마도 이날을 소리의 형태로 기억하게 될 듯싶다.

<영화 세트장 아니지? 응 아니야.>

 언니들이 사준 쉑쉑 버거를 들고 이 화창한 날의 런던을 만끽하기 위해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여기저기 영화 세트장 같은 풍경들이 느리게 곁을 지나갔다. 거리를 걷다 문득 우울함이 런던의 코트라면 화창함은 런던의 맨몸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 어떤 옷을 입든 가장 나중에 입게 되는 코트에 모든 것이 감추어지듯 귀여운 빨간 버스와 전화부스와 그 외의 사랑스러운 런던의 모든 것들은 항상 낮게 드리운 구름 아래 본래의 제 빛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손에 꼽힐 정도로 만나기 힘들다는 이런 화창한 날, 도시는 그동안 겹겹이 둘러 입었던 구름들을 모두 벗어내고 가장 솔직하고 노골적인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맑게 고개를 드러낸 해 아래의 런던이 새롭고 경이로워 보임도 모두 이 때문일 것이다.

<런던의 사랑스런 빨간 전화부스.>

 바람은 차가웠지만 따스하게 내려오는 햇살의 나른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템즈 강가의 다리 위에 서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런던아이를 구경했다.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멍때리고 보고 있으면 시간이 참 잘간다.>

 멍 때리며 서있는 내 곁에서 한 아저씨가 아일랜드 전통 악기인 백파이프 연주를 시작했다. 아저씨는 납작한 모자에 붉은색 조끼와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낯설지만 멋진 소리들을 만들어 냈다. 런던은 항상 뭔가를 구경할 때마다 누군가가 라이브로 bgm을 넣어주는 그런 도시였다. 그 덕에 눈 앞의 장면들은 나의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더욱 풍성한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뿌~ 하는 순간을 포착.>

 랜드마크에 눈도장도 찍었으니 이제 참새들이 방앗간에 갈 시간이다. 버스를 타고 뮤지컬 핫플레이스 웨스트엔드로! 남편은 전날 본 오페라의 유령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연속 충격 요법을 시전 하기 위해 다시 뮤지컬 티켓 할인 판매 부스인 tkt에 가서 '킹키부츠 Kinki boots'를 예매했다.

<빨간 버스만 다니는 줄 알았는데 검은 버스도 다닌다. 완전 클래식함.>

 공연 시작 전까지 약간 시간이 남아 근처 카지노에 가서 주사위 게임 몇 판을 했는데 본의 아니게 10파운드나 따버렸다. 아싸!

<카지노에서 눈먼 돈 10파운드 땄어요!!>

 뮤지컬 티켓을 1인당 25파운드(약 36,000원)에 샀는데 꽁으로 돈을 따니 추가 할인까지 받은 기분이 들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아갔는데 번쩍번쩍한 네온 간판에 발이 동동 굴러질 만큼 흥이 돋기 시작했다. 뮤지컬 '킹키부츠 Kinki boots'는 여장을 즐기는 남자인 '드래그퀸 Drag queen'들의 이야기로 한국에서도 크게 흥행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기대가 많이 됐다.

<엄청난 공연이 펼쳐질 것만 같은 포스의 네온 간판>

 우리 자리는 2층 5번째 줄이었는데 무대와 멀었지만 좌석마다 설치되어 있는 망원경을 사용하면 배우들의 표정까지 서운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망원경은 1파운드 동전을 자판기 동전 구멍 같은 곳에 넣으면 사용할 수 있다.  

<FOR HERE이라고 적힌 곳에 1파운드 동전을 넣으면 사용 가능.>

 전날 본 오페라의 유령이 뮤지컬계의 클래식이라면 킹키부츠는 실험적이고 톡톡 튀는 인디음악 같은 작품이었다. 여장을 한 남자 배우들은 때로는 파워풀한 성량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때로는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눈물짓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에너지는 2층까지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는 나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희열을 느꼈다. 

<2층에서도 충분히 즐거웠던 킹키부츠 관람.>

 매일 밤 세계적인 뮤지컬과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다니. 여행은 늘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현실로 데려와준다. 때때로 우리의 삶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가끔 이렇게 여행을 통해 비현실의 세계로 몸을 피해야 한다. 현실의 중력이 버거워 견딜 수 없을 때, 무게감도 현실감도 없는 여행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잠시 쉼을 얻으며 또다시 이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도피나 회피 또는 망각이라고 말해도 좋다. 우리 삶에는 그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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